제352화
제2편 재대결 (2)
삐이이익!
삐이익!
바닥에 내려서지 않고, 집의 지붕을 건너뛰며 달리고 있으니,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땡땡땡!
이어서 종까지 울렸다.
요새에 비상이 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상은 나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는 그리 위협이 되지 않았다.
성 전체에 비상이 떨어진 순간, 나는 이미 요새를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란 얼굴의 병사 옆을 지나, 나는 요새의 성벽을 뛰어내렸다.
요새의 병사나 기사 중에는 요새를 벗어나는 나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예언자의 호위 기사인 ‘알리나’ 라는 여자를 빼고는.
요새에서 뛰어내려 벌판을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가벼운 소리.
더구나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요새 안에서는 여러 가지 시설물들을 이용해서 거리를 유지했지만, 요새를 빠져나오니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나를 쫓는 알리나도 그걸 알고 더욱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고.
다행히 벌판을 지나, 숲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녀에게 잡히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렇게 속도를 맞췄다.
숲에 들어선 뒤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신검’을 꺼냈다.
내가 멈춰서자, 천천히 걸음을 멈추는 여성.
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 또 보게 되어서 반갑네.”
알리나는 내 미소에 눈을 찡그렸다.
“나는 처음 보는데?”
“괜찮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언뜻 들으면, 기억을 잃은 연인과의 대화 같았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험악했다.
기억을 잃은 연인 쪽이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너 같은 실력자가 무슨 장난이지?. 더구나 너는 율리아를 죽이려 했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친절히 그녀의 정체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할머니 예언자?”
내 말에 알리나는 표정이 굳었다.
“그냥 암살자 같은 게 아니었나?”
“제국 10대 검호를 유인하는 암살자 따위가 있을까.”
내 말에 알리나의 표정은 더욱 딱딱해졌다.
“나도 알고 있었나?”
“둘 다 조직 조속이란 것까지도 알고 있지.”
“그런가, 그러면 절대로 놓치면 안 되겠어. 뭘 더 알고 있는지 다 들어야겠어.”
그렇게 말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유인이라니. 이 숲에 무슨 함정 같은 것이라도 깔아 놓았나? 그런 것이 있으면 나를 이길 수 있는다고 생각한 거야?”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함정은 없어.”
함정을 만들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녀의 능력을 확인하고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
‘전투 예지’는 전투 상황에서 미래를 보는 능력이었다.
발동되는 함정이라면, 함정이 발동되기 전에 그녀는 미리 알 수 있었다.
나는 신검을 잡고, 다시 씩 웃었다.
공격을 미리 알아도 이길 방법은 있었다.
마지막 죽는 순간에 확인도 끝났고.
그래서 이 숲으로 유인한 것이었다.
예언가와 거리를 벌리고, 요새에 있는 자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숲에 가득한 나무들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들며 힘차게 신검을 휘둘렀다.
“두 번째 대결을 해 보자고.”
내 말에 알리나는 버럭 화를 냈다.
“이 미친놈이! 너하고는 처음 만났다니까!”
화를 낸 것과 달리, 그녀는 놀란 눈으로 힘껏 몸을 피했다.
보이지 않는 마나검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휩쓸었고, 그녀 대신 주위의 나무들이 잘려 나갔다.
이번에도 쉽게 몸을 피해 냈지만,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몸을 움직였다.
“미친! 말도 안 돼!”
그녀는 몸을 날리며, 황당한 눈으로 내가 자른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쾅! 쾅!
잘려 나간 나무들이 뒤로 넘어가는 대신에 그 자리에서 터져나갔다.
나무 내부에서 폭탄이 터진 것같이 산산이 터져나간 나무들은, 자신의 파편을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주변의 나무와 하늘과 바닥에, 급하게 몸을 움직이는 알리나에게도, 옆에 서 있는 나에게까지.
온 사방에 날카로운 나무 파편들이 뒤덮였다.
당연하게도, 나무를 터트린 것은 나였다.
신검의 두 가지 능력 중 하나인 ‘관통’ 능력을 변형해서 나무 내부를 터트린 것이었다.
마나를 가진 기사나, 마물이라면 이런 폭발을 일으키긴 어렵지만, 평범한 나무라면 가능했다.
거기다, 이런 공격으로 마나를 두른 마물을 상처입히기는 어려웠지만, 인간, 기사에게는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미친 듯이 도망치는 알리나에게도 효과가 있었고, 바로 앞에 서 있던 나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알리나의 몸에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피부가 찢어지고 핏방울이 튀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처를 입었다.
예상대로였다.
전투 시에 한 수 앞을 보는 ‘전투 예지’라도 그 상황에서 피할 곳이 없다면 그 예지가 무슨 도움일지.
물론, 이번에는 잔 상처로 끝났지만, 내가 여기서 끝낼 리가 없었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알리나는 따라오는 나를 보고, 하얗게 질려버렸다.
무슨 무서운 괴물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기야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나무가 터지는 바로 옆에 있었으니, 당연히 내가 파편을 제일 많이 뒤집어썼다.
마나로, 육체 강화로 강화된 몸이었지만, 그런 파편 속에서 멀쩡할 리가 없었다.
가죽 갑옷은 갈가리 찢겨 나갔고, 얼굴도 몸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느껴지는 고통으로 파악하자면, 뼈가 보이는 곳도 몇 군데 있을 것 같고, 옆구리는 내장이 언 듯 보일 것 같았다.
알리나보다 몇 배는 큰 상처들.
추가로 공격하기는커녕,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처들이었다.
상대에게 작은 상처를 입혀 놓고 내가 중상을 입은 상황.
수지타산이 안 맞는 싸움이었고, 교전비가 엉망인 전투였지만.
나에게는 ‘신검’이 있었다.
신검에 마나를 불어넣자, 신검의 또 다른 능력이 움직였다.
화아아악.
신검 안에서 변형된 마나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몸이 치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멈, 멈춰!”
알리나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터져나가는 나무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아앙!
나무 파편들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파편들은 허공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몸에도 가득 박혀 들어갔다.
내 몸에도, 알리나의 몸에도.
알리나의 몸도 나처럼 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퍼엉! 퍼엉! 퍼엉!
“제, 젠장, 말도 안 돼!”
죽기 전에 내가 별의별 방법을 다 사용한 것처럼 알리나도 파편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바위 아래에 숨기도 하고, 요새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알리나는 바위 아래에 피할 수도 요새로 도망칠 수 없었다.
알리나는 몰랐겠지만, 기본적으로 내 실력이 알리나보다 좋았다.
바위 아래로 몸을 피하면 내 공격을 피할 곳이 없어질 뿐이었다.
요새로 도망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쫓아오면서 나를 따라잡은 알리나였지만, 그것은 내가 속도를 맞춰 주었기 때문이었다.
속도도 내가 더 빨랐다.
그녀는 숲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자폭에 가까운 공격이 이어진 뒤에야, 결국 알리나를 잡을 수 있었다.
알리나는 내 생각 이상으로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한쪽 팔이 잘려 나가고, 두 다리가 부러진 뒤에야 겨우 멈추어 섰다.
나는 바닥에 누운 알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살아날 도리가 없었다.
잘려 나간 팔과 부러진 다리를 빼고도 성한 곳이 없었다.
배와 가슴이 난자되어서 내장도 흩뿌려진 상황이었고, 얼굴도 반쯤 잘려 나가 있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알리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 마물이야?”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인간.”
내 대답에도 그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 하지만, 그렇게 회복되는 사람이 있을 리가…….”
나는 갈라진 상처가 사라지고 있는 손을 들어 신검을 보여 주었다.
“이 검의 능력.”
“설마. 셀린의 신검?”
의외로 알리나는 검을 알아보았다.
“맞아.”
“그 검을 가지고 있었어? 그럼 설마……. 내 능력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내 말로 뭔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래. 전투 예지지.”
“그럼 아까 할머니가 말한 사람이 당신인 거야? 능력을 방해하는 사람이란 게……. 당신도 예언가야?”
“비슷해.”
정확한 답은 아니었지만, 정답에 많이 근접했다.
아마도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답일 터였다.
“하하하……. 우, 우리 집안 말고도 예언가 집안이 있었던 거였나?”
역시, 예언 능력은 두 사람 가문의 능력이었다.
아마도 제일 강한 능력을 가진 율리아라는 예언가는 유물을 이용해서 살려 놓고 있는 것일 터.
이건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었다.
“할, 할머니의 능력을 막을 정도의 예언가에다가 나를 이길 정도로 강한 검사라니…….”
허탈한 듯 말하는 알리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쓸모없는 능력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했는데…….”
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 이상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단순한 독백, 죽어 가는 자의 회한일 뿐이었다.
“……할머니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
그런 독백을 끝으로 알리나의 숨이 끊어졌다.
그녀의 숨이 끊어지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괜히 그녀의 독백을 듣기 위해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에 접근할수록 점점 내 예상을 벗어나는 능력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되살아나는 능력이나, 죽지 않는 능력이 나올지도 모르겠어.”
그런 상대를 만나면, 싸우는 대신 도망을 쳐야 할지도 몰랐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피를 너무 흘린 것 같았다.
신검으로 몸은 회복했지만, 전투의 피로와 고통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같이 고통에 만성이 된 사람이 아니라면, 이번 싸움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이겼고, 이제 한 사람만 남았군.”
호위를 치워버렸으니, 예언가를 만나볼 차례였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조직은 왜 왕국을 공격해왔는지, 지팡이나 유물들을 왜 찾아온 것인지.
그리고, 그녀가 본 미래는 무엇인지도.
알리나에게는 내가 예언가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예언가와 전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미래가 궁금했다.
예언가가 본 미래.
지금은 나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 미래가 무엇인지, 확인해 봐야 했다.
나는 땅을 터트려,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덩이 깊이 알리나의 시체를 묻은 뒤, 요새로 향했다.
사절단이 요새에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예언가를 만나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