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8화
제23편 예언가 (2)
지팡이를 수리한 뒤, 대공녀는 다시 반쯤 기절해 버렸고, 나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오후에는 공국왕과 만났다.
다른 사절단과 같이 배알한 것이라,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사절단의 대표인 시드 백작과 끝낸 듯했고.
오랜만에 보게 된 공국왕은 전만큼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덩치는 그대로였지만, 전보다 순해 보인다고 할까.
내 실력이 더 올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공국왕의 인상이 객관적으로 전과 달라졌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이 되겠다는 목표가 사라져서일까?
아니면, 제국에게 나라를 유린당할 뻔해서 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공국왕도 조금은 평범한 왕처럼 보였다.
그레시아 공작도 달라진 것 같고, 공국왕도 변한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위치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모양이었다.
접견을 마친 다음 날. 우리는 다시 제국으로 가기 위해 공국의 왕궁을 나섰다.
성을 떠나는 동안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사절단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기사나, 병사, 고용인들은 잠깐의 휴식으로 여행의 피로를 다 풀어버린 듯했다.
마차를 모는 말들도 기운차 있었고.
다만, 시드 백작과 여러 관료는 공국의 관료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트린도 피곤해 보였다. 공국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귀족들을 계속 상대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 귀족들을 상대한 발레아는 멀쩡한 것을 보니, 카트린은 아직도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여러 표정의 사절단을 싣고, 마차들이 출발했다.
기사들이 반으로 나누어 선두와 뒤를 지켰고, 병사들이 기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번에는 후미에서 마차를 따라갔다.
사절단은 왕궁을 빠져나와 북쪽 성벽으로 향했다.
아직도 거리에는 우리 일행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지만, 다행히 어제 같은 환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거리를 구경하며, 옆에서 말을 모는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잘 쉬었습니까?”
“네. 잘 쉬었습니다.”
무척이나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기사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기사는 자작이라는 내 신분이 많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그래도 오늘은 거리가 평범해 보이네요.”
내 말에 기사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자작님이 그렇게 환영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나만 받은 건가요. 공주님이 도와주신 거라, 사절단 전체가 감사를 받은 거죠.”
“그런 건가요…….”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 선배가 같이 움직이니, 아카데미 때가 생각나네요.”
내 말에 하비에르 기사는 무의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도 그때가 생각나……. 아니, 납니다.”
그의 버벅거림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의 눈이 있으니, 존대만 붙여 주시면 됩니다. 너무 굳어있으면 대하기가 어려워요.”
“그, 그렇죠. 갑자기 후배가 작위를 가진 영주님이 되어 버리니 어떻게 대할지 몰라서…….”
난감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을 보니, 역시, 기사를 목표로 달려 온 사람다웠다.
이렇게 귀족의 예절에는 약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웬만한 기사 실력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실력이 늘어나 있었다.
내가 봐도, 다음 대의 왕실 기사단장에 제일 가까운 것은 하비에르 기사였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한숨을 쉬며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누구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이런, 놀리는 이야기가 돼버린 건가…….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다시 대화가 멈추었다.
그렇게 조용히 걷다 보니, 북쪽 성벽과 제국으로 향하는 관문이 나타났다.
성벽 일부가 무너진 곳에 목책을 세워 관문으로 만든 곳.
얼마 전, 이곳에서 제국군과 치열하게 싸웠었다.
조금 감회에 젖어 주위를 둘러보니, 관문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방치되어 있던 성벽은 보수 중이었고, 목책이 둘러쳐 있던 관문은 낮지만 단단한 돌 방책으로 둘러쳐 있었다.
통행을 위한 관문이 아니라, 이제는 적을 상대하기 위한 관문으로 보였다.
관문 너머, 성벽 밖 벌판에는 일단의 기사가 서 있었다.
사절단을 호위하기 위한 제국의 기사들이었다.
전이었으면, 공국 안에서 기다렸겠지만, 저번 전투 이후로 제국 기사들은 공식적으로도 공국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침략도 침략이었지만, 그 전에 기사들이 몰래 왕궁에 침입했던 만큼, 제국 기사가 공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공국왕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과 합류를 하기 위해서는 공국을 벗어나야 했다.
우리는 관문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관문을 지나갔다.
사절단으로 제국으로 가는 것이니만큼, 조금 전 왕궁을 출발할 때, 나도 기사들과 같은 갑옷으로 갈아입었었다.
기사들을 지휘하는 사람의 옷이 다르면, 제국인들이 보기에 좋지 않을 거라는 시드 백작의 말 때문이었다.
뭔가, 딴지를 거는 듯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왕실 갑옷을 입고, 왕궁을 출발했었다.
그런데, 그 갑옷의 효과를 이곳 관문에서 볼 줄이야.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는 위로 올려놓았지만, 똑같은 갑옷에 투구까지 쓰고 있으니, 관문을 지키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모두, 나를 왕실 기사 중 한 명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설마, 조금 전 도시의 거리에서도 소란이 없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까?
뭔가 자기도취에 빠진 것 같았지만, 그럴듯한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에 지나가는 헛생각을 털어버리고, 사절단과 함께 관문을 통과했다.
미리 이야기해 놓은 만큼, 사절단은 쉽게 관문을 지나갈 수 있었다.
관문을 벗어나면 이제부터는 제국의 땅이었다.
물론, 북쪽 성벽 앞은 공식적으로는 공국의 땅도, 제국의 땅도 아니었지만, 대륙 최강국인 차르 제국이 그런 공유지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니, 모두 성벽 너머는 제국의 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메시지창도 마찬가지였다.
<차르 제국에 들어섰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당연하게 나타날 줄이야.
역시, 제국을 방문하는 일이 평범하게 끝날 리가 없었다.
솔직히, 나도 평범한 사절로 끝낼 생각도 없었고.
다만, 조직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메시지창을 보니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예’라고 대답했다.
다음에도 사절단에 들어올 생각이라면, 저번 저장 시점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수도에 가서 사절단 임무를 받고, 공국에 들린 일까지.
사절단을 하려면 안 할 수 없는 귀찮은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형식적인 일들을 또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메시지창에 대답하는 사이, 사절단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제국 기사들 앞에 도착했다.
십여 명의 기사 중 한 명이 나와 사절단을 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절단 여러분, 저는 황실 선임 기사 볼프 휘더입니다. 지금부터 저희가 여러분을 경호하겠습니다.”
나는 제일 앞에 나선 황실 선임 기사와 다른 기사들을 보고 감탄했다.
‘마나 감응력’의 마나 감별과 감각으로 파악한 기사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더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저번 전투 때 본 기사들은 검주, 투레 백작을 빼면, 왕국의 기사들과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제국 기사들도 대단치 않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왕국의 다른 기사, 아니 왕실 기사들과 비교해 봐도 우리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이 훨씬 강했다.
앞에 나선 선임 기사를 빼더라도, 우리 쪽 기사들은 앞에 선 제국 기사들을 일대일로는 이기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건 하비에르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말을 꺼낸 선임 기사는 왕국의 왕실 선임 기사보다 훨씬 강했다.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보다야 약했지만, 웬만한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쉽게 제압할 수 있어 보였다.
하기야, 황제의 기사들이라면, 거대한 제국 기사들의 정점일 테니, 왕국 기사들보다 강한 것이 당연했다.
거기다, 왕국 기사들과 비슷해 보였던 제국의 기사들도, 그 숫자는 왕국보다 몇 배나 많을 터였다.
생각과 달리, 제국 기사들은 무척이나 친절하고 신사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자작이라니. 생각보다 실력이 대단하신 듯하군요.”
사절단의 호위 책임자로 나를 소개하자, 볼프 기사는 신기한 눈으로 나를 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우리를 호위했다.
미리 기사들을 앞쪽에 보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수시로 물었다.
오랫동안 으르렁거렸고, 얼마 전에는 공국에서 싸우기까지 했던 나라의 기사들이 보일만 한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의문을 느꼈고, 중간에 쉬는 동안 발레아가 직접 물어보았다.
“좀 복잡한 이야기인데……. 우리 기사단의 단장이 요하네스 황자님이십니다. 마물과 싸우기 위해 다른 나라와 손을 잡자고 하시는 분이시죠.”
볼프 선임 기사는 거기까지만 이야기했다.
부족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물론, 실무를 담당한 관료들과 귀족들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왕국을 출발하기 전, 사절단은 제국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었다.
전생의 브리핑처럼 자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로 대충 제국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차르 제국은 자신의 나라를 멸망한 고대 제국을 이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치고는 고대 제국의 기록과 역사에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여하튼, 그런 나라이니만큼, 고대 제국을 멸망시킨 마물에 대한 경각심이 강했다.
그것은 제국 설립 때부터, 제국의 주적으로 마물과 마왕으로 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다만, 마물을 대비하고, 제국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방향에 대해서는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파가 나뉘어 있었다.
매파와 비둘기파.
제국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희생시킬 수 있다는 파벌과,
마물과 마왕을 대비하기 위해 온 대륙의 나라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파벌.
그리고, 제국의 2 황자는 비둘기파의 일원이라고 들었었다.
‘황태자는 매파 쪽이라고 했었나.’
아무래도 우리 왕국의 사절을 요청한 것은 제국의 비둘기파인 모양이었다.
우리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왕국과 싸우지 않았던 기사들일 테고.
나는 그들의 친절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친절한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는 북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숲과 정리가 안 된 길.
그런 길을 지나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의 요새가 보였다.
사라진 삶에서 와 봤던 요새였다.
우리를 호위하는 기사들과 달리, 왕국을 싫어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몰랐지만, 요새에는 예언가가 와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