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제19편 사절단 (1)
알렉스가 20세 용사를 쓰러뜨린 그 날.
카를로스 왕궁에 제국의 특사가 찾아왔다.
그는 커다란 알현실에서 어린 여왕에게 황제가 보낸 편지를 건네주었다.
여러 귀족을 뒤에 세운, 어린 여왕은 편지의 봉인을 뜯어낸 뒤에 내용을 쭉 읽었다.
전부 읽은 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를 귀족 고문관이자, 왕국의 재상에게 넘겨주었다.
공주에게 건네받은 편지를 읽고, 그레시아 공작은 의아한 얼굴로 특사를 바라보았다.
“축하드릴만한 일이긴 한데…….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렇죠? 저도 이해가 잘 안 돼요. 직접 설명해 주겠어요? 제국의 특.사.님?”
벽에 걸려있는 ‘기사의 검’ 아래, 왕좌에 앉아 있던 공주가 턱을 괴고 특사를 바라보았다.
특사는 어린 공주의 시선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왕국의 어린 여왕 정도는 자신의 세 치 혀로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자신했던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생긴 것은 분명 10대 초반의 소녀가 맞았지만, 저 행동은 아무리 봐도, 그 나이대의 소녀가 아니었다.
어린 모습과 달리, 여왕은 왕위에 올라선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이미 귀족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여왕 뒤에서 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공작도 겉으로 보기에는 여왕을 잘 보필하는 충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린 여왕의 말 한마디에 다들 쩔쩔매는 꼴을 보고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가 귀족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위, 위대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친서를 내려주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새로 왕위에 오르신 여왕의, 아니 여왕님의 계승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두 나라의 우호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처음에는 말을 더듬을 정도로 떨렸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외교사절로 굴렀던 덕분에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차분한 말은 공주의 말에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우, 우호의 회복을 기념하고자, 이번 황제 폐하의 50번째 탄생일에 왕국의 사절을 초청하셨습니다.”
어지간히 잘 끊었는지, 그는 다시 말을 더듬고 말았다.
“사, 사절을 보내시는 미덕을 보이셔서 두 나라의 밝은 미래를 펼쳐 보이시는 것이 어떠실…….”
거기다, 여왕은 마지막에는 손을 들어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여왕에게 완전히 말려버렸다.
나이에 맞지 않게 똑똑하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행동할 줄 생각도 못 했었다.
그렇게 사절이 패배감에 절어 있을 때, 공주와 왕국의 귀족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레시아 공작이 펼친 방음벽 덕분에 제국의 사절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제국은 정말 우리와 화해할 생각일까요?”
여왕은 먼저 즉위식 뒤에도 대사로 남아있었던, 공국의 왕세자에게 물었다.
제국에 대한 일이라면 이곳에서 공국의 왕세자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여왕의 물음에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화해하려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겁니다. 다만, 화해하려는 쪽이 친서를 보낸 것은 아닐 겁니다.”
그는 사절을 노려보았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제국의 침략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 도움 덕분에 겨우 막아낼 수 있었지만, 공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이 죽었었다.
아직도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서 아버지인 공왕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데, 저런 소리라니.
“제국은, 공국을 공격하는 데 실패했다고 바로 화해의 손을 내미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제국으로서는 피해가 큰 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제국을 믿고 군을 일으켰다가 뒤통수를 두들겨 맞았는데, 왕세자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왕세자가 안 좋은 말을 꺼내자, 다른 귀족들도 한마디씩을 더했다.
“2 왕자가 벌인 일도 제국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이피로스 왕국 군을 끌어들인 것도 제국이었잖습니까!”
“그전에 소로카 요새의 마물 웨이브도 있었고, 수도의 테러도 있었죠.”
다들 표정이 안 좋아졌다.
생각해보니 한두 건이 아니었다.
다 합쳐놓고 보니, 다른 나라였다면 바로 선전포고를 하고 공격해 들어갔을 만한 내용이었다.
거기다, 상황을 놓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생각해보니, 제국이 우리 왕국에다가 이렇게 많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죠.”
“그렇네요. 국경 분쟁으로 난리가 났을 때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몇몇 귀족이 꺼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여왕이 귀족들에게 물었다.
“제국이 왜 그런 걸까요?”
“…….”
여왕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신의 시선을 피하자, 여왕은 다시 물었다.
“혹시, 전에도 이랬는데 우리가 몰랐던 것은 아닐까요?”
“그건,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제국이 갑자기 실수를 연발할 리도 없고…….”
이번 질문에는 그래도 대답하는 귀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왕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 대신, 한사람이 전부 해결했을 수도 있겠죠.’
다만, 여왕이 생각한 답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여왕도 똑똑한 머리 덕에 귀족들의 성향을 잘 알게 되었다.
그 지저분한 정치도.
확실히 알렉스의 말이 맞았다.
그는 수도에 남아있으면 안 되었다. 이곳의 귀족들은 말로 남을 죽이는 자들이었다.
알렉스는 이곳에서 버텨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더 던져버리고 떠나버리던가, 아니면 전부 뒤집어 버렸겠지?’
여왕 호위 기사의 반란이라.
생각해보면 이것도 꽤 재미있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열심히 지원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여왕은 얼굴을 쓰다듬었다.
딴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알렉스가 돌아오게 하려면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시간도 필요했고, 세력도 더 만들어놓아야 했다.
그러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제국의 요청은 어떻게 할까요?”
여왕의 물음에 그레시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속을 알기 어렵지만, 거절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제국의 인정은 주변국과의 관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제국 때문에 못 하는 일이 한두 가지입니까. 제국과 합의만 잘하면 이피로스 놈들에게도 따질 수 있을 겁니다.”
“내전으로 피해가 너무 심합니다. 다른 왕국들과 빨리 교역을 열어야 합니다. 제국의 입김이 있다면 훨씬 더 빨라질 겁니다.”
여왕도 귀족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더구나, 제국이 뭔가 속셈이 있다면, 직접 가서 알아보는 게 좋았다.
그리고, 여왕은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제국의 요청은 승낙하는 것으로 하죠.”
“그럼, 사절로 갈 사람들을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여왕이 결정을 내렸고, 공작은 슬쩍, 다음 일을 자신이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여왕은 이번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최종 결정은 제가 내릴게요. 공표하지는 마세요.”
“……알겠습니다.”
여왕의 말에 공작은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그 뒤, 제국의 사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제국으로 돌아갔고, 왕국은 제국 황제의 생일 사절을 준비했다.
왕국의 행정부는 사절로 떠날 사람을 결정해서 여왕께 보고했고,
여왕은 그중에 몇 명을 바꿔서 다시 행정부로 내려보냈다.
여왕이 내려보낸 명단은 행정부에 작은 소란을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사자들에게 공문이 날아갔다.
* * *
얼마 뒤, 나에게도 공문이 날았다.
제국의 사절로 결정되었으니, 빨리 수도로 오라는 공문이었다.
나는 바로 오헨 기사를 불러 공문을 보여주었다.
“……그런 이유로 좀 더 있어 주셔야겠습니다.”
내 말에 오헨 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돌아가게 될 줄 알았는데, 다시 남으라고 하니 한숨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바나도 불러오면 좋을 것 같군요. 기껏 어머니를 모셔 왔는데, 자꾸 자리를 비워서 죄송해서요.”
그래도 이어진 내 말에 오헨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좋을 것 같네요.”
다행이었다.
한번 허락하면 다음의 허락도 쉬웠다. 그렇게 하다 보면 계속하게 되는 거였고.
계속하다 보면, 나는 전속 영주 대행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제가 없더라도 괜찮겠죠?”
“네, 다행히 재정이 괜찮아져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 날이 풀려서 영지민들의 사정도 상당히 괜찮아졌고……. 다음 추수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유적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레스티의 말대로 엄청난 가격에 팔려나갔다.
경매는 대성공이었고, 경매 때문에 도시의 상업지구까지 잠깐 활기에 찼다.
그 금화가 우리 영지에 재정을 채워주었다.
물론, 그건 내가 벌어온 돈이니, 나는 내 차입명부에 그 돈을 잘 기록해 두었다.
다른 영주들이야 영지의 돈은 내 돈이라는 생각이겠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미리미리 분리해놓아야, 나중에 편했다.
나중에 들고 나르기도 좋고, 영지를 팔아먹게 되더라도 계산이 복잡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내 돈과 영지의 돈을 섞어놓았다가는 영지민들에게 돈을 퍼다 주는 호구가 되거나, 영지민의 돈을 갈취하는 악덕 영주가 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내가 다 관리하기가 어려운데…….’
쓸만한 서기관이 필요했다. 비밀을 잘 지키는 충성된 서기관이.
벤자민 선배가 딱 좋았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수도에 가게 되었을 때, 쓸만한 사람을 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헨 기사의 말이 들려왔다.
“대신, 이번에 다녀오시면, 모레나 영지로 돌아가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쩝, 내 구상을 들킨 건가.
어쨌거나, 이번에 일을 시키려면, 그의 말은 들어주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원래는 오헨을 돌려보내고, 발레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왕국의 공식 사절로 움직이는 것이니 발레아가 따라오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내 계획은 바로 그 자리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왕궁으로 부른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발레아도 사절 명단에 들어있었다.
발레아는 카트린을 돕는 일행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왕의 이모이자, 아카데미 선생이었던 카트린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카트린은 여왕의 이모이니 이상할 게 없었지만, 발레아는 왜 포함되었는지…….
거기다, 명단에는 또 한 명 아는 사람이 있었다.
명단에는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많았다.
마지막 사람은 내 둘째 형인 마누엘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명단을 접었다.
뜬금없는 제국행은 무척이나 파란만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전처럼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발레아와 나는 수도로 향했다.
내전으로 황폐해졌던 왕국은 어느새 봄이 되어 새로운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