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제22편 예언가 (1)
책이 가득 찬 방.
제국 수도 모처에 만들어놓은 황태자의 두 번째 집무실은 집무실이라기보다, 서재나 도서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방 안쪽, 책상 뒤에는 제국의 황태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손에 든 문서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며 문서를 구겨버렸다.
“결국, 또 실패한 건가.”
황태자의 말에 앞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만큼은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겠지. 마물 때문이라고 했으니.”
“네, 예언과 시기가 달라져서……. 마물이 생각보다 강해졌던 모양입니다.”
“이건 조직도 별수 없었겠지. 예언대로 열심히 준비했을 테니.”
황태자는 이마를 쓰다듬었다.
조직을 탓하기는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타격이 컸다.
“네, 마침 순행하던 그곳의 영주와 신관 기사들이 아니었으면 마물이 유적에서 뛰쳐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남자의 말에 황태자는 재차 확인했다.
“사냥꾼들에게 확인한 거라고?”
“교단 쪽으로도 교차로 확인했습니다.”
“그럼, 사실이라는 건데……. 조직이 막지 못한 마물을 영주의 기사들과 신관 기사들이 막았다라…….”
황태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단한 기사라도 데리고 있었던 건가?”
“그보다, 영주 본인이 대단한 기사인듯합니다.”
“젊은 영주라고 들었는데?”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로, 공작의 숨은 검이었다가, 여왕의 호위 기사로 내전을 치렀다고 합니다. 서자로서 작위를 받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진 기사라고 들었습니다.”
휘이이익.
남자의 말에 황태자는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정말, 앞날이 밝은 기사겠군. 그런 영주와 그의 기사들이 신관 기사들과 함께 마물을 막아 냈다는 건가.”
보고서에 적힌 기사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긴 했지만, 남자는 황태자의 말을 막지 않았다.
그런 오류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 정도라면, 조직원들과 싸워서 약해진 마물이라면 감당해 낼 수 있었을 테지.”
결국, 황태자와 남자는 유적의 상황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이 실패한 마물 사냥을 젊은 영주 혼자 해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유물을 꺼낼 수는 없나?”
젊은 영주에 대한 감탄을 뒤로하고, 황태자는 눈앞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유적의 통로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몰래 파내기는 무리입니다.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대공사를 하더라도 몇 년은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영주에게 허락을 받지 않는 한 그런 공사는 무리겠지.”
“네.”
“혹시, 그 영주가 지팡이를 꺼내 왔을 가능성은 없나?”
“사냥꾼이나 마을 사람 중에는, 영주나 그의 기사가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나온 것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유물 가방 같은 것도 있으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황태자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영주가 가지고 있다면, 사던가, 뺐던가, 훔쳐야 할 테고, 유적에 묻혀 있다면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찌 되었든 그 젊은 영주를 만나야 하는군.”
황태자의 말에 남자가 반색하며 말을 꺼냈다.
“젊은 영주라면, 마침,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번 카를로스 왕국의 사절단에 그 영주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호오. 동생과 슈바이거 백작이 오랜만에 좋은 일을 했군.”
“일정 중에 자리를 마련해 볼까요?”
남자의 말에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한데……. 나는 왕국의 새로운 여왕에 계속 반대했었거든. 사절도 반대했고. 동생과 백작이 우겨서 된 일이라 내가 끼어들면 이상하게들 볼 거야.”
황태자의 말에 집무실 안쪽 소파에서 크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먼저 제가 만나볼게요.”
황태자와 남자의 시선이 쇼파로 향했다.
쇼파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 있던 아름다운 여성.
예언가가 황태자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안돼. 위험해.”
황태자의 거절에 예언가가 조금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알리나하고 같이 갈게요. 왕국인들을 만나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가게 해주세요.”
그녀의 부탁에 황태자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예언가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예언이 계속 틀리면서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황태자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제국의 10대 검호 중 한 명과 같이 가겠다니.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잠깐 바람을 쐰다는 생각으로 다녀오도록.”
“고마워요.”
예언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이어서 남자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저는 조직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부탁하지.”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알겠습니다.”
남자의 대답으로 황태자의 집무실은 조용해졌다.
잠시 뒤, 창문을 통해 몇 마리의 새가 남쪽으로 날아갔다.
* * *
우리가 가려는 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나아갔다.
영지들을 지나는 동안, 도적이나 강도들이 덤벼들지는 않았다.
전보다 영지들의 상황이 나아진 것도 있었지만, 감히 이런 대행렬을 공격하려는 강도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몇몇 영지의 영주들이 놀라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왔을 정도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계속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 사절단은 공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국에 도착한 우리는 큰 환영을 받았다.
공국은 내전 전의 분위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카를로스 왕국보다 차르 제국과 더 친해 보였던 공국이었지만, 이제 제국은 공국을 침략했던 적국일 뿐이었다.
카를로스 왕국은 제국의 침략을 같이 막아 준 모국이었고.
언제 알려진 것인지, 공국의 시민들은 길거리에 나와 수도로 들어서는 우리를 환영했고, 우리의 머리 위로는 꽃종이들이 한 아름 쏟아졌다.
공국에는 따로 꽃종이를 모아두는 창고가 있는 것인지. 꽃종이들은 눈발이 날리듯 계속 쏟아져 내렸다.
우리 일행 모두가 공국의 시민과 병사들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그중에 제일 많이 환영을 받은 것은 바로 나였다.
내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던 병사와 기사 중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꽤 있었다.
내가 성밖에서 홀로 제국 기사들을 막은 것을 본 사람들은 더 많았다.
지금 보니, 길에 나온 모든 사람은 나를 아는 것 같았다.
한 명, 두 명, 사람들이 나를 가리키자,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목놓아 나를 부르는 아가씨들과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아주머니.
그리고, 모자를 벗고 내게 고개를 숙이는 노인까지.
그들은 모두 내게 감사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마누엘이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사절단의 다른 일행도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나도 예상보다 열광적인 반응에 얼떨떨하기도 했고.
거기다 설명은 발레아가 더 잘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이자, 마차 안에 있던 발레아는 카트린과 다른 여성들에게 내 행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직접 보지는 못했었는데, 언제 이야기를 들었는지,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맛깔나게 이야기했다.
환영은 수도의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왕궁에서도 이어졌다.
공국왕의 집사장이 나를 향해 깊게 머리를 숙였고, 하녀와 고용인들이 다시 한번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기사들이 왕궁에 쳐들어왔을 때, 그들을 물리친 것이 나였기 때문이었다.
사절단 일행은 이제 포기를 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들 자신들의 일을 보기 위해 흩어졌다.
휴식을 위해 손님방으로 향하는 이들과 공국의 관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행정부로 향하는 관료들.
그리고, 공국왕을 배알할 준비를 하는 시드 백작까지.
발레아가 왕궁에서 친해진 사람들을 만나러 떠난 뒤에 나도 대공녀를 찾아갔다.
“어서 오세요.”
대공녀는 그녀의 응접실에서 나를 크게 환영했다.
“모두의 과한 환영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공녀에게 도시에 들어오면서부터 받은 환영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내 감사에 대공녀는 고개를 저었다.
“과한 게 아니에요. 전부 알렉스 공이 하신 일이에요. 공이 이 나라를 지켰고, 사람들을 구했어요.”
그녀는 팔을 활짝 폈다.
그리고, 그녀답지 않게 열변을 토해냈다.
“공의 업적을 본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벌써 음유시인의 노래로 만들어졌어요.”
아니 잠깐, 내 이야기가 노래로 만들어졌다고?
“적어도 수도에서는 알렉스 공의 활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멍하니 대공녀의 말을 듣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영웅으로 낙점된 것입니까?”
내 말에 대공녀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렉스 공은 저희 공국을 구하신 영웅이세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는 나라를 구한 영웅만 한 게 없었다.
물론, 거짓은 들어 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공국 정부가 나서서 열심히 내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었다.
“앞으로 공국을 방문하기는 힘들겠군요.”
얼굴을 쓸며 말하자, 대공녀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대공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그런 대공녀 앞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이왕 이렇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대신 이것도 봐주시죠.”
안절부절못하던 대공녀는 내가 가슴에서 뽑아낸 지팡이를 보고 눈을 빛냈다.
역시, 유물 마니아.
이건 대공녀도 어쩔 수 없었다.
“대단한 유물이네요. 그런데, 오래되어서 많이 약해졌는데요. 예전이었으면 수리도 못 했겠어요.”
대공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지팡이, 고장 난 거였습니까?”
마나도 잘 받아들이고, 머릿속에 사용법도 떠올라서 아무 문제도 없는 줄 알았는데?
“네, 원래 한번 가동하면 계속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아서 유지하는 유물에요. 마나를 계속 주입하지 않아도 되는 정말 대단한 유물이죠. 그런데……. 이 유물의 효과가 좀 무서운데요. 이런 유물은 또 어디서 구한 건가요?”
대공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을 했다. 무척이나 긴 대답이었다.
“영지의 유적에서 찾았습니다. 조직이라는 자들이 파헤치던 유적이었습니다…….”
유물을 수리하려면, 공주에게 알린 것처럼, 대공녀에게도 조직에 대해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대공녀도 자신을 납치하려던 적이 누구인지 이제는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제국이기도 하지만, 조직이라는 곳이기도 하다는 말인 거군요.”
“네, 제 생각으로는 그 조직이 수리할 유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앞으로 수리할 유물이 나오거나.”
조직에는 예언가가 있었다. 앞으로 얻게 될 고장 난 유물을 수리하기 위해 미리 대공녀를 납치하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
내 말에 대공녀는 테이블에 놓인 지팡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이 지팡이 때문일 수도 있겠군요.”
“네.”
다른 유물들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이 유물이 들어 있을 터였다.
대공녀는 뚫어져라 지팡이를 노려보며 내게 물었다.
“그럼, 제가 이 유물을 고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지고 싶어 하던 자들의 집 깊숙이 파묻어 놓을 생각입니다. 그들이 하려던 데로, 몰래요.”
내 말에 대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단단히 결심한 얼굴이었다.
“네, 저도 도울게요.”
대공녀가 지팡이에 손을 올렸다.
지팡이가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