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제22편 왕위 (2)
다음 날 저녁. 나는 회의장으로 향하는 공주를 호위했다.
공주는 무척 긴장한 것 같았다.
공주는 근래 많이 컸긴 했지만, 아직 10대 초반의 소녀였다.
경험이 많고, 머리가 좋아도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구나, 이 공회는 그녀가 지금 왕위에 오를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장소.
회의실은 반대하는 사람들과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 가득한 곳이었다.
나는 공주 옆을 걸으며 평범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주가 나를 쳐다보았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네. 걱정 안 할게요.”
그리고, 힘차게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 왕이 죽은 뒤 내전이 결정되었던 그 회의실에서 공회가 다시 열렸다.
그때와 같이 귀족들이 모였지만, 숫자가 많이 줄어있었다.
왕의 장례식 때보다 시간이 짧아져서 못 온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 오지 못한 귀족들은 대부분 내전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귀족들은 대부분 중앙 귀족과 왕국 서부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
1 왕자와 2 왕자 파벌의 귀족들이었다.
거기다, 저번 공회 때에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 동부 귀족들이 이번 회의에는 반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공주의 파벌로 불리는 그레시아 공작 쪽 귀족들. 그리고, 북부의 공국 산하 귀족 일부.
겉으로 보기에는 공주파와 반대파가 반반으로 보였다.
더구나, 두 왕자가 죽고 공주만 남게 되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공회의 주 안건인 공주가 왕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공주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설 때 귀족들의 모습을 보니 쉽게 알 수 있었다.
공주가 들어서자, 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를 맞이하긴 했다.
하지만,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귀족은 많지 않았다.
다들 왕족에 대한 예의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다른 왕자 파벌의 귀족만이 아니었다. 공주 쪽 파벌 귀족들마저 진심으로 예의를 보이는 귀족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어진 안건 발표로 알 수 있었다.
“내전으로 왕국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빨리 공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왕국을 재건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레시아 공작이 처음 안건을 꺼내자, 바로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다.
“왕위에 오르지 않아도 복구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당장 누가 왕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 반대가 터져 나오고, 이어서 앞자리에 앉은 나이가 지긋한 귀족이 입을 열었다.
동부에 그레시아 공작만큼이나 큰 영지를 가진 명망 있는 백작이라고 들었다.
그가 말하자 다들 입을 닫는 것을 보니, 그가 왕자들이 죽은 뒤, 그쪽 세력을 규합한 모양이었다.
“아이샤 공주님이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결국, 공주의 나이와 성별이 문제였다.
공주도 내전 중에 활약을 보여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쪽 귀족 중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공작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지, 그의 말 자체는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방법을 이야기했다.
“섭정을 하면 되잖습니까?”
귀족은 공작의 말에 피식 웃었다.
“왕비님이 하시나요? 아니면 공작께서 직접 하실 생각인가요?”
자신에 대한 말이 나오니, 공작은 잠시 뒤로 물러섰다.
백작은 이때다 싶은지,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왕 중에 초대 왕과 같은 능력을 가지지 않은 왕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능력을 갖춘 섭정이라니…….”
확실히 미리 준비한 것이 느껴졌다.
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다시 비슷한 의견들이 튀어나왔다.
“맞습니다! 누가 그런 섭정을 따른다고, ‘기사의 검’을 쓰지 못하는 자가 기사의 왕국을 다스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런데, ‘기사의 검’도 사라져 버렸는데, 공주님께서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인을 하기가…….”
“그렇네요. 원래 즉위식에서 ‘기사의 검’으로 선언을 하셔야 하니.”
이어서, 자기들끼리 말까지 주고받았다.
그 말들을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것을 보니, 자신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의 검’이 없으면 즉위식도 안되는 거 아닙니까? 기사의 검을 찾게 되면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백작이 나서서 마무리까지.
즉위식에 ‘기사의 검’이 필요하니 찾을 때까지 뒤로 미루는 것이 어떠냐는 말은, 초대 왕의 유지를 잇는 이 왕국의 상황을 비추어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들으면, ‘기사의 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주는 다음 대 왕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모두의 이야기가 한쪽으로만 흐르고 있었다.
간간이 반대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잘 들어 보면, 공주 쪽 파벌마저 공주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는 것 같았다.
그레시아 공작도, 공국의 황태자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합의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반대파들이야 공주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만했다.
하지만, 왜 공주 쪽 귀족들도 반대하는 것을 보고, 겉으로 웃어버릴 뻔했다.
원래 저들은 공주를 바로 왕위에 올릴 셈이었다.
그래서 공주 뒤에 모인 것이고.
모두 공주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뒤에서 조종할 심산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전 동안, 그들은 공주의 실력과 성격, 그리고 뛰어난 두뇌를 보았었다.
결국, 공주가 너무 뛰어나서 문제였다.
저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를 왕으로 세워버리면, 꼭두각시가 아니라 그 뛰어난 두뇌와 실력으로 금방 전권을 차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리스마가 가득한 1 왕자와 잔머리가 뛰어난 2 왕자가 싫어서 공주에게 모인 귀족들이었다.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뒤에서 나라를 이끌어 보고 싶었던 귀족들.
그런 귀족들에게 있어서 공주는 뛰어나도 너무 뛰어난 계승자였다.
그레시아 공작과 공국의 왕세자도 휘하 귀족들의 반발에 손을 들어버린 것 같고.
결국, 이 회의실 안에 공주의 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이들 말대로 바로 왕으로 세워지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성인이 되어도 핑계를 댈 게 분명하고, 다른 왕족들을 데려와서 왕으로 세우겠다고 난리를 피울 게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1 왕자의 자식이나 다른 어린 왕족도 각성할 테고.
그중에 ‘마나 감응력’을 얻게 되는 아이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호위 기사라는 자격으로 공주의 뒤에 서 있던 나는 공주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저 많은 어른이 소녀 한 명을 말로 두들겨 패다니.
솔직히 검을 뽑아 모두 베어버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어제 그레시아 공작이 말한 대로 여기는 검술을 겨루는 곳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 검술, 능력이 아니라 다른 논리가 존재하는 곳.
그 다른 논리로 이겨야 하는 곳이었다.
좀 더 기다려 볼까 했지만, 더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었다.
공주의 호위 기사인 덕에 이 회의장에 검을 들고 들어올 수 있었다.
허리에서 풀어낸 검은 대검이 아니었다.
실내, 왕궁에서 쓰기에는 대검은 너무 크고 넓었다.
그렇다고, 신검도 아니었다. 유물인 신검은 대단한 검이라는 포가 너무 나는 검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검을 가져온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검을 가지고, 공주에게 걸어갔다.
귀족과 함께 온 기사들과 몇몇 귀족들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손에 들린 검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평범한 검집에 손잡이는 천으로 둘둘 감겨 있는 검.
나는 그 검을 공주에게 건네주었다.
“검을 가져왔습니다.”
공주가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을 보고, 나를 돌아보았다.
“더 듣고 있으실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내 말에 공주는 다시 검을 보더니,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회의실에 오기 전에 이 검에 관해 공주에게 말해 놓았었다.
공주는 내 말에 무척이나 놀라 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습관이 생긴듯했다.
편하기는 했지만, 너무 쉽게 받아들이니, 오히려 내가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아졌다.
이상하게 여기는 대신 공주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네, 저는 언제나 알렉스 공을 믿고 있었어요.”
약속했으니, 지킬 따름이었다.
공주가 검을 잡고 일어서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내가 그녀에게 검을 건네줄 때부터, 회의실의 모든 사람이 나와 공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뭐라 해도, 전보다 훨씬 인지도가 올라간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선을 모을 필요가 없어서 무척 편했다.
“지금까지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들 왕국을 위한 말씀 들이시고, 저를 위한 조언들이시겠지요.”
공주는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을 쭉 훑어보았다.
억지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는 귀족도 있었고, 미안한지 슬쩍 눈을 피하는 귀족도 있었다.
공주는 어떤 눈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저도 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보다 즉위식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녀는 들고 있던 검 손잡이의 천을 풀었다.
바닥에 흘러내리는 천.
동시에 사방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맙소사.”
“저게 왜 저기에…….”
“진짜 맞아?”
신음이 회의실을 울리는 사이, 공주가 평범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번쩍.
뽑아 든 검이 환하게 빛을 뿜었다.
공주의 몸에서도 빛이 흘러나왔다.
빛이 홀을 가득 메웠다.
“진짜, 기사의 검이다…….”
신음이 감탄으로 변했다.
“설마, 공주가 숨겨 놓았던 걸까?”
하지만, 감탄 사이에 벌써 흠집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공주는 바로 반박했다.
“내전 중에 찾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기사의 검입니다.”
물론, 내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설명이었다.
저번 공회에서 내가 빼돌려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무척 밝았다.
1 왕자가 뿜어냈던 빛에 뒤지지 않는 빛이었고, 전대 왕이 사용했을 때보다도 밝아 보이는 빛이었다.
‘마나 감응력’이 없다면 빛조차 낼 수 없다는 검.
그런 검이 저렇게 밝게 빛난다는 것은 그녀의 ‘마나 감응력’이 1 왕자에게도 선왕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럼, 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문제가 없겠죠?”
공주는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찌 되었건 공주 파벌의 귀족들이 공주가 왕이 되는 것에 반대하게 된 것은 전부 공작이 막지 않아서였다.
공주가 바로 왕이 되는 게 더 좋게 느껴졌다면 공작이 휘하 귀족들을 막았을 게 분명했다.
공주도 그걸 알았기에 공작에게 제일 먼저 물은 것이었다.
“……네.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공작은 묵묵히 검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처음 반대했던 백작이 고함을 질렀다.
“말도 안 됩니다! 그 검이 진짜 ‘기사의 검’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빛나는 유물 검일 수도 있잖습니까!”
내전을 핑계로 비슷한 검을 가져왔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의외로 먹힐 수도 있는 말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먹이를 발견한 야생 동물 마냥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바뀌었다.
화아아아악.
마음이 편안해지는 빛.
“맙소사. 이건 이야기책에 나오던 초대 왕의 능력.”
“‘기사의 검’의 능력인가?”
모두 놀라 검을 보고 있는 사이, 검을 든 공주는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공주 뒤에는 계속 내가 서 있었다.
단지 지금 나는 공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마나가 흘러나오는 손.
그 마나는 공주를 거쳐서 검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