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제3편 물아센 영지 (2)
도시로 향하는 중에 보게 된 영지의 모습은 강도들이 장악했던 마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피폐해진 사람들과 들끓는 도적 떼들.
지친 영지민들은 문과 창을 걸어 닫고 우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모레나 영지와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덤벼오는 강도들만 처리하면서, 영지의 중심 도시로 향했다.
피해를 본 마을과 약탈을 당하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런 집과 마을을 지금 하나하나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다.
먼저 이 사태를 만든 윗사람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나아간 우리는 이틀 뒤, 멀리 도시, 물아센 시가 보이는 언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언덕은 도시로 향하는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도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닿지 않았다.
나무도 많아 수백의 사람이 모여 있어도 쉽게 들키지 않을 듯했다.
나는 언덕 뒤에 숙영지를 만들게 했다.
발레아도 돌아다니면서 지형을 움직여 숙영지가 밖에서 보이지 않게 했다.
발레아의 능력이 강해진 덕에 변한 지형은 능력을 거두어들여도 쉽게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물론, 능력을 사용할 때와 달리, 바꾼 지형의 강도와 안정성은 현실의 지형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가리는 정도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숙영지가 만들어진 뒤, 나는 레스티에게 병사들을 맡기고 발레아와 이비나와 함께 도시로 향했다.
영지를 정리한 뒤에 하루빨리 공작령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기 위해서도 다녀와야 했지만, 쓸 만한 병사와 기사를 스카우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쉽지 않겠지만, 선임 병사 몇 명 정도는 데려올 수 있을 터였다.
레스티가 맡은 일을 잘하고 있지만, 그가 병사들을 관리하는 것은 인력 낭비에 가까웠다.
어서 빨리 자기 일을 하게 해 주어야 했다.
병사들을 데리고 들어가 정리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내가 다스리게 될 도시가 더 엉망이 될 뿐이었다.
상황을 확인하고, 머리를 잘라낸 뒤에 병사들은 치안을 잡을 때 쓰는 게 더 나았다.
그런 이유로 성에는 우리 세 사람만 가게 된 것이다.
발레아와 이바나는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 나는 용병 차림으로 두 사람을 호위하는 모습으로 도시를 향해 나아갔다.
도시를 감싼 높지 않은 성벽 위에는 감시하는 병사가 보이지 않았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 일부가 벌겋게 술기운이 올라있는 것을 보니, 성벽 위에 병사도 술을 먹고 구석에 뻗어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성문을 막고 있지는 않았다. 우리가 오고 있다는 소문은 아직 이곳에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지쳐 보이는 영지민들과 함께 성문을 지나갔다.
“멈춰. 거기 둘 두건을 벗고 얼굴을 보여라.”
역시 예상대로라 할까. 병사들이 우리를 막아섰다.
확실히 로브로 얼굴과 몸을 숨기고 있으니, 오히려 눈에 뜨일만했다.
그렇다고, 두건을 벗고 있으면, 두 소녀가 눈에 안 뜨일 리도 없고.
갑작스러운 제지에 발레아가 손을 쓰려고 했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작은 성의입니다.”
나는 우리를 막아서는 병사의 손에 번개 같은 속도로 금화를 건네주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수도에서 잠시 내려오신 분들입니다. 돌아갈 때도 이 성문을 이용할 테니, 잘 봐주십시오.”
병사는 슬쩍 손에 쥐여준 금화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금화이기도 했지만, 평범한 금화가 아니라 유물처럼 보이는 고대 제국의 금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금화를 주었으니 눈이 안 뒤집힐 리가 없었다.
그는 금화를 가슴 깊이 숨기고는 근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오후 근무니, 다른 시간대에 오면 배려해 주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도록.”
“잘 알겠습니다.”
나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발레아와 이바나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벗어나자, 사람들이 흩어지더니 거리가 한가해졌다.
지저분한 거리와, 망가진 집들, 그리고 건들거리며 지나가는 병사들까지.
도시의 쇠락이 여실히 느껴졌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피해 가며 도시 중앙으로 향했다.
나는 병사가 보이기도 전에 일행을 뒷골목으로 안내했고, 피할 길이 없으면 발레아가 환영과 지형을 움직여 우리 모습을 감추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병사와 용병이 적지 않았지만, 우리는 오래지 않아 영주 저택 근처의 고급 주택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우리는 영주의 저택으로 가지 않았다.
“지금 가는 곳이 집사장 집이라고 했죠?”
나는 우리를 안내하는 이바나에게 물었다.
“네. 이 영지를 방문했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안내해 주셨던 분이세요. 고압적인 제 태도에도 친절을 잃지 않은 분이라 잘 기억하고 있어요.”
옆 영주의 딸이라서 친절하게 대한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집사장이라면 좋은 정보원일 터였다.
이바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쫓겨났건, 아직도 저택에서 일하고 있건 상황을 잘 아시겠죠.”
성격이 변했다고, 아예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냉정한 귀족의 눈은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집사장이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강제로 물어보든, 구슬리든 간에 정보를 알아낼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솔직히, 처음 영지로 들어설 때는 저 저택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다 때려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도 두목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으니, 마냥 때려잡기가 애매해져 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다 때려잡았다가, 새로운 영주 이미지가 개판이 나버리면 곤란했다.
물론, 좀 과한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출신이 애매한 나로서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고급 주택가 골목을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바나가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왜 병사에게 그런 귀한 유물을 준 건가요?”
“아, 성문에서 병사에게 준 금화 이야기인가요?”
“네. 잠깐 눈에 들어와서 보았는데, 평범한 금화가 아니더라고요.”
확실히 평범한 금화만으로도 충분히 통과가 가능했을 터였다.
이바나가 보기에는 낭비로 보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꼭 그럴 필요가 있었다.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니 나가는 돈과 식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평범한 금화 하나도 무척이나 아까웠다.
그래서 평범한 금화 대신 유물 금화를 사용한 것이었다.
“평범한 금화면 되찾을 수가 없어서죠.”
나는 손을 펴서 아까 건네주었던 금화를 이바나에게 보여 주었다.
손 위에는 아까 병사에게 건네준 금화가 놓여 있었다.
“마술입니다.”
놀라는 이바나에게 씩 웃어주었다.
따지고 보면, 마술이 아니라, 내 능력이었다.
장비 소환 능력.
금화도 유물급이 되면 충분히 내 장비로 인식시킬 수가 있었다.
그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발레아는 옆에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너무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좀 이상한 귀족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돼요.”
거기다, 그녀는 이바나에게 조언까지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칭찬은 아닌 듯한데…….
하지만, 발레아가 그렇게 말하다니. 그건 진정한 내로남불이었다.
위험한 도시 안을 걸어가며 우리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이어갔다.
긴장을 너무 안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긴장하기도 어려웠다.
저택과 가까운 주택가라서 그런지, 오다가 본 황량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곳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골목들을 지나, 잘 꾸며진 보기 좋은 집에 도착했다.
“오가는 길에 잠깐 들렸던 곳이라 기억하고 있었어요. 집사장의 아내도 친절했었어요.”
지금도 친절할지는 확인해 보면 될 터였다.
우리는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 * *
시간이 지나고, 도시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도시의 집들에는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전보다 훨씬 적은 수의 등불들이었다.
덕분에 훨씬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한 병사와 함께 중년 남자가 걷고 있었다.
남자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불이 켜진 집 앞에 멈춰서서 병사에게 말했다.
“수고했네. 내일 아침에도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집사장님.”
병사가 떠나고, 그는 문을 두들겼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그를 맞이했다.
“오셨네요. 고생하셨어요.”
아내가 그의 옷을 받아들자, 그는 피곤한 얼굴로 아내에게 말했다.
“더는 무리야. 짐 쌀 준비해.”
“아니, 그게…….”
“더 버티기 어려워. 영주를 더 기다리기가 힘들 것 같아, 잘못하다가는 며칠 안에 목이 잘려 나갈 수 있어. 내일이라도 떠나야 해.”
“아니, 잠깐만요.”
아내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남자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내가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집에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그는 아내의 손을 치우며 집 안을 바라보았다.
입구 안쪽, 응접실 문이 반쯤 열려 있고,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려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
아내가 잘 말려주었지만, 아쉽게도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 영지도 일이 복잡한 만큼, 이번에는 자신의 운이 좋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 아니, 영주 저택의 집사장은 옷을 정리하고, 응접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바나 영애.”
그는 오래전 보았던 소녀에게 인사했다.
영지 전까지 벌어졌던 사이였지만, 이미 양쪽 영주가 죽어버렸으니, 그와 소녀의 관계가 어색할 이유는 없었다.
다행히 이바나도 그의 인사를 잘 받아주었다.
그는 다른 이들을 보며 이바나에게 물었다.
“이 두 분은…….”
그의 물음에 이바나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젊은 남자가 직접 입을 열었다.
“알렉스 디 샤를 자작. 모레나 영지와 물아센 영지의 새로운 영주입니다.”
집사장은 잠시 멍하니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 * *
관상 같은 것을 따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이 집사장은 꽤 유능해 보였다.
문 앞에서 한 말을 들으니, 위기를 느끼는 감각도 괜찮았고.
한 영주를 모시는 의리 있는 집사는 아닌 것 같았지만, 누구 밑에서도 살아남고, 다시 쓰이는 그런 사람은 집사로서 충분히 쓸 만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보는 동안, 그도 나를 잘 확인한 듯했다.
집사장은 정신을 차린 척하면서, 내게 물었다.
“이렇게 세 분만 오신 겁니까?”
“병사들은 성밖에 숨겨 놓았습니다.”
“혼자 오신 것은 아니군요. 다행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한 모양이었다.
내 실력을 모르니, 병사들이 있다는 말에 안도하는 게 당연했다.
“죄송하지만, 우선 임명장을 보여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의외로 꼼꼼한 확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에게 공주의 직인이 새겨진 임명장을 보여 주었다.
임명장을 보고, 그는 굳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일찍 오셔서 다행입니다. 최대한 빨리, 아니 내일이라도 병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갑자기?
“저택, 아니 도시를 휘어잡은 자들이 재물을 들고 도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영주가 오기 전에 떠날 생각입니다.”
그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으로 가죠.”
“네?”
집사장이 이번에는 진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도망간다면서요. 바로 잡으러 갑시다.”
감히 내 물건을 가지고 도망치려 하다니.
음유시인의 노래건, 세기의 연애질이건 간에 이건 가만둘 수 없었다.
나는 놀란 집사장을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