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제1편 재대결 (1)
<사망하셨습니다.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다시 환해지는 빛.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나는 말에 탄 채로 공국의 관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멀리 앞에 보이는 기사들은 제국의 기사들.
아직, 제국 기사들의 호위를 받기 전이었다.
나는 먼저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철컥.
이제 얼굴은 가렸고.
이어서,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는 하비에르에게 말했다.
“저는 곧 뒤에 따라가겠습니다. 공국에 남겨 놓은 일이 있어서……. 기사들을 부탁합니다.”
하비에르의 눈이 커졌다.
나에게 뭐라 말하려는 하비에르를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각각, 마차에 타고 있는 카트린과 발레아, 그리고, 시드 백작에게도 말을 남겼다.
카트린과 발레아는 내 말에 놀라긴 했지만, 그동안의 경험 때문인지, 둘 다 내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드 백작은 달랐다.
그는 내 말을 듣고 벌컥 화를 냈다.
“호위 책임자가 중간에 이탈하려 하다니!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죄송합니다. 사정은 복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난 이일을 왕궁에 알릴 것이오.”
시드 백작은 사절단의 책임자로 내 이탈을 막아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책임지라는 이야기와 내 이탈을 바로 보고할 것이라고 선언했을 뿐이었다.
말만 들으면 정석적인 대응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말 사이에 흘러나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사절단을 이탈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내 약점을 찾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사절단을 조심하라는 공작의 이야기가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인 듯했다.
내가 사절단을 떠나기 전.
“따라갈까요?”
발레아가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여러 명이 움직일 일이 아니었다.
내 가장 큰 비밀이 엮인 일이었고.
이번만큼은 혼자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남긴 뒤, 나는 말을 멈춰 세웠다.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나는 사절단이 제국 기사들과 만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관문으로 들어섰다.
관문을 지키던 기사와 병사들은 의아해했지만, 나를 막지는 않았다.
그렇게 도시 안으로 들어온 뒤에, 나는 뒷골목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가까운 여관에 말을 맡기고, 다시 성벽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학생으로 경계를 섰던 성벽이자, 제국군과 싸웠던 곳, 그리고 제국군 기사들이 여러 번 넘어왔던 그 성벽.
여러 번 봤던 만큼, 나도 그 길을 알고 있었다.
물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충분히 피해갈 자신이 있었다.
성벽을 오르긴 전, 나는 의상을 확인했다.
누가 봐도, 가죽 갑옷을 입은 젊은 용병이었다.
문제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성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예상대로 들키지 않고 성벽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높이 자라난 잡초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벌판을 가로지르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벌판 뒤에 들어선 숲은 내 앞마당이었다.
나무 위로 뛰어오른 나는 나뭇가지들을 건너뛰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간 사절단을 앞지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사절단도 모르게, 계속 숲을 나아갔다.
숲을 나아가면서 나는 죽기 전의 일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뜬금없이 나타난 예언가와 강력한 능력자.
오랜만에 뒤통수를 맞아 버렸다.
적진 한복판에서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사절단의 일원만 아니었으면 도망을 치던가, 뭔가 더 발악을 해봤겠지만,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뭔가 해 보기가 어려웠다.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뜬금없는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예언자와 동행인의 말로는 두 사람이 찾아온 것은 유적에서 찾아낸 지팡이 유물 때문이었다.
나름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군가 찾아와서 물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예언자가 대놓고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열심히 몸을 날린 덕분인지, 전보다 훨씬 빨리 요새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새의 남쪽 문 주위는 예상대로 삼엄했다. 사절이 오기를 기다리느라 더 삼엄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요새의 남쪽 문을 확인한 뒤에 숲 가장자리를 타고, 요새를 크게 돌았다.
요새에는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벌판 너머 숲속을 달리는 내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요새를 중심으로 크게 반 바퀴를 도니, 경계가 허술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반대편 제국 쪽으로 향해 있는 문 주위였다.
북쪽 문은 생각보다 더 경비가 느슨했다.
문을 통해 상인과 용병들도 드나들고 있었고, 검문도, 지키는 병사들도 여유로워 보였다.
지금 내가 숨어 있는 나무 아래에도 상인들과 용병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요새로 가는 상인들과 상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이었다.
지쳐 보이는 상인들과 서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용병들.
나는 잠깐 고민을 한 뒤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원래는 경계가 약한 성벽을 뛰어넘을 생각이었지만, 용병들과 함께 문을 통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용병 사이에 스며들었다.
기척을 최대한 죽였더니,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요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밖에서 본 것처럼 검문은 형식적이었다.
로브 벗겨서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일행은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요새 안으로 들어온 뒤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은 병사들이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상인과 용병들을 따라 길을 걷다가, 슬쩍 일행을 벗어났다.
어두운 골목길 속으로 몸을 감춘 나는 요새 중심에 있는 성을 향해 나아갔다.
암살자들을 보고 익힌, 소리 나지 않는 발걸음으로 성을 향해 나아간 나는 곧 성 구석의 작은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루한 얼굴의 병사가 홀로 지키고 있는 작은 문.
하녀와 고용인들이 드나드는 문이 분명했다.
나는 성 밖 낡은 담벼락 뒤에 숨어 문을 지켜봤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문에서 사람이 나왔다.
남루한 옷을 입은 소년과 청년의 중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아마도, 이 성에서 일하는 고용인 같았다.
딱 맞는 사람이었다.
나는 담벼락이 만들어 준 그림자 속에서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싱글거리는 소년이었다.
나는 그가 골목길에 접어들자, 목을 낚아챘다.
컥!
짧은 비명과 함께 소년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를 그림자 안에 끌어들인 뒤, 눈앞에 단검을 들이댔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검을 보고, 소년은 단박에 겁을 먹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성에 두 여자가 와 있지? 아는 대로 말해봐.”
내 말에 소년은 자신이 아는 내용을 큰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소년에게는 안타깝게도 그의 외침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그를 잡을 때부터 주위에 방음벽을 쳐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으셨어요. 둘 다 엄청난 미인이라서…….”
자신의 외침이 소용없어지자, 점점 말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원하는 내용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소년은 두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요새에 그런 여성들이 나타났으니 소문이 안 돌 리도 없었고, 혈기 왕성한 소년이 그런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리도 없었다.
처음 봤을 때, 붉어진 얼굴로 싱글거리는 것도, 두 사람을 직접 봐서였던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이 어느 방에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방 위치를 알아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소년은 결국 내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평범한 소년이 자신의 순정을 지키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나는 소년을 푹 재운 뒤, 담벼락 너머에 숨겨 두었다.
버려진 창고 같으니, 한참 동안 발견되지 않을 듯했다.
“방 위치도 알았고, 이제 만나볼 땐가.”
나는 성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창이 나 있는 중간에 있는 방.
생각해 보니, 전에도 이렇게 이 성 외벽을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대공녀를 구할 생각으로 방에 쳐들어갔었다.
물론 함정이라, 신나게 도망갔지만.
이번에도 외벽을 올라가게 되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였다.
나는 담벼락을 밟고,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응, 뭐지?”
발을 박차는 소리에 문을 지키던 병사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머리 위, 성의 외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바로 위로 몸을 뽑아 올렸다.
한 번 몸을 튕길 때마다 십 미터 이상 몸을 솟구치니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나는 작은 창 아래에 붙은 채로 감각을 키웠다.
방안에서 마나들이 느껴졌다.
강대한 마나와 정순한 마나.
그리고, 동시에 창문으로 대화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오늘이나 내일까지는 올 거야.”
소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예언자와 동료가 방 안에 있었다.
다만, 둘 다 같은 방에 있다는 건데.
“뭔가 이상한데…….”
“할머니, 왜?”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아무튼. 뭐가 이상한데?”
“내 능력이 이상해진 것 같아. 갑자기 더 나빠진 것 같은데.”
이런,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나?
생각과 다른 상황에 좀 곤란해진 듯했다.
“그럼 큰일이잖아.”
“아냐. 이건, 좀 달라. 알리나! 잠깐 주위를 확인해 봐! 내 능력을 망가뜨리는 게 주변에 있는 것 같아!”
이런, 들켜버리는 건가?
아니, 잠깐,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알았어!”
쾅!
문이 박차는 소리와 함께 강대한 마나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가슴 안에 있는 유물 주머니에서 검은 쇠뇌를 꺼냈다.
한참을 안 썼던 것인데, 지금 같은 때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한 손을 벽에 박아넣은 채로 몸을 일으켜 창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예언자가 있었다.
로브를 벗은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
나는 창문 밖에서 쇠뇌를 겨누었다.
그리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퍽!
창문이 뚫리고, 쇠뇌가 예언자를 향해 쏘아졌다.
순식간에 예언자 앞까지 도착한 화살.
예언자의 눈이 꺼졌다.
그리고.
카아앙!
환한 빛과 함께 검은 화살이 튕기어 나왔다.
예상대로였다.
다른 귀족들도 다 유물로 몸을 방어하고 있는데, 저런 중요한 사람이 호위만 둘리가 없었다.
거기다, 방어막은 일회용이 아니었다.
그녀를 두른 반투명한 막을 보니, 내가 검을 휘둘러도 한두 번에 깨질 것 같지 않았다.
그 전에 호위가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고.
“꺄악!”
“누구냐!”
내 생각대로 예언가의 비명과 함께 강대한 마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나는 미련을 두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 몸을 던졌다.
아래로 자유낙하는 몸.
그리고, 머리 위로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우리의 괄괄한 예언자 호위께서 구멍 뚫린 창문을 깨고 몸을 날리신 것이었다.
역시, 죽기 전에 보았던 성격대로의 사람이었다.
사람을 호위하기보다, 습격한 자를 죽일 생각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자, 쫓아와라!’
나는 뒤에 제국의 검호를 달고, 요새 밖을 향해 힘차게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