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제18편 20살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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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잡자 눈앞에 메시지가 지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였다.
수련검을 잡았던 것이 무척이나 오래된 것 같았다.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이 죽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 임시 사용자가 되었을 때는 무척 기뻤었다.
가상 세계에서 얻는 고통을 조절할 수 있어서 그 안에서 죽어도 실제로는 죽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통 조절은 쓸모없었지.”
고통을 조절하면 감각도 잘 느껴지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결국, 다시 현실과 같은 수치로 맞춰놓고 죽음을 반복해야 했었다.
“그렇게 해서 15살 용사를 이겼었지.”
나는 앞에 선 소년 용사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처음 봤을 때는 벽처럼 느껴졌던 15살 용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설픈 소년 용사의 실력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아서 정형화돼있는 검술과 실전을 많이 겪어보지 못한 능력까지.
이제는 어려움 없이 이길 수 있었다.
“자, 와라.”
나는 대검을 들고, 15살 용사에게 말했다.
잠시 뒤, 15살 용사는 내 검에 쓰러졌다.
처음 쓰러뜨리는 것도 아니었으니, 특별한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텅 빈 콜로세움에 환호성이 일리도 없었다.
적막한 콜레세움의 가운데에서 시체가 되어 사라지는 15살 용사를 앞에 두고, 나는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20살 용사.
아직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용사였다.
처음 15살 용사와 만났을 때보다 더한 벽을 느꼈던 용사.
왕국 제일의 기사가 되었어도 이길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마물 왕을 쓰러뜨린 그 순간부터, 얼마 전 유적에서 마물을 쓰러뜨릴 때까지 계속 이어진 확신이었다.
그리고, 지금 철창문으로 걸어 나오는 20살 용사, 카를로스 초대 왕을 보면서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진짜 초대 왕도 아니었고, 이곳은 현실도 아니었지만, 나는 진짜 20살 초대 왕과 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만큼, 저 용사는 왕국의 그 어떤 기사보다 강했다.
왕실기사단장도 마나를 회복한 세우타 공작도, 그리고, 그레시아 공작마저도 20살 용사를 이길 수 없었다.
다만, 한 명, 20살 용사보다 강한 사람은 본 적이 있긴 했다.
제국의 검호, 또는 검의 주인.
투레 백작은 확실히 20살 용사보다 강했었다.
제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라고 듣긴 했지만, 수백 년 뒤의 후손이 20살 용사보다 강하다니.
차르 제국의 저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런 제국마저 대륙의 반도 지배 못 하고 있으니, 대륙 전체를 지배했던 고대 제국은 얼마나 강했던 것일까?
그런 제국을 멸망시킨 마왕과 마물들은 얼마나 강했던 것인지…….
용사들이 힘을 합쳐서 마왕을 봉인한 것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설마, 20살 용사를 쓰러뜨리면, 25살, 30살……. 그렇게 계속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기사의 검’을 통해 과거를 봤을 때도 카를로스 왕이 그렇게 나이를 먹지는 않았었다.
마왕을 봉인한 뒤에도 더 강해졌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고.
물론, ‘기사의 검’으로 본 카를로스 왕은 눈앞의 20살 용사보다 더 강한 것 같았지만.
빙의를 해버려서인지, 정확한 실력은 알 수 없었다.
내 앞에 선 20살 용사는 어린 티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충분한 훈련과 실전으로 어리숙한 티도 보이지 않았고.
20살 용사는 젊음이 가득한 완성에 가까운 기사였다.
하지만, 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나를 가득 끌어올렸다.
그리고, 몸 전체에 마나를 퍼트렸다.
목걸이도, 신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런 검술과 마나가 완성된 기사를 상대하는 데에는 목걸이도 신검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목걸이로 강화된 마나는 내게 강력한 힘을 주지만, 그 거친 마나로는 정교한 검술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저런 완성된 기사가 아니거나, 마물을 상대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20살 용사에게는 약점이 될 뿐이었다.
신검도 마찬가지였다.
신검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보다, 손에 익은 대검을 쓰는 게 지금은 더 도움이 되었다.
이게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인지…….
하지만,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무기를 쓸 뿐.
20살 용사를 상대할 때는 목걸이 없이 대검을 쓰는 게 제일 좋을 뿐이었다.
마나가 몸에 가득 찼다.
내 부러지지 않는 대검에도 마나가 차올랐다.
웅웅우웅.
검신이 울렸다.
분명, 현실이 아니었지만, 검의 반응도 몸의 상태도 현실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나는 지금 이 상황을 현실로 생각 중이었다.
15살 용사에게는 덤비라고 했지만, 당연히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마나가 가득 찬 다리로 땅을 굴렀다.
쿵.
진각이 땅을 울리고, 나는 용사를 향해 쏘아졌다.
대검의 날을 타고 밀고 들어오는 ‘기사의 검’.
심법을 전환해서 검을 튕겨내고, 주먹을 용사의 얼굴을 향해 내 질렀다.
땅에 눕듯이 허리를 뒤로 꺾는 용사. 주먹은 허공을 가로질렀고, 이어서 용사의 반격이 들어왔다.
쾅, 쾅, 쾅.
검들이 들러붙고, 튕겨내고, 수많은 검술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격파되었다.
똑같은 검술과 마나가 서로를 향해 쏘아지고, 상극인 검술이 상대를 잡아먹기 위해 펼쳐졌다.
휘익! 서걱!
검이 옷을 자르고, 피부에 붉은 선을 남겼다.
거의 호각. 마나량도, 심법도 검술도 대등한 상대였다.
이대로라면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싸움이 끝없이 이어지겠지만, 나는 용사 카를로스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죽어서 과거로 돌아가는 ‘사자 회귀’ 이외에도, 카트린 가문의 능력. ‘마나 유형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바나의 버프까지.
거의 같은 실력이라, 용사는 내 검을 잘 막아냈지만, 한가지, 보이지 않는 마나의 검은 완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서걱!
내 검을 한번 막아낼 때마다, 용사의 피부가 깊게 잘려 나갔다.
그렇게 여러 번 당하게 되니, 용사는 보이지 않는 검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검을 대비하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검술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균형이 무너졌다.
용사는 급하게 빛나는 선, 검기를 내게 쏘아 보내고, ‘장비 소환’을 이용해서 내게 마구 검을 던져댔지만,
아쉽게도 그 능력들은 나도 전부 가지고 있었다.
검기는 검기로 막아내고, 단검을 던져서 날아오는 검을 쳐내며 나는 용사에게 달라붙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초근접전.
이바나의 버프 덕에 조금이나마 강한 내 주먹이 용사의 팔을 두들겼다.
그리고, 대검 대신 휘두른 단검의 보이지 않는 마나검이 용사의 가슴을 베어냈다.
결국, 용사는 피를 뿜으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나는 바로 대검을 소환해서 용사의 목을 쳐버렸다.
서걱.
용사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헉. 헉. 헉. 헉.”
나는 그제야 내 숨이 거칠어진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온몸에 잔상처가 가득한 것도.
하긴 20살 용사를 이기는데 이런 상처가 안 날 리가 없었다.
근육들도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니, 내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지나가 있었다.
“그래도 이긴 건가…….”
힘들고 아팠지만,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결국, 15살 용사에 이어 20살 용사도 이긴 것이었다.
마물왕도 죽이고, 전성기의 용사도 쓰러뜨렸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용사와 같은 반열에 섰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환호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만족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가 잘린 용사가 사라지더니, 다음 상대가 등장한 것이다.
[마지막 상대입니다. 마왕을 봉인한 25살 카를로스입니다.]
창살 문으로 걸어 나온 상대는 분명 방금 쓰러뜨린 카를로스가 맞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용사.
하지만, 용사의 모습은 단지 시간이 지났다는 것으로만 말하기 힘들었다.
용사는 얼굴도 갑옷도, 팔다리도 상처가 가득했다.
마왕과 싸웠다는 것은 다른 용사들과 함께 싸웠다는 소리일 테고, 그렇다면 포션과 치유능력, 신검으로 치료한 상처가 저 모양이라는 소리였다.
도대체 얼마나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인지.
분명 왕궁의 걸린 초대 왕의 초상화에는 저런 상처들이 없었다.
그 초상화도 결국, 보정의 결과였었다.
20살의 밝은 얼굴 대신, 관록이 넘치는(다른 말로 세파에 찌든) 얼굴을 하고, 용사는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용사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 후손을 위해 남기는 마지막 시험이다. 나를 뛰어넘어 위험을 대비해라.]
용사가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다른 말을 하지는 못하는 것을 보니, 아쉽게도 녹음된 말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용사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머리까지 근육으로 되어있다고 욕을 먹을 만했다.
자신보다 후손이 강해지기를 원하는 것이야 초대 왕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강해지는 훈련을 받다가 후손이 다 죽어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25살 용사를 앞에 두고, 나도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20살 용사도 이기고, 마물왕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해졌지만, 이 용사는 무리였다.
용사에게서 투레 백작을 보았을 때 느꼈던 벽이 다시 느껴졌다.
아니, 투레 백작보다 더 강해 보였다.
20살 용사가 완성된 기사처럼 보인다는 말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5년 동안, 마물과 마왕과의 싸움으로 성장한 용사는 20살의 용사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나도, 투레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대전쟁의 용사가 지금의 기사보다 약하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나마, 이 용사가 마지막이라는 게 안심이 되었다.
죽음을 반복한 내 기준으로는 오랜 시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 기준으로는 15살 용사를 쓰러뜨리고, 1년이 조금 지난 뒤, 20살 용사를 쓰러뜨린 것이었다.
1년 전에도 20살 용사는 지금처럼 높은 벽으로 보였었다.
지금도 넘지 못할 벽으로 보였지만, 분명, 오래지 않아 넘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덤벼들길 기다리는 용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에 도전해서 죽어줄 이유는 없었다.
“다음에 보자고.”
나는 용사에게 인사를 보내고, 탈출 키워드를 크게 외쳤다.
“귀환!”
<임시 사용자의 접속을 종료합니다.>
눈앞의 메시지를 보며,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왕궁에서 나를 불렀다.
제국으로 향하는 왕국 사절단으로 선정되었다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