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제6편 구인 (2)
어머니의 응접실은 어렸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저택과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응접실.
어렸을 때는 이 응접실도 우리 모자에 대한 차별로 보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편안하게 응접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내가 응접실을 구경하는 동안, 이제는 20대 중반이 된 플로라가 어머니의 하녀장과 함께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플로라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는지, 전과 달리 무척 차분해 보였다.
그렇게 다과를 차려놓은 뒤, 하녀들은 응접실 구석으로 물러섰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켜 보았다.
예전 그대로의 맛. 맛있었다.
어머니도 차를 잠깐 맛보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놀랐단다.”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불리어서 나중에는 크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잠깐 내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하는 듯했다.
“나도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 몰랐구나.”
“어머니 덕분입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감사를 드렸다. 수많은 죽음 속에서 의지를 이어간 이유 중 하나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였다.
“글쎄다. 하지만, 아직은 확신하기는 조금 이른 것 같고…….”
“네?”
“아니, 아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딴 생각이라니.
내가 아는 어머니는 내 말을 듣는 중에 딴생각하는 분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지?
하지만, 어머니께서 말을 돌리셨으니, 다시 묻기도 어려웠다.
나는 우선 방금 한 이야기를 기억에 담아두기로 했다.
그 뒤로 나는 아카데미와 내전 중에 일들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위험한 일들과 회귀 때문에 앞뒤가 안 맞는 일들은 최대한 각색해서 들려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처음 하신 말은 뜻밖에도 발레아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레아를 영지에 맡기고 왔다고?”
“네.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어려웠습니다.”
“너도 이제 혼사를 잡을 때가 되었구나. 스스로 작위를 얻었으니, ‘서자’인 것을 트집 잡을 사람도 없을 테고.”
아니,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시는 거지? 갑작스러운 말에 조금 남아 있던 의문마저 전부 날아가 버렸다.
“네가 왔다는 말이 퍼지면, 네 상대를 소개해 주겠다는 사람이 많이 올 거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뭔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었다. 아기 때 잠깐씩 보았던 짓궂은 표정.
그런데, 내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아카데미가 멀쩡했다면 올해 졸업했을 테고, 다들 아카데미 졸업하고 약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니까…….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
거기다, 그건 발레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영지에 있었거나 수도에 있었으면 무도회에 다니며 얼굴을 알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게 싫어서 나를 따라온 걸까?’
잠깐, 그녀가 나를 따라올 만한 다른 이유가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가는 인간쓰레기가 될 것 같은 생각이었다.
훠이, 훠이.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리고, 어머니의 말에 대답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제가 공작령에 온 것은 어머니를 제 영지에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짓궂은 질문은 다른 이야기로 피해 가는 게 답이었다.
“어수선한 영지입니다. 거기다 영지가 두 개라 제가 한곳에 붙어있기도 힘듭니다. 발레아도 밖의 일만 해서 저택의 일은 모릅니다. 저택 집사장도 전 영주 때부터 있던 사람이라 믿기 쉽지 않고요. 아무래도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진짜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두 영지라서가 아니라, 나는 영지 밖으로 싸돌아다닐 일이 한가득이었다.
이번에는 발레아에게 부탁했지만, 앞으로 더 부탁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무력은 기사들만 잘 섭외하면 걱정 없을 테고, 저택은 어머니가 있으셔야 했다.
나는 어머니가 반대하실까 봐, 머릿속으로 설득할 말을 여러 가지 떠올려놓았다.
공작과 공작부인, 마누엘까지 수도에 가 있어서 이유를 만들어 내기가 훨씬 쉬워졌다.
어머니는 평민이시라 수도에 가시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이 영지에 남아 계시면 시온 부부에게 눈치가 보일 게 분명했고,
반대로 내 영지로 가면 자작의 어머니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내실 수 있다는 그런 말들.
하지만, 준비한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래, 같이 가자. 영지가 엉망이라니 나도 한 손을 도와야지. 내가 친정에 말하면 좀 더 도움이 될 거다.”
외가가 평민치고는 크게 상행을 하고 있다는 말은 계속 들었었다.
하지만, 상행이라면 내전으로 힘들었을 테니,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보다, 어머니가 같이 가신다는 게 기뻤다.
“다행입니다. 어머니가 안 가실까 봐 걱정했습니다.”
내 말에 어머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안 갈 거로 생각했니?”
“수도에서 공작에게 말했었는데, 공작은 어머니가 여기에 남으실 거라고 했거든요.”
내 말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런 편지를 보낸 거구나. 조금 더 기다리면 수도로 부르겠다니……. 역시나 공작님다운 편지라고 할까.”
어라……. 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그동안 내가 계속 참는 것을 보고 공작님이 조금 오해를 하셨나 봐.”
어머니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이렇게 훌륭하게 아들이 성장했는데, 공작님에게 메여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기분이 묘해졌다.
뭔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기분이랄까.
분명 공작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처음 듣는 어머니의 신랄한 말씀은 꽤 충격적이었다.
공작만이 아니라 나도 어머니에 대해 오해를 했던 것 같았다.
어머니의 나이는 이제 30대 중반.
전생까지 합치지 않아도 죽은 삶을 합치면 내가 많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평민이었지만, 집안이 잘살아서 공작이 같이 살자고 할 정도로 제대로 배운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가 마냥 참고 지내는 호구이자 천사일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공작과 사랑을 했다고 해도, 이런 고난 속에서 그 사랑이 항상 그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된단다. 이제 작위를 가진 어른이 되었으니, 같은 어른으로 대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건 충분히 이해되고, 감사할 일이었지만,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사람들은 각자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참고 버티는 거니까.”
어머니도 그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나는 어머니께 묻고 싶었다. 하지만, 더 물어도 대답해 주시지 않을 듯했다.
결국, 나는 담소만 더 나누고 방을 나서야 했다.
나는 플로라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오랜만에 플로라와 걸으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어린 시절, 내 옆에서 항상 시중을 들어주던 플로라였다.
전 같았으면 까불거리며 나를 축하해주었을 텐데, 지금은 조용히 내 앞에서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던 나는 플로라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내 영지로 오시게 되면 플로라도 오는 거야?”
내 말에 플로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남편이 정할 일이죠.”
“어? 결혼했어? 언제? 분명 저번 방학 때까지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잖아.”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결혼을 하고도 남을 나이이긴 했다.
하지만, 내게 말도 안 하고 결혼하다니.
이건, 나에 대한 배신이었다.
“공작님이 병사들을 데리고 싸우러 가시기 전에 결혼했어요. 결혼해놓아야 남편이 군대에서 죽기라도 하면 어머니를 제가 모실 수 있잖아요.”
어라,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가 죽더라도 시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게 되니까, 미리 결혼한 거라고?”
뭔가 오늘 하루는 상식이 붕괴하는 날인 모양이었다.
“남편보다 시어머니하고 더 친하거든요. 병사로 먹고사는데 전쟁터로 가게 되었으니, 뒷일도 생각해 놓아야죠.”
플로라의 옛날 모습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겉모습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남편은 무사히 돌아왔고?”
“네. 명이 길더라고요.”
“그럼, 플로라를 데려가려면 남편하고 시어머니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하나…….”
엄한 곳에서 난이도 있는 퀘스트가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플로라가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긴 한데…….
“그런데 허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말만 하면 바로 따라올걸요.”
“시어머니는 아직도 매일같이 알렉스 공자님이 건강하시기를 빌고 계시거든요. 남편도 공자님이 말씀하시면 냉큼 따라갈걸요.”
“설마……. 후안하고 결혼한 거야?”
“네.”
나는 황당한 얼굴로 플로라를 쳐다보았다.
후안이라니.
그의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계속 지원했던 병사.
이번에도 데려갈 사람 중에 제일 위쪽에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왜 후안은 내게 말을 안 한 거지?”
내전 중에 후안을 여러 번 만났었다.
여러 가지 일이 바빠서 붙어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넌지시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남편이 고지식하잖아요.”
아. 인정.
어머니 병을 고쳐주었다고 평생을 충성하겠다고 맹세한 남자였다.
괜한 부담을 줄까 봐서 말을 안 한 게 분명했다.
아니, 잠깐 두 사람은 어떻게 사귄 거지?
“설마……. 내가 둘을 이어준 것은 아니겠지?”
“뭐……. 공자님이 이어주신 거라고 봐도 되겠죠? 공자님이 매번 부르셔서 저택 고용인 말고 제일 자주 본 남자가 후안이었으니…….”
그동안 둘이 나 몰래 사귀고 있었다는 소리려나.
“원래는 공자님이 부를 때까지 결혼은 안 하겠다고 했는데, 전쟁이 나서, 제가 밀어붙였어요. 어머니를 혼자 둘 거냐고.”
이야기를 다 들으니,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럼, 일거양득, 일석이조인가?’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쉬운 일이었다.
그럼, 이제 기사들을 꼬실 차례였다.
솔직히 난이도는 이쪽이 높았다.
공작의 기사단에 있는 기사를 어린 자작의 영지로 데려와야 했다.
그동안 열심히 안면을 익힌 걸로 공략을 해 볼 생각이긴 했지만, 솔직히 나 같아도 와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미겔이나 우고에게 달라붙어서라도 기사 한둘은 소개를 받아야 했다.
꼬신 뒤에도 영주 대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건 한 명이라도 꼬신 뒤에 걱정할 문제였다.
다만, 내가 걱정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기사단 숙소로 가는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어? 아니 있나요?”
젊은 여성이었다.
이 집에서 내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젊은 여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헤어져서 마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패착이었다.
낯선 마나가 다가오는 것을 느껴놓고 피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아무래도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 좁은 저택에서 계속 피하기는 무리였다.
나는 나를 가로막은 여성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엘레나, 어린 시절 헤어진 내 누나였다.
엘레나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볼 만큼 내가 커져 버린 것이었지만, 엘레나 누나도 어렸을 때 모습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죽은 둘째 공작부인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