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2화
제17편 신실한 여사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여사제를 보고, 나는 왜 여태 메시지창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유적에 도착하기 전에 메시지창이 나타났으니, 마물을 쓰러뜨린 뒤에도 ‘저장 시점’을 만들겠냐며 메시지창이 나타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메시지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아직, 위기가 끝난 게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적 내부에서 벌인 일을 이곳에서 알아차리다니.
나는 저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여사제를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말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말도 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무선 전화 비슷한 제한이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제안이 있건 없건 간에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전부 죽여야 하나? 아니면 회귀?’
카드가 하나 남아 있으니, 그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미 성공한 일을 다시 반복할 생각을 하니, 몹시 짜증이 날 뿐.
그래도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언제나처럼 정보는 최대한 얻어놓아야 할 터.
신관 기사들은 방해만 할 테니, 우선 치워버리고, 저 여사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등 뒤에 검을 잡아갔다.
[잠시만요! 멈춰주세요! 저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요!]
내가 검을 잡기 전에 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검을 잡기 직전에 팔이 멈춰 섰지만,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일어난 살기 때문인지, 기사들이 전부 검을 잡고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지?”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미겔이 눈을 찌푸리고, 디오구가 숙영지 밖으로 달려 나가는 사이, 나는 팔짱을 끼고 여사제를 노려보았다.
어서 말하라는 무언의 시위.
말로 묻는 게 편했지만, 이렇게 기사가 많은 곳에서 방음벽을 치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여사제는 내 시위를 알아보았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성기사님을 뵙습니다. 저는 셀린 여신의 딸, 조아나입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셀린의 신도만 아는 비밀스러운 성호였다.
나는 눈을 껌벅였다.
갑자기 등장한 성호와 여사제의 이단 선언에 얼이 빠져버렸다.
[에드가 기사가 죽게 된 덕분에 겨우 알려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드가 기사와 계속 연결되어 있어서 몰래 알려드릴 수 없었어요.]
[아, 맞다. 잠깐 제가 마나를 보낼 테니 막지 말아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과 함께 마나 선 하나가 흘러나와 내게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아주 가냘픈 선이었다. 위험할 리가 없어, 마나의 선을 받아들였다.
내가 받아들이자, 그녀와 연결되었던 마나 선은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와 연결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머릿속으로 말씀하시면 돼요.]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들리나?]
[네.]
이건 무선 전화 같은 게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음성 채팅방이었다.
연결된 사람은 듣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단지 자신에게 보낸 음성만 들을 수 있는.
확실히 죽은 기사가 그녀와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면 내게 말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가장 궁금한 질문부터 했다.
[교단의 여사제가 셀린의 신도라니. 치유 능력도 쓸 수 있을 텐데?]
내 물음에 조아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래서, 교단이 가짜인 거랍니다. 다른 신을 믿지 않는 저에게도 능력을 내려주다니. 말도 안 되게 관대하거나, 신이 준 능력이 아닌 거죠.]
[하지만, 교단의 신이 관대할 리가 없잖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사제 복장을 하고 저렇게 적나라한 말을 하다니.
소리 내서 말했다가는 신관 기사들이 바로 검을 뽑아 휘두를 이야기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여태 셀린의 신도들이 교단을 피해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네. 저희 일족들이 대대로 교단에 들어와서 교단의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큰 희생이었겠지만, 조아나의 음성은 밝았다.
나도 성기사이지만, 역시 종교인들은 무서웠다.
이왕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몇 가지 더 물어보았다.
[능력이 레스티가 정보를 얻던 그 원거리 통신하고도 비슷하던데…….]
[그 통신도 저희 일족이 유물을 써서 하는 거예요.]
능력이 뛰어난 자는 그녀처럼 교단에 잠입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통신 유물을 다룬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엘레나와 같이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 건가?]
[엘레나 님이 교단에 들어오신 것은 우연이었지만, 같이 다니게 된 것은 제가 지원을 했어요. 그동안 많이 친해졌답니다.]
그녀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에드가 기사를 처리해 주신 것은 감사드려요. 신관 기사라면 기도에나 힘쓸 것이지, 어찌나 치근덕거리던지……. 함정으로 유인하고 싶어질 정도였다니까요.]
그녀는 얌전한 겉모습과 달리, 무척이나 시끄러운 사제였다.
[유적에 있던 놈들과 교단을 싸우게 할 생각이신 거죠? 제가 잘 포장해서 보고를 올릴게요. 제가 더 알고 있어야 할 게 있나요?]
엘레나에게서 그동안의 일을 들은 모양인지, 조아나가 먼저 나서 주었다.
뜻밖의 지원에, 나는 조직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더 알려 주었다.
그 뒤에, 다시 조아나의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이번에는 내게 한 말이 아니었다.
[에드가 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형제, 자매에게 사과드립니다.]
그 말은 그녀가 신관 기사와 엘레나에게 보낸 말이었다.
나도 조아나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나에게도 그녀의 말이 들려온 것이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제가 에드가 님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젊은 영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신관 기사들과 엘레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야기가 없는데 동시에 머리를 끄덕이다니……. 알고 보니, 이것도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영주의 말과 에드가 님의 시신은 제가 들은 에드가 님의 마지막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에드가 님은 마지막까지 신께 영광을 바치고 돌아가셨습니다.]
에드가 기사는 별말 없이 죽어버렸는데, 마음속으로 기도라도 한 걸까?
하지만, 조아나가 직접 전해 준 말로는 신 대신 내게 기도한 모양이었다.
[정말, 날라리 기사였다니까요. 에드가 기사님은 죽을 때까지 자작님을 욕했어요.]
그리고, 조아나의 음성과 함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예상한 위험을 이겨냈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이제야 나타나다니…….
역시, 마물만이 아니라, 교단까지 한꺼번에 위기로 잡힌 모양이었다.
역시나 대답은 ‘예’ 였다.
내 ‘사자 회귀’ 능력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물론, 죽으면 과거로 돌아가고, 이렇게 위기 상황에 맞춰서 저장 시점을 만드는, 다른 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능력이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 메시지창이 뜨는 것을 보니, 이건 절대적인 신 같은 존재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위기와 해결만을 파악해서 메시지창을 만들어 내는 그런 인공지능에 가까운 능력일 뿐이었다.
내가 해결하건, 다른 이가 해결하건, 이미 해결된 상황에 가깝던, 내 능력은 구별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쉽게 해결되었지만, 나중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랐다.
익숙해졌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렸을 때 죽음을 반복했던 것처럼, 언젠가 회귀만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가 있을지도 몰랐다.
더 조심하고, 더 노력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용사를 꺾어야 했다.
수련 검 속에 있는 20살 용사.
영지로 돌아가면 용사 카를로스, 20살의 초대 왕에게 도전할 생각이었다.
우리는 그날 빈 천막에서 밤을 보내고, 치료를 받은 사냥꾼들과 함께 사냥꾼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있던 후안과 병사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고, 돌아온 사냥꾼들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남편과 아들,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한 가족은 슬픔에 잠겼지만, 다른 가족들이 그들을 위로해주었다.
이 세상, 그리고 항상 위험과 함께 지내는 사냥꾼들의 마을이다 보니, 슬픔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사냥꾼들은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잔치를 벌였다.
나는 유적 앞 숙영지에서 가져온 음식을 마을에 풀었다.
어찌 되었건 여기서 유물들을 얻게 되었으니, 쉽게 구한 식량 정도는 충분히 베풀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의 환대를 받은 뒤, 우리는 산맥을 떠났다.
교단 사람들과는 산맥 입구에서 헤어졌다.
“도움이 필요하면 또 연락할게.”
조금은 뻔뻔한 엘레나의 말과 함께 조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엘레나 님 옆에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뭔가 알게 되면 레스티 님을 통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도 인사를 보냈다.
[내 가족이라고 특별히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내 말을 들은 조아나의 눈이 커졌다.
이어서 애매한 얼굴이 되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교단 사람들은 다른 길로 떠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교단 사람들과 함께 조아나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그녀의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셀린 여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교단에 보고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연결을 하게 될 터였다.
나와 연결을 남겨둘 수는 없었다.
조금 허전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그런 기분을 털어버리고, 물아센 시로 향했다.
* * *
한참 만에 돌아온 물아센 시였지만,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아직 활기차 있었고, 병사들의 군기도 나쁘지 않았다.
우고와 총집사 그리고, 오헨 기사가 잘 다스린 덕분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변한 게 있었다.
더 줄어든 창고였다.
이제, 물아센의 식량창고는 모레나 영지의 식량을 쓰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였다.
나는 도시로 돌아온 뒤에 바로 레스티를 불러, 유적에서 가져온 유물을 보여 주었다.
“특이한 유물이라 값어치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유물을 살피는 레스티를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빛을 비추면 피부 아래의 혈관이 보이는 등이나, 혈액을 알아서 나누어 주는 투명 잔에, 근육과 살과 뼈를 결 따라 잘라주는 칼까지.
내가 먼저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실생활에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유물들이었다.
하지만, 레스티의 반응은 영 딴판이었다.
“이건 대단한데요!”
그의 감탄에 나는 머리를 긁던 손을 내렸다.
“이렇게 희귀한 유물들은 부르는 게 값입니다. 아시겠지만, 유용한 유물보다도 희귀한 유물이 더 비쌉니다. 이건 큰돈이 될 겁니다.”
설마, 명품인 거냐!
“이 유물들은 제가 경매에 올리겠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이 도시의 경매장도 크게 키울 수 있겠습니다. 자작님도 경매장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생각보다 좋은 반응에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나는 지금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즐거워하는 레스티를 보내고, 집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수련검을 꺼냈다.
한참 동안 꺼내지 않았던 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검을 잡았다.
이제, 20살 용사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