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제24편 예언가 (3)
나는 사절단과 함께 요새의 문을 지나가면서 주변을 구경했다.
전에 한번 와 봤던 제국의 요새였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구경하진 못했었다.
그때는 대공녀를 찾기 위해 요새에 몰래 들어왔었고, 떠날 때도, 정신없이 싸우느라 구경할 틈이 없었다.
물론, 이제는 나만 기억하는 일이 되었지만, 이렇게 또 방문해서 요새를 구경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같이 요새에 들어온 사절단들은 나처럼 주변을 구경할 수 없었다.
험악한 시선이 가득 쏟아지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주변을 구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부터, 성벽 위에서 주변을 살피는 병사들, 요새 안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들까지.
요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절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국을 침략한 제국의 군대 중 일부는 이 요새에 있던 병사와 기사들이었다.
아니, 기사단장까지 왕궁으로 쳐들어온 것을 보면, 요새에 있던 기사와 병사 전체가 싸우러 갔었던 것일지도.
그곳에서 많은 병사가 죽고, 지휘부도 왕궁에서 다 죽어버렸으니, 이들이 왕국의 사절단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쪽 입장으로는 쳐들어온 놈들이 성을 내는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세상은 내로남불이었다.
전쟁이 옳건 그르건 간에, 내 친구와 동료를 죽인 자를 보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요새로 들어오기 전에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있었는데, 정말 잘한 일이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지금처럼 노려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마, 병사들을 다독이고 있는 기사들이 먼저 덤벼들었을지도 몰랐다.
우리를 호위하는 황제 기사들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일부러 안내한 게 아니라면, 결국 현장을 모르는 관료들의 삽질인 건가…….’
분위기가 점점 흉흉해지는 것을 보고, 제국 기사들은 빨리, 요새 안에 있는 성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성 안뜰에 마차를 세우고, 사람이 없는 응접실에 들어가니, 겨우 따끔거리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로 응접실로 안내된 것은 시드 백작과 카트린과 나. 사절단의 주축인 세 사람이었다.
볼프 기사가 우리에게 사과했다.
“이런 분위기일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날이 곧 저무니, 오늘은 여기서 묵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최대한 빨리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시드 백작도 질려 버렸는지, 정치적인 수식어는 다 빼고, 볼프 기사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기사가 사과하고 방을 나가자, 시드 백작과 카트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일 줄을 몰랐군. 여기서 협상을 해야 한다면 말을 꺼내기 전에 도망부터 쳐야 하겠습니다.”
겨우 안정되었는지, 시드 백작이 농담이 섞인 말을 꺼냈다.
그의 말에 카트린도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카트린이 손을 펼쳐 방음벽을 만들고 내게 물었다.
“도대체 공국에서 얼마나 죽였길래, 이 모양인 거야?”
내가 작위를 가지던, 영주가 되던 카트린이 나를 대하는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긴, 공주와 왕비에게도 편하게 이야기하곤 했으니, 자작 정도와 말하면서 말이 달라질 이유는 없을 듯했다.
여왕의 이모라 함부로 말한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테고.
이런 사람이 귀족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글쎄요. 죽인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요새 기사단장과 기사들을 왕궁에서 죽이고, 일대일 대결로 기사들을 꽤 죽였고, 진입로를 막느라 병사들을 상당히 죽이긴 했지만…….”
“아니, 공국과 제국 간에 싸우게 되면 그 정도는 죽는 게 당연……. 설마……. 전부 네가 죽인 사람들을 말한 거야?”
나는 입을 딱 벌린 두 사람을 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카트린이 놀란 것을 보니, 발레아도 공국에서 내가 얼마나 적을 죽였는지 알지 못한 듯했다.
“아니, 그 정도면 공국에서 영웅으로 불러도 될 정도잖아!”
음, 확실히 그렇게 불리고 있긴 합니다만.
카트린은 놀라서 계속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나를 졸랐고, 시드 백작은 이야기를 듣고,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과 다른 내 실력 때문에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좀 쉬죠.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일찍 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요새의 식당에서 식사할 생각은 다들 없어 보였다.
그런 시선을 받으며 식사를 했다가는 각성한 귀족이라도 탈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리 알려 준 각자의 방으로 가려고 할 때,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시드 백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을 때.
나는 가슴에서 검을 꺼내고 있었다.
‘젠장!’
문밖에서 무시무시한 마나가 느껴졌다.
내 감각도 미친 듯이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문 뒤에 있는 자는 엄청난 실력자였다.
저 정도 마나는 현실에서 한 번밖에 보지 못했었다.
제국의 검주인 투레 백작. 그에게서 느꼈던 마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 감응력’이 없는 시드 백작과 카트린은 내가 느낀 것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시드 백작의 물음에 대답이 들려왔다.
“잠시 면담을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이 방에 안내했던 볼프 기사의 목소리였다.
“중요한 분인가?”
검을 꺼내는 내 모습을 보지 못한 시드 백작은 간단한 질문으로, 문을 열어야 할지 저울질했다.
“네.”
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좀 피곤하지만, 만나 뵙도록 하지.”
그는 자신의 옷을 확인하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카트린과 나를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검을 뽑는 것을 보고, 카트린도 자신의 무기를 집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무기를…….”
나는 시드 백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응접실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존경하시는 분의 부탁이라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열린 문 뒤에는 우리에게 다시 사과하는 볼프 기사와 두 여성이 서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날렵한 몸매의 여성과 그 뒤에 로브를 둘러쓴 여성.
날렵한 몸매의 여성이 우리를 보며 말을 꺼냈다.
“알리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 우아!”
하지만, 그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여성은 나를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나처럼 마나를 읽는 능력은 없었지만, 그 정도 되는 실력자가 상대를 보고 실력을 가늠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대단한 마나는 가죽 갑옷을 입은 여성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내가 현실에서 본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실력의 여성이었고, 내가 이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놀란 여성의 뒤에 서 있는 여성을 보고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성.
대단한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전투에 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 위에 보이는 정보창에는 내가 눈을 뗄 수 없는 글이 적혀 있었다.
< 시간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예지
* 외부요인으로 능력 사용이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예언 능력자였다.
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하지? 공격해야 하나?
분명 조직에 소속되었다고 했는데, 이 예언자가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이라면 예언으로 내가 올 걸 알고 찾아온 걸까?
하지만, 나 때문에 예언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정보창에도 능력 사용이 어렵다고 적혀 있잖아.
‘젠장, 저 여자만 없었으면.’
앞을 막아선 여성이 없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검을 날렸을 터였다.
하지만, 저 정도 실력자라면 내 공격을 분명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일이 꼬일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우선 말로 이 상황을 넘겨야 할 것 같았다.
내 필살의 거짓말을 이용해 이 상황을 넘기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말로 넘길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당신! 당신이었어!”
“내 예언이 멈춘 것도! 예언이 틀리게 된 것도 모두 당신 때문이었어!”
로브를 쓴 여성이 나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원래는 무척이나 듣기 좋은 목소리였던 것 같았지만, 저렇게 거칠게 소리를 지르니, 듣기 거북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사람들은 놀라, 나와 로브를 쓴 여성을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지만, 한 사람, 가죽 갑옷을 입은 여성은 허리에 찬 검을 뽑으며 씩 웃었다.
“설마, 이렇게 바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나를 보며 예언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 잡을까?”
“잡아요. 아니 죽여요. 세상에서 없애 버려요! 세상을 위해, 제국을 위해, 없애야 해요!”
기껏 고민한 생각들이 다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내가 예언가를 알아본 것처럼, 그녀도 내가 방해자인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때, 시드 백작이 크게 소리쳤다.
“무슨 짓인가! 왕국의 사절에게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제국의 무도함은 끝이 없단 말인가!”
능력을 가득 실어서인지, 그의 음성은 마음을 울렸댔지만, 아쉽게도 그의 음성은 한 사람밖에 효과가 없었다.
“갑자기 이러시면 안 됩니다. 폐하가 직접 모셔오라고 명령하신 분들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저희 입장이…….”
퍽!
볼프 기사가 여자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검을 쥐지 않은 주먹이 목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사절이라서 그런가. 대단한 능력을 갖춘 분이네. 뭐,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따른 거겠지만. 아쉽게도 이건 황실의 명령을 넘어서는 일이거든.”
여자의 말에 시드 백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왕실의 명령을 넘어서는 일이라니. 그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카트린도 창백한 얼굴로 방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기사를 쓰러뜨린 주먹을 그녀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극심하게 실력이 차이 난다는 말이었고, 그녀도 여성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점점 밀려오는 마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이곳에는 발레아가 없었다.
사절의 지위에 따라 방을 배정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발레아도 같이 있었을 텐데…….
발레아가 있었으면,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차라리 발레아가 없는 게 잘된 것일 수도 있었다.
저 정도 실력자라면 발레아가 죽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싸움에 휘말리게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영역을 펼치고 있는 여성에게 말했다.
“싸울 장소를 바꾸지. 또 벽을 부수긴 그러니까.”
“뭐라고?”
어리둥절한 여성을 놔두고, 나는 뒤로 몸을 날렸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여자는 고함을 치며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쨍그랑.
하지만, 창 가까이 있었던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창을 부수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래쪽에는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는 병사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 사이로 뛰어내리지 않았다.
대신, 벽을 잡고 위로 몸을 솟구쳤다.
도망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정말, 싸울 장소를 바꿀 생각이었다.
잠시 뒤, 나는 성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나는 대검을 바닥에 꽂고, 두 여자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이 싸워야 했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두 여성은 다음번의 양식이 되어 주어야 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