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0화
제25편 전투 예지
나는 탑처럼 높이 솟아 있는 성의 옥상. 망루라 불릴 만한 곳에서 찾아올 사람들을 기다렸다.
나를 보고 경기를 일으킨 예언가와 대단한 실력의 귀족이었다.
“마나도, 실력도 대단해 보이지만, 가진 능력도 신기하던데……. 예언가와 같은 가문인가?”
내 중얼거림에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알았지?”
난간 밖, 성벽 쪽에서 들려온 대답이었다.
이어서, 그 대단한 실력의 귀족이 난간을 넘어, 옥상으로 올라왔다.
“보였으니까.”
나는 옥상에 올라온 여성을 보며 말했다.
< 복합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마나 회로 구축법
- 전투 예지
여성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보창에는 예언가와 비슷한 능력이 적혀 있었다.
‘전투 예지’
이름만 들어도 전투에 특화된 예지 능력이었다. 아무리 봐도 범상한 능력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 여성은 능력이 하나가 아니었다.
‘전투 예지’와 ‘마나 심법’
내가 두 번째로 보게 된 다중 능력자였다.
“정말 재미있어. 설마, 너도 유물로 나이를 젊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
여성의 말에 나는 반문했다.
“유물?”
“몰라? 그럼, 아니라는 이야기네. 와, 아무리 봐도 20살도 안 되어 보이는데 그런 실력이라니. 할머니가 한 말이 아니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꼬시는 건데…….”
뭔가,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할머니와 젊게 만드는 유물이라.
“설마, 예언가가 나이가 엄청 많은 건가.”
“좀 전에도 들었지만, 어떻게 할머니가 예언가라는 걸 안거지?”
슬프게도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여성은 내게 물은 뒤, 자신이 결정을 내렸다.
“뭐, 궁금한 것은 잡아 놓고 물어봐도 되겠지. 할머니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우선 잡아 놓고 보자고.”
그녀는 유물로 보이는 검을 들고,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름다운 여성은 아니었지만, 건강해 보이는 꽤 멋진 여성이었다.
적이 아니었으면 동료로 다니고 싶을 정도의 호탕한 여장부.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녀는 내 적이었다.
그녀가 내게 검을 겨누었지만, 나는 마주 검을 겨누지 않았다.
“관람객이 오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시작하지.”
“관람객?”
나는 크지 않은 옥상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내 말에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뒤에서 기다리면 알아서 포장해서 가져다줄 텐데, 그새를 못 참고.”
여성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계단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를 듣자, 여성은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
“왜 왔어요! 위험해요!”
계단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헉, 헉, 괜찮아. 저자가 살아 있으면, 나는 쓸모없으니까. 저자를 없애는 것을 눈으로 봐야 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브를 걸친 여성이 계단 밖으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몹시 힘들어 보았다.
각성해서 일반인보다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성의 꼭대기까지 뛰어 올라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까지 뛰어 올라오느라, 로브가 젖혀져 있었다.
예언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품위 있는 얼굴이었다.
마치, 조각상의 얼굴 같다고 할까.
그런 얼굴로 저렇게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묘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휴우. 기다려줘서 고마워.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각성한 귀족이라서 그런지, 예언가는 빠르게 숨을 골랐다.
“직접 와야 했어. 죽이기 전에 물어볼 것도 있었거든.”
“그럴 것 같았어요. 할……. 아니 율리아가 그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 봤거든요.”
율리아로 불리운 예언가는 손을 들어 말을 막고는 나를 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율리아라고 합니다. 제국에서 작은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녀의 소개가 끝나자, 같이 있던 여성이 끼어들어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알리나. 제국에서도 꽤 알아주는 육체 능력자야.”
실력을 보면 알아주는 정도 이상일 게 분명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 맞다. 이 남자, 아니 소년인가? 아무튼 율리아가 예언가라는 것도 알고 있던데? 우리가 같은 가문이라는 것도 알고.”
알리나의 말에 예언가는 눈썹을 모았다.
“그걸 어떻게…….”
“방금, 할머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내 말에 예언가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예언가가 노려보자, 알리나는 급하게 변명했다.
“아니, 그건 율리아가 예언가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어떻게 아는지 묻다 보니 나온 말이야……. 에이, 뭘 이런 걸 변명하는 거야.”
알리나의 말에 예언가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자기소개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물어볼 내용이라…….
처음은 신상 명세인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대로 알려 주기로 했다.
어차피 알고자 하면 다 알 수 있었다.
“알렉스. 알레스 디 샤를 자작이다.”
“그럼, 이번에 물아센 영지의 영주가 되신 분인가요?”
“맞다.”
이것도 알게 될 것이니, 사실대로 말했다.
나는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다 알려 줄 생각이었다.
당장은 알리나라는 여성을 이기기도 쉽지 않았고, 이곳은 적진이었다.
고문이나 심문으로 정보를 얻기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상대방의 정보는 그가 하는 질문으로도 알아낼 수 있었다.
내가 술술 털어놓으면 상대도 마음을 놓을 테고.
그사이에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둘 다 정보를 얻고, 나만 그 정보를 기억하게 될 터이니,
어찌 되었건, 내가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내가 스스럼없이 대답하자, 예언가는 계속 질문했다.
“혹시, 그곳 유적에서 지팡이 유물을 보지 못했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니. 못 봤다.”
나는 담담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내 말에 알리나가 혀를 찼다.
“에이, 아쉽네. 원래 그것 때문에 온 거잖아.”
하지만, 예언가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안 보여. 조금 전에까지는 보였는데…….”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한 말은 확인이 안 돼. 미래가 안 보여. 바로 전에까지는 보였는데…….”
“역시, 율리아의 예지를 막는 능력자라는 걸까?”
알리나의 말에 율리아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럴지도……. 정말, 당신의 능력이 궁금해지는데요?”
그녀가 말하는 중에, 알리나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니 잠깐, 지팡이를 찾지 못하면 곤란하잖아. 죽이면 안 되는 것 아냐?”
알리나의 말에 예언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내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해. 미래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 봐야 해.”
알리나가 다시 뭐라 하려 했지만, 나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멀쩡한 사람을 앞에 두고, 살리느니 죽이느니 떠드는 사람들을 참아 내기에는 내 참을성이 크지 않았다.
이건, 고통을 참고, 어려움을 이겨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저렇게 사람을 무시하다니.
아무래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귀족인 모양이었다.
나름 몇 가지 정보도 얻었으니, 더 알고 싶은 것들은, 다음에 물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은데.”
“아, 죄송해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알리나는 제국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강자이거든요. 제국이 아니라면 질 리가 없어요.”
예언자의 말에 알리나가 다시금 씩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웃음.
좀 전에는 보기 좋은 웃음처럼 보였는데, 다시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웃음이었다.
나는 저 웃음을 지워 버리기로 했다.
“질 리가 없다는 게 다중 능력자라서야?”
빙고.
알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떻게 알았지?”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알리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걸 알아차린 사람을 살려 준 적이 없었어.”
내 생각보다 중요한 비밀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전투 예지’가 내 생각대로의 능력이라면, 전세를 뒤집는 정도 이상의 능력이었다.
이제, 그걸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퉁.
나는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쏘아져 나가는 몸.
“아래로 내려가! 방해돼!”
알리나는 예언자에게 고함을 지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조금은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알리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알아차렸네.”
나는 방금, 틈을 봐서 예언자를 공격할 생각을 했었다.
단지 생각만 한 것일 뿐이었지만, 알리나는 그 생각에 반응한 것이었다.
이어서, 나는 내 앞을 막은 알리나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아직 닿지도 않을 거리였지만, 알리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캉!
보이지 않는 검이 닿기도 전에 알리나의 검에 막혀 버렸다.
동시에 반대편 손에서 쏘아진 단도.
보이지 않은 방향에서 날아온 단도였지만, 알리나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단도를 피해냈다.
그리고, 우리는 싸움에 돌입했다.
검이 충돌하고, 마나가 넘실거렸다.
쾅! 캉! 카앙!
알리나는 대단한 실력자였지만, 나도 20살 용사를 쓰러뜨린 사람이었다.
실력도 마나도 내가 더 나았다.
다른 이라면 한참 동안 싸우면 충분히 내가 이길 상대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밀리는 것은 알리나가 아니라 나였다.
알리나는 내가 어느 곳을 공격할지 미리 아는 것처럼, 내 공격을 막아 냈다.
내가 막기 어려운 곳만 찾아내서 공격했고.
덕분에 더 나은 실력으로도 공격을 막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욱 웃을 수 있었다.
“마음을 읽은 것은 아니고, 한 수, 아니 두 수 앞 미래를 보는 것인가.”
내 말에 알리나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이기고 있으면서 저런 표정이라니.
“왜 웃는 거지? 아니,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녀는 나를 몰아세우면서도 내게 물었다.
아쉽게도 이 질문들은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슬슬 싸움을 끝낼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성 아래에서 소란이 일고, 옥상 바닥이 떨리기 시작했다.
건물 전체에 영역이 펼쳐지고 있었다.
결국, 발레아가 알아차린 것이다.
이미, 개판이 된 일에 발레아가 끼어들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상대의 실력도 확인이 끝났다.
‘전투 예지’가 이런 방식이라면 상대할 방법이 있었다.
물론, 지금 이곳에서 하기는 무리였다.
준비할 시간도 필요했고, 연습도 필요했다.
결국, 이기는 것은 다음번에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럼, 마지막 확인.”
나는 검을 휘둘러 거리를 벌린 뒤, 가슴에서 검을 또 하나 꺼냈다.
다른 손으로 꺼낸 검은 신검이었다.
그렇게 두 검을 꺼내 양손에 쥐었다.
한 손에는 대검, 다른 손에는 신검.
이런 식의 쌍검을 실전에서 써 본 적이 없어서 실력은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려는 일에는 딱이었다.
나는 검을 양손에 들고, 제국의 검호에게 덤벼들었다.
검을 든 손을 크게 벌려 피할 곳을 막고, 몸으로 덤벼드는 무식한 공격.
딱 봐도 이건 자살 공격이었다.
하지만, 내 공격을 본 알리나의 표정은 무척이나 이상해졌다.
약점을 들킨 사람의 표정과 왜 이런 공격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같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푹.
가슴 깊이 검이 박혀 들었다.
극심한 고통이 가슴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졌다.
동시에 현기증이 확 일었다.
아무래도 심장을 관통당한 모양이었다.
역시, 완벽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쓰러졌을 공격.
하지만,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고통을 처음 느낀 것도 아니었고.
죽기 전, 양팔을 움직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나는 가슴에 검을 박아넣은 여성을 향해 양팔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부우우우웅!
두 검은 보이지 않는 마나검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알리나가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리나는 체조를 하듯이 몸을 움직여 내 검을 피해 냈다.
모든 검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신검과 보이지 않는 마나검도 피해 내고, 대검의 칼날도 벗어났다.
그렇게 두 검을 피한 뒤, 한껏 물러선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쌍검을 피해 내긴 했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갑옷이 잘려 나가고, 그녀의 가슴에는 길게 그어진 상처가 남아 있었다.
역시, 그녀의 능력은 한계가 있었다.
어두워지는 세상.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여성을 향해 씩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