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제20편 개선 기사
메시지창을 확인한 뒤, 나는 카트린에 이어, 모여 있는 병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해야 했다.
카트린이 조금 이상한 방법으로 병사들을 잡아 놓았기에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협곡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리저리 가공해서 병사들에게 들려주었다.
2 왕자는 원래대로 이야기하고, 내 자리에 1 왕자와 기사들을 슬쩍 올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2 왕자가 깨운 마물왕을 쓰러뜨리고 기사분들과 왕세자님은 전사하셨습니다.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만약 1 왕자가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 목덜미를 잡았을 터였다.
자신을 죽인 자가 그에게 엉뚱한 명예를 안겨 주고 있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은 병력을 무사히 복귀시키고, 수도에 남아 있는 1 왕자파 귀족들을 흡수하려면 죽은 1 왕자를 어느 정도 치켜세워야 했다.
왕실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공주가 왕위를 얻기도 쉬워질 테고.
거기다, 내 과한 성과도 조금은 줄여야 했다.
발레아와 레스티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둘 다 내 생각과는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일은 내 생각대로 잘 풀렸다.
병사들은 봉인된 마물을 풀어놓은 2 왕자에게 분노했고, 마물과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 1 왕자와 기사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다만, 슬퍼하는 중에도 이제 내전이 끝나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하는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내가 1 왕자의 반지를 확인시켜 주고, 카트린이 잘 다독여 준 덕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은 어떻게 된 거야? 1 왕자와 기사들이 그 마물을 쓰러뜨릴 수 있을 리는 없었을 테고, 정말 마물이 두 왕자를 다 죽이고, 네가 마물을 쓰러뜨린 거야?”
열심히 기사들을 다독이던 카트린은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내게 물었다.
그녀도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뭐가 믿기지 않았던 걸까?
내가 마물왕을 쓰러뜨린 것? 아니면 두 왕자가 마물왕에게 죽은 것을 믿지 못한 것일까.
나는 다시 한번 설명했다.
“병사들에게 말한 그대로입니다. 앞으로 어디에서 말하든, 누구에게 말하든 내 말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이 일은 공주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왕위를 두고 싸우는 사이였지만, 어쨌거나 공주와 두 왕자는 아버지가 같은 배다른 남매였다.
그 남매를 내가 죽인 것을 알고도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발레아는 빼야 하나.
발레아는 내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왜 이리 나를 따라다니는 것인지…….
여자는 이해하기 어렵다지만, 발레아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거친 용병들과 지내고, 귀족들도 다루어 본 적이 있어서인지, 카트린은 남은 수천의 병사들을 정말 쉽게 제어했다.
기존의 10인 대, 100인 대를 되살리고, 제일 상위의 병사들을 직접 관리하자, 병사들은 원래 카트린의 병사들인 양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우리는 병사들을 이끌고, 협곡에서 내려와 무너진 성채에 숨겨 둔 마차를 다시 꺼냈다.
가려 놓은 곳들을 치워 버리고, 떼 놓았던 것을 다시 붙여 놓으니, 왕실 마차는 다시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반신반의하던 병사들도 왕실 마차를 보자, 모두 우리, 아니 카트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수천의 병사를 데리고, 왕국 서부를 가로질러 수도로 향하게 되었다.
1 왕자와 2 왕자가 마물왕에게 죽었다는 소문은 우리가 행군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왕국으로 퍼져 나갔다.
레스티와 셀린 교단의 신도들 덕분이었다.
1 왕자와 2 왕자를 지지했던 영지의 영주 중 일부는 직접 행군하는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했다. 다른 영주와 귀족들은 사람들을 보내 확인하려 했고.
나는 그들에게 두 왕자의 물건들을 보여 주고, 부러진 마물왕의 검도 보여 주었다.
일부 영주들은 믿을 수 없다고 소란을 피우기도 하고, 자신이 빌려주었던 병사들을 찾아가겠다고 깽판을 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영주는 수긍하고 돌아갔다.
수긍하고 돌아간 이들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 영주들은 발레아와 내 손에 쓴맛을 보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아직 이 군대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두 왕자는 죽었지만, 내전이 확실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을 돌려받게 된 영주가 괜한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 왕국이 안정화될 때까지는 병사들을 수도에 묶어 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확인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이외에 우리를 막아서는 귀족과 영주는 없었다.
1 왕자와 2 왕자가 싸우면서 왕국 서부를 쑥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는 여기다가 마물왕까지 날뛰었으니…….
얼마나 피해가 심했을지, 예상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배낭 가득 식량을 담아 온 점이었다.
1 왕자는 거의 약탈병에 가깝게 병사들을 운용하고 있었다.
2 왕자 쪽 영지에서는 그냥 약탈해 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영지에서도 약탈에 가깝게 식량을 얻어 가며 싸움을 이어 온 것이었다.
당연히, 부대에 군량이 많지 않았고, 내가 배낭에 쌓아 놓은 식량이 없었다면 우리도 약탈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병사들에게 공짜로 식량을 나누어 줄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해서, 나중에는 영지를 가지게 되었을 때 써먹기 위해 모아 놓았던 식량이었다.
나는 배낭에서 빠져나간 식량을 꼼꼼하게 기록해 두고 있었다. 일이 끝난 뒤에 무조건 받아낼 생각이었다.
부대는 내가 혼자 달려갔을 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행군을 이어 갔다.
우리가 수도에 가까워졌을 때는 이미 겨울이 깊어졌다.
이 왕국은 따뜻하고 온난한 나라라 아직 눈이 내리지는 않고 있었지만, 일반병들은 낮에도 두꺼운 겉옷을 걸쳐 입을 만큼 춥게 느껴졌다.
그런 추운 날씨인데도 수도가 보이지 않을 만한 먼 곳까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 기사단장과 세우타 공작, 그리고 수많은 귀족이 우리를 기다리며 대로 앞에 늘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왕족에 고위 귀족들이 함께 모여 있어서인지, 그들은 길옆에 커다란 천막까지 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부대를 멀찌감치 멈춰 세우고, 카트린, 발레아와 함께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에게 나아갔다.
우리가 다가가니, 귀족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펼쳐져 있었다.
물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주와 기사단장, 세우타 공작과 벤자민 선배 같은 사람들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이 이 자리에 나와 있었던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데려온 군대와 왕자들의 시체, 그리고 마물왕의 사체를 보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우선, 두 왕자님을 모셔야 하니 호위 기사 알렉스는 이 천막 안으로.”
지나가며 얼핏 보았던 지체 높은 귀족 하나가 천막을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살짝 열려 있는 천막 안에는 고급스러운 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왕자들의 시체를 넣어 둘 관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수도 밖까지 저 관들을 가지고 나온 것을 보니, 저들은 저 관들을 앞세워 수도에서 퍼레이드를 벌일 모양이었다.
두 왕자를 희생자로 만들어, 내전으로 갈라진 왕국을 대충 봉합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내가 두 왕자를 마물왕의 희생양으로 만든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각이었다.
조금 아니꼽긴 했지만, 나도 저런 행동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나는 귀족의 말을 따르는 대신에, 공주 앞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미리 어깨에 메고 온 배낭을 열고, 그 안에서 차례로 물건들을 꺼냈다.
어차피, 병사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어서 배낭은 예전에 들킨 상황. 유물 주머니를 숨기려면 배낭을 대놓고 쓰는 편이 좋았다.
내 예상대로 배낭이 유물인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꺼낸 물건들을 보고 몇몇 귀족과 세우타 공작이 신음을 흘렸다.
처음 공주 앞에 꺼내 놓은 것은 두 왕자의 반지였다.
그리고, 뒤이어 꺼낸 것은 반으로 부러진 거대한 검이었다.
몇몇 나이 든 귀족들이 신음을 흘린 것은 그들이 검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수십 년 전 마물왕의 검이라는 것을.
특히 세우타 공작은 직접 싸워 보았으니, 그 검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나는 세 물건을 공주에게 바치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시하신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 반지들은 두 왕자의 신물이고, 이 검은 마물왕의 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공주님의 앞을 막을 존재는 없습니다.”
마나가 담긴 내 말은 작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진 병사들이 모두 들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귀족들은 내 말에 표정이 변했다.
강대한 내 마나에 놀란 귀족들도 있었고, 내 말의 속뜻에 놀란 귀족들도 있었다.
내가 흘린 소문과 이곳에 오면서 올린 보고에는 왕자들과 마물왕이 공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지금 내가 꺼낸 보고는 다른 뜻으로 해석하기 충분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내 보고는 마물왕도 두 왕자도, 우리, 아니 내가 처리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물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니, 다들 의문만 가지겠지만, 그 정도면 경고로 충분했다.
공주는 무릎 꿇고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공주가 많이 컸다는 게 감각으로 느껴졌다.
이제 왕위에 오르고 몇 년이 지나기 전에 어른이 될 테지.
그렇게 된 뒤에 나는 내 영지에서 여왕의 어렸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고 있을 터였다.
“수고했어요.”
“공주님의 영민하신 지시 덕분입니다.”
내 말에 공주가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 아부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살기 위해 무슨 짓을 해 왔는데…….
왕의 딸랑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공주에게 보고를 끝내고, 귀족들이 원하는 대로 천막에 들어가 두 관에 왕자들의 유체를 안치시켰다.
2 왕자의 유체는 남은 부분이 많지 않아 빈 곳이 많았지만, 그건 왕실 쪽 사람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가져온 수레에 마물왕의 사체를 실었다.
수레에 실린 것은 4m의 몸뚱어리와 잘린 팔.
마물왕이긴 했지만, 크지도 않고, 단단한 몸뚱어리도 아니라서, 돈이 되는 마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행사용으로 쓰도록 넘겨주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물론, 마물왕의 두 머리는 넘겨주지 않았다.
이건 내 영지를 얻고 나서 집무실에 걸어 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넘겨줄 것을 모두 넘겨주고, 우리는 다시 수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자들의 관을 맨 앞에 세우고, 그 뒤에 마물왕 사체가 실린 수레를 따르게 하고.
수레 뒤에 공주가 이끄는 군대가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 가까워지자, 멀리 성벽 위로 폭죽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공주가 왕위에 오르고, 내가 영지를 받기까지 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제 내전은 끝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