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제5편 구인 (1)
아쉽게도 자작의 둘째 부인이 따로 알고 있는 비밀 금고는 없었다.
그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짐에 들은 귀금속들도 꽤 값어치가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유물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내게 사람 복은 있는 모양이었다.
모레나 영지에서의 오헨 기사처럼 물아센 영지에서는 집사장 하리스가 영주의 행적과 그동안의 영지 전반의 상황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엉망이 된 영지였지만, 중심부에 도시까지 가지고 있는 영지인 만큼, 기본적인 영지의 풍족함은 모레나 영지보다 나았다.
영지 북쪽은 북부 산맥의 지류와 닿아, 괜찮은 삼림자원과 여러 광물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외의 영지는 농사도 괜찮게 잘 되는 모양이었다.
다만, 이번 영지전을 말아먹고, 그 뒤로 관리에 손을 놓는 바람에 당장 버틸만한 식량이 부족할 뿐이었다.
나는 우선 병사들을 불러들여 도시의 치안을 다시 잡았다.
의외로 엉망이 된 영주의 저택이 제일 먼저 복구되었다.
집사장의 요청대로 저택의 고용인들은 죄를 묻지 않고 계속 일을 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도시도 금방 치안이 잡혔다.
병사들이 열심히 해 주었기도 했지만, 레스티가 도시의 신도들을 이용해서 정보를 모으고,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들 덕에 나는 공주를 도와 내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자, 바닥에서 출세한 자수성가의 화신, 그리고 악을 처단하고, 관용을 베푸는 젊고 잘생긴 영주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잘생긴 것을 빼면 별로 틀린 것은 없는 소문이려나?
물아센 시의 빈민가.
쾅!
허름한 술집이 박살이 나고, 공포에 질린 비명이 무너지는 술집에 파묻혔다.
나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잔해를 치우며 폐허가 된 술집 밖으로 나왔다.
술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꽤 북적이던 거리였지만, 지금은 레스티만 홀로 서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인가?”
“네. 나머지는 동네 불량배들 정도라, 자작님이 직접 나서실 정도는 아닙니다.”
“뭐, 이곳도 훈련 삼아 나온 것이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되었어.”
마지막 남은 기사들도 내가 다 죽여버렸고, 선임 기사는 팔이 잘린 채로 쫓아내 버려서 이 도시에는 대련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실전을 겪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도시 곳곳을 장악한 조직들을 부수는 데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숨어 있던 실력자는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마나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도 없었고.
결국, 오늘처럼 화풀이에 불과한 일이 되어 버릴 때가 많았다.
“다른 마을들도 정리되고 있고?”
내가 움직이는 대신, 병사들을 도시 주변의 마을로 보내 치안을 잡아나가는 중이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도시의 소문이 퍼져나가서 강도나 도적들이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레스티가 뿌린 소문과 함께, 내가 조직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듣게 된 덕에 영지에서 깽판을 부리던 자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 다른 영지로 빠지거나, 원래 신분으로 돌아가거나 하겠죠.”
“다른 영지는 그쪽이 알아서 할 테니 상관없고. 원래 신분으로 돌아간다면 괜히 털어 낼 이유도 없겠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을들도 있었지만, 그런 외진 곳들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영주 저택을 쳐들어간 지도 두 주가 지났다.
이바나도 모레나 영지로 돌아갔고, 이 영지도 슬슬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벌써 물아센 영지가 살기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식량과 물자가 많이 부족했다. 죽은 영주가 남겨놓은 것들을 쏟아붓고 있지만,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적지 않았다.
물아센, 모레나 두 영지의 영주가 되었으니, 영지를 합쳐야 하겠지만, 당장은 물아센을 정상으로 돌려놓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잘 돌아가는 모레나 영지를 끌어들여 같이 수렁에 빠뜨릴 이유도 없고.
결국, 두 영지를 합치는 것은 조금 먼 미래가 될 것 같았다. 지금은 오헨 기사가 모레나 영지를 관리하게 두는 편이 나을 듯했다.
“어쨌거나 사람이 부족해.”
식량도 물자도 부족했지만, 더 급한 것은 일을 맡길 사람이었다.
영주인 내가 이렇게 직접 뛰는 것도, 레스티가 비서 겸 병사장으로 지내고 있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내가 사람을 구할 만한 곳은 몇 없었다.
그중에 한곳, 이제 그레시아 공작령을 가볼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남아야 한다는 건가요?”
집무실에 들어온 발레아가 손을 허리에 올리고 나를 노려보았다.
“부탁합니다. 잠시 공작령을 다녀올 때까지, 영주 대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화를 내는 그녀에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계속 같이 다니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발레아 이외에는 이 영지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집사장은 아직 신뢰할 수 없었고, 레스티는 본인의 무력이 부족했다.
실력 좋은 기사나 기사단이 있다면 걱정을 덜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맡길 사람이 발레아밖에 없었다.
“하아…….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할게요.”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다행히 발레아는 내 부탁을 쉽게 들어주었다.
이번에는 뭔가 다른 약속을 더 하지도 않고, 그냥 들어주었다.
무척 고마웠지만, 너무 쉽게 들어주어서, 조금 꺼림직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쉽게 들어주었는지는 영지를 떠날 때까지 발레아에게서 듣지 못했다.
다만, 내 이야기를 들은 집사장의 한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을 뿐이었다.
“영주님이 안 계실 때, 부인께서 집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죠.”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집사장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귀족 영애가 새로운 영주와 함께 영지를 찾아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나는 뭔가 변명을 계속하는 게 귀찮아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발레아가 영지를 관리하기가 편할 것 같기도 했고.
결국, 이번에는 나 혼자 공작령에 가게 되었다.
혼자라지만, 실제로 혼자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영주의 행차였다.
나는 사람들과 어머니를 데리고 올 생각이었고.
나는 마차를 타고, 고용인 여러 명과 병사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내가 탄 마차는 전 영주가 타고 다니던 마차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집사장이 저택에 있던 마차를 수리해서 출발하기 전에 내놓았다.
마차의 외관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 내가 이름과 함께 받은 가문의 문장, ‘마물의 머리에 거꾸로 박힌 검’도 수리하면서 마차 옆에 새겨 놓았던 것이다.
역시, 그는 능력 있는 집사장이었다.
말을 탄 병사가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길을 선도하고, 여러 대의 마차가 호위를 받으며 지나가니, 영지를 벗어나도 시비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기사가 호위하지 않아서인지, 몇몇 강도가 덤벼들기는 했지만, 마차 창을 열고, 단도를 몇 번 날려주자, 다들 도망가버렸다.
“도망쳐! 마차에 기사가 있어!”
내 영지가 아니어서 도망치는 강도들은 그냥 놔두었다.
전부 처리하려면 끝이 없었다.
아직도 많은 영지는 내전의 혼란이 지나가지 않았다. 영주가 죽은 영지는 그 혼란이 더 심했고.
다만, 슬슬 피로연도 끝나서 새로운 영주들이 내려올 테니, 혼란도 점점 줄어들 터였다.
그렇게 여러 영지를 가로질러 우리는 한 주 뒤, 공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령은 그대로였다.
내전의 상처도 보이지 않았고, 차출되었던 젊은이들도 대부분 무사히 돌아와서 사람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공작을 대신해서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이 꽤 일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공작이 수도로 갔는데도 공작령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그리고, 우리는 그 영주 대리 부부를 저택 앞에서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맞이하기 위해 저택 앞에 나온 것이었다.
살아생전 나를 맞이 하기 위해 집 앞에 나와준 사람이 없었는데…….
영주 대리 부부가 직접 나와서 기다리다니.
내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몬 데 그레시아 공자와 그의 아내 아드리아.
저택 앞에서 나를 맞이한 영주 대리 부부는 내 배다른 형과 형수였다.
“작위와 영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 말도 들었고. 축하한다.”
공작이 군대를 이끌기 시작할 때부터 영지는 시몬이 다스리고 있었다.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다니는 동안 영지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이 없는 것을 보니, 시몬이 생각보다 훨씬 영지를 잘 다스린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작은 쉽게 자리를 받고 수도에 남기로 했고.
이미 시몬에게 이 영지를 물려준 것으로 봐도 될듯했다.
“저도 축하드려요.”
시몬에 이어 아드리아도 내게 축하해주었다.
전과 달리 무척이나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아드리아 형수에게는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예전 다른 삶에서 보았던, 기사가 되고 싶어 내게 도전했던 그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예의 바르고 젊은 귀족 부인일 따름이었다.
후작가의 일로 꿈을 접고, 현실에 충실한 모습.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결정하고 형수가 된 이상 의미 없는 아쉬움이었다.
전부 털어버리고, 나도 마주 인사를 했다.
“영지를 잘 다스리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과한 칭찬이야.”
그렇게 첫인사를 끝내고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공작부인도, 마누엘 공자도 보이지 않으시군요.”
저택의 총집사도 나와 있고, 어머니도 나와 계셨지만,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마누엘이라면 영주가 되어 나타난 내 꼴을 보기 싫어서 안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귀족 예절을 제일로 아는 공작부인이 그런 이유로 안 나왔을 리가 없었다.
“음……. 이제야 형으로 부르라고 하기도 그렇겠지. 아무튼 어머니와 마누엘은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수도로 갔다. 덕분에 저택이 텅 비었어.”
하기야 뼛속까지 귀족인 공작부인께서 수도의 사교계에 참여할 기회를 놓치실 리가 없었다.
귀족의 명예에 걸릴 것도 없을 테고, 겉으로 보기에는 남편을 돕는 일일 테니, 신이 나서 달려갔을 게 분명했다.
이 영지에 남아봤자, 눈치만 보게 될 테니, 마누엘도 공작이 있는 수도로 가는 게 당연할 테고.
대화를 끝나기를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밝은 것도, 두 사람이 없기 때문이려나.
“아만다 부인이 기다리시는군. 나머지 이야기는 저녁 만찬 때 하지.”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에게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시온이 깜빡 잊었다며 한 가지 일을 내게 알려 주었다.
“집에 엘레나가 와 있다.”
엘레나 데 그레시아.
얼마 전 죽은 둘째 공작부인의 딸이자, 어렸을 때 수녀회 소속의 아카데미로 보내졌던 내 바로 위 누나.
집에 그녀가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