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제18편 머리를 자르다 (1)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허물어지는 1 왕자.
이해를 시킬 생각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마물이 1 왕자보다 나를 더 신경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마물과 싸우는 도중에 왕자가 도망치지 않도록 치운 것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물에게 다시 말했다.
크르르릉.
내 말을 들은 마물은 다시 으르렁거렸다.
내가 뭔 말 만하면 저 마물은 화부터 내는 것 같았다.
꽤 오래 싸워왔으니 정도 들었을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그런 정은 쌓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죽였던 마물에 정이 들 리가 없었다.
이제 당장 내 앞에 남은 적은 마물 왕 하나였다.
1 왕자도, 2 왕자도 모두 죽었고, 1 왕자의 남은 병력도 절벽 너머에 있을 뿐이었다.
마물만 치우면 이제 걸림돌은 남지 않을 터였다.
마물도 그것을 깨달았을까.
두 머리 마물은 주변의 시체는 거들떠보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마물의 가슴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었다.
피가 멈춘 것을 보니, 그래도 다른 마물 정도의 치유 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상처를 보는 것을 깨닫자, 마물이 내게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손에서 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파지지지직!
마물이 손을 뻗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대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번개가 대검을 강타했지만, 그 번개는 대검에 닿지 않고, 대검 주변에 펼쳐진 투명한 막에 막혀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나 세상에서 싸우는 동안, 실력을 키우는 동시에 마물의 공격을 막는 방법을 여러 가지 구상했었다.
그중에 하나, 마물의 전기 공격을 막는 데는 카트린에게서 얻은 ‘마나 유형화’가 제격이었다.
드드드드드득.
그렇게 내 앞에서 전류가 흩어지는 동안에 주변의 땅이 얼어갔다.
마물은 전류를 내뿜는 동시에 냉기 능력을 퍼트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의 싸움은 나만 성장시킨 게 아니었다.
마물 쪽도 인간과의 싸움, 아니 나와의 싸움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다른 공격을 위한 눈속임과 여러 능력의 연계 공격은 처음 싸울 때는 보지 못했었다.
그만큼 마물도 그동안 성장한 것이었다.
다만, 이런 정도로는 약삭빠른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가운 냉기는 마나를 더 빨리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우우우웅.
목걸이로 보낸 마나가 다시 밖으로 흘러나와 온몸을 타고 돌았다.
목걸이로 증폭된 마나는 거칠어,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식어가는 몸을 데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화아아아아.
너무 과하게 돌렸는지, 피부에 하얗게 덮인 서리 아래로 김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마물은 다른 능력도 모두 풀어헤쳤다.
주변에 엄청난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의 바람이었다.
거기다, 마물의 낡은 검이 화염에 휩싸였다. 저건 본적이 없었던 기술인데…….
분명 저번 삶에서는 저 기술 대신, 바람 능력과 화염 능력을 섞은 화염 회오리를 만들었었다.
하긴 그때는 지하 광장에서 싸웠기에 그런 능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나와 오래 싸우다가 저런 화염검을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역시,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하려나…….
하지만, 화염을 내뿜는 검은 별로 특별한 것 없는 기술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기술을 가졌던 기사와도 싸운 적이 있었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바람도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마나를 이용해서 지면에 몸을 묶는 방법은 어렸을 때 터득했었고, 이미 내 감각은 눈이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주변에 태풍 같은 바람이 부는 중이고, 땅바닥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시체의 갑옷이나 바닥에 나뒹구는 검에는 아직도 전류가 남아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눈앞에는 마물이 불붙은 검을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평범한 협곡이었던 곳이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이건 마치, 지옥에서 마왕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저 마물 왕이 이렇게 한 번에 모든 능력을 쓴 적은 거의 없었다.
마물도 현실로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그렇다면, 저쪽도 이번에 끝장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나는 대검을 들고, 마물 왕에게 달려갔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번개가 작렬하는 가운데 충돌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땅이 터져나가고, 절벽 곳곳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천지지변이나 거대한 괴수들이 싸우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 광경을 보고 공포에 질려 달아났겠지만, 이곳에는 그 광경을 심취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벽 끝에 걸터앉아 있는 발레아와 그 옆에 서 있던 레스티였다.
카트린과 그녀가 데려간 기사와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발레아가 이미 절벽 밖으로 보내 둔 상황이었다.
저런 싸움에 휘말리게 둘 수도 없었고, 저 광경을 보게 놔둘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와 병사들은 물론이고, 카트린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알고 있었지만, 알렉스의 비밀을 알려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 옆에 있는 레스티도 절벽 밖으로 날려버렸으면 좋겠지만, 알렉스가 잘 쓰고 있기에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만큼이나 알렉스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듯하니 우선은 두고 볼 생각이었다.
대전쟁 때의 이야기를 실제로 보는 것 같은 모습에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알렉스는 정말 대단하죠?”
“대단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의 성기사님이십니다.”
뭔가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점은 같았기에 발레아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한마디 정도는 해두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잘해야 할 거예요.”
“잘할 생각입니다.”
“정말 그래야 해요. 새로운 성기사님이 있어야 할 곳이 사라지면 곤란하잖아요.”
누가 사라지게 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레스티도 물론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성기사님을 절대적으로 보필할 생각이니까요. 누군가처럼 잘못된 행동으로 성기사님에게 손해를 끼칠 염려는 전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라는 게 누굴 말하는지는 발레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생각했지만, 이 남자도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말없이 알렉스를 도와주고 있었지만, 이자도 수백 년간 교단의 눈을 피해온 종교를 지키는 신관이자 광신도였다.
무슨 소리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발레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발레아는 레스티의 말에 살포시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레스티는 목 뒤에 소름이 올라왔다.
그동안 같이 다니면서 발레아의 본성을 여러 번 목격했던 레스티였다.
그래서 조금 전 같은 경고도 했었던 것이다.
레스티에게는 절벽 아래에서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마물왕보다, 자신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소녀가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만약, 이 소녀와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면, 처음부터 죽으라고 들이받거나, 대륙 끝까지 도망갔을 터였다.
발레아는 미소를 지은 채로 레스티에게 말했다.
“그럼, 둘 다 잘하면 되겠네요. 알렉스를 실망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레스티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충분합니다.”
그렇게 절벽 아래의 싸움이 절정으로 향하는 동안, 절벽 위의 평범한 신경전도 끝이 났다.
이제, 발레아는 싸움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구경만 하는 레스티와는 달리, 그녀는 알렉스를 도와야 했다.
그게 발레아의 가장 큰 기쁨이었고,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카아아앙!
결국, 마물 왕의 낡은 검이 부러졌다.
키 4m의 마물 왕에게는 크지 않은 검이었지만, 족히 3m에 가까운 검이 부러졌다.
아니, 내가 부러뜨렸다.
저 검 때문에 그동안 마물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었다.
면적도 넓고, 힘도 다르니, 저 검을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얼마 전에는 틈을 봐서 가슴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 마물도 이제는 틈을 내어주지 않게 되어 다시 상처 주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저 검을 부러뜨릴 생각이었고, 그동안 준비를 해왔었다.
마물 왕이 쓰는 것을 보니, 대단한 유물이 분명했지만, 수백 년은 족히 써온 검이었다.
내 대검같이 절대 부러지지 않는 유물이라면 답이 없겠지만, 낡아 있는 검을 보니, 충분히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마나 세상에 있었을 때도 열심히 대검으로 두들겨 주었고, 지금도 이렇게 두들겨서 부러뜨린 것이었다.
마물 왕은 내가 자신의 검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요하게 가슴의 상처를 노리는 모습을 보여 준 덕에, 막아서는 검을 부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거기다, 검에 화염을 두른 게 치명타였다.
열기에 얼굴이고 피부가 잔뜩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만큼 마물 왕의 검도 약해지고 말았다.
아마, 검에 화염을 두르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더 검을 두들겨야 했을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검이 부러졌으니, 마물의 전투력은 반 이상 떨어져 나갔다.
이제 마물 왕의 다른 능력으로는 내 검을 막을 수 없었다.
마물 왕의 머리 하나가 슬픈 눈으로 부러진 검을 바라보았다.
뭔가 애절한 분위기였지만, 그걸 그냥 둘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마물 왕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다만, 마물 왕의 머리는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나를 보고 있던 다른 머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다른 쪽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화르르르르.
마물 왕의 손에 화염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거대해지는 화염.
문을 부순 뒤에 마나가 부족해져서 다시 쓰지 못한 그 화염 능력이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일종의 필살기로 사용되는 화염 능력은 마나가 부족하면 봉인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위험한 순간이 되니, 그런 제약은 다 무시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죽게 되었는데, 마나 고갈이 무슨 상관이랴.
나는 마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아니, 준비시킬 수 있었다.
크아아앙!
화르르르르!
마물의 고함과 함께 거대한 화염이 나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마나가 부족해서인지, 다가오는 화염은 죽기 전 보았던 땅을 뚫고 솟아 나오는 화염보다는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화염도 숲 일각은 충분히 태울 수 있어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서 피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대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그 뒤에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어 방어막도 활성화했다.
이걸로는 턱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내 준비는 여기까지였다.
이제 발레아 차례.
콰과과과과과!
얼어붙은 땅이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난잡하게 불어대던 바람이 소용돌이가 되어 내 주위를 감쌌다.
콰아아아아아앙!
솟아난 땅은 내 앞을 막아섰고, 화염은 솟아난 땅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