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3화
제13편 마나로 이루어진 세계 (2)
가상 현실, 마나로 만들어진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발레아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봉인지와 닮은 이 숲에서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마물 왕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장소였다.
내가 관리자가 되었다면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서 여러 장소를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관리자는 발레아였다.
발레아가 기억하는 싸우기 좋은 장소는 많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 눈앞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나로 만들어져 있던 세상이 허물어져 갔다.
구구구궁.
끝없이 늘어서 있던 나무들이 땅속으로 사라져갔다.
멀리 보이던 산맥들도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니, 전부 마나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마나는 다시 새로운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마나는 수풀이 되고, 길이 되고, 나무 방책이 되었다.
나무가 사라진 땅에 수풀이 자라고, 길이 만들어졌다.
거기다, 벌판 위에 나무로 만들어진 방책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평야 위에 목책으로 둘러친 커다란 마을이 생겨났다.
한쪽에 남아 있던 숲도 밀림이 아니라 왕국의 평범한 숲으로 변했다.
봉인지의 더위도 사라지고, 하늘의 구름도 달라져 버렸다.
그렇게, 봉인지의 숲이 한순간에 왕국의 한 영지 앞 벌판으로 바뀌어 버렸다.
“어? 여기는.”
레스티는 새로 태어난 세상을 알아보았다.
이 세상은 발레아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 중 하나.
이바나 영애가 있는 모레나 영지 앞이었다.
확실히 레스티가 알아볼 만했다.
우리가 서 있는 통로의 끝에서부터 길 하나가 멀리 방책의 문까지 하나의 길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그 길옆에는 반쯤 부서진 집도 한 채 서 있었고.
기억이 났다. 셋이서 이곳에 도착했을 때, 저 집 앞에서 기사와 병사들에게 검문을 당했었다.
아마, 발레아는 그때의 기억을 토대로 이 세상을 만든 모양이었다.
한번 기억이 떠오르니, 그때 상황이 전부 생각이 났다.
우리가 왔을 때, 저 마을 반대편 숲 앞에 다른 영지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을에는 이미 한번 공격을 당해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발레아는 그런 것까지는 만들지 않았다.
연기도 보이지 않았고, 숲 앞에 다른 영지군의 숙영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때 숲에서 마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커다란 형체가 숲 밖으로 튀어나왔다.
너무 멀어서 보통 사람은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튀어나온 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게 마물 왕이야?”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놀란 눈으로 숲 밖으로 나온 마물을 쳐다보았다.
카트린이 마물 왕을 보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정말 생각보다 작네.”
4m나 되는 거인이었지만, 봉인지에는 그보다 훨씬 큰 마물들이 가득했다.
마물 왕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먼 곳에서는 마물 왕의 대단함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카트린의 말에 발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확인해 볼게요.”
뭘, 어떻게 확인해 본다는 거지?
내가 말리기도 전에 발레아가 다시 손을 펼쳤다.
세상이 다시 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발레아의 손이 움직이자, 방책 쪽 마나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황당한 광경이 펼쳐졌다.
쏴아아아아아!
방책 안에서 마물을 향해 큰 화살, 발리스타들이 날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화살이 닿을 수 없는 거리였고, 모레나 영지의 마을에는 저런 거대한 화살들이 없었지만, 발레아는 마나로 발리스타들을 만들어 대형 화살들을 날린 것이었다.
작은 나무 크기의 화살들이 평야를 가로질러 마물의 몸 주위에 내려꽂혔다.
쾅! 콰광! 쾅!
먼지를 가득 일으키며 땅에 박힌 대형 화살들이었지만, 그 화살 중에 마물 왕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었다.
그 큰 화살들이 마물 왕의 피부를 뚫지 못한 것이다.
마나로 만들어진 화살들이었지만, 진짜 세계를 흉내 낸 이 공간에서는 결국 평범한 화살들에 불과했다.
그런 평범한 화살들로는 마물 왕은커녕 평범한 마물들의 피부도 뚫을 수 없었다.
크아아앙!
결국, 그 화살들은 마물 왕을 화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마물 왕은 화살들이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마물은 엄청난 속도로 평야를 가로질렀다.
“말도 안 돼. 저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말이 달리는 것보다, 새가 날아가는 것보다 빠를 것 같았다.
저 속도를 보니, 화염 공격을 쓰게 해서 힘을 빼놓지 않았더라면 죽기 전에도 금방 따라잡혔을 것 같았다.
“저거 상대나 가능하겠어?”
마물이 달려가는 것만 보고도, 카트린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발레아의 말대로 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발레아에게는 아직 확인이 안 끝난 모양이었다.
달려가는 마물을 향해 방책에서 계속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 공격에 마물의 걸음이 조금 늦추어지기도 하고, 짜증을 나게 만들기도 했지만, 달리는 속도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날아오는 대형 화살을 무시하고 방책까지 오게 된 마물은 그대로 방책에 몸을 부딪쳤다.
쾅!
방책이 박살이 나고, 마물은 마을 안으로 뛰어들었다.
쾅! 콰앙! 쾅!
요새 안에서 폭음이 계속 들려왔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이제는 과거 보았던 모습과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마물이 마을을 부수고 있자, 발레아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가셔도 돼요. ‘이바나 영애’가 있는 마을에 묶어두었으니, 얼마 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할 거에요.”
그녀의 말대로 마물 왕은 방책 안에서 마을을 부수고 있었다.
발레아의 말에 조금 꺼림직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런 마음은 훌훌 털어버리고, 통로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게 마나로 만든 세상으로 들어가는 순간, 발레아의 음성이 작게 들려왔다.
“다음에는 대공녀님이 계신 공국을 만들어 볼까? 왕궁을 부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분명 말이 들려오긴 했지만, 나는 그 소리를 머리에 남기지 않고 바로 지워버렸다.
귀족 영애의 혼잣말을 듣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또렷하게 들린 것을 보니, 들으라고 한 말 같았지만, 아무튼 나는 듣지 못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마나로 만들어진 세상에 한 발을 들이니, 조금 전과 완전히 느낌이 달라졌다.
세상에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은 마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땅도, 길도, 수풀도, 나무도, 전부 가짜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나온 통로를 찾아보았다.
예상대로 통로와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을과 이어진 길이 멀리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어디까지 이어질지.
설마, 왕국 수도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안에 들어와 보니, 마물 왕이 진짜로 믿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조금 전까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도, 진짜로 믿게 될 정도였다.
나는 땅의 흙을 만져보고, 풀과 나무도 쓰다듬어보았다.
이게 가짜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용사의 훈련장치고는 너무 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크아아앙!
그때, 다시금 마물의 괴성이 들려왔다.
화가 난 듯한 괴성이었다.
하기야, 끝없는 봉인지를 돌아다니고 있다가, 이제야 다른 장소가 나왔는데, 그게 빈 마을이라니…….
마물이 화가 날 만했다.
더구나, 이제 슬슬 내가 들어온 것을 알아챌 테니, 나도 움직여야 했다.
괜히 여기 있다가 큰 공격에 입구가 드러나게 되면 곤란했다.
공간이 왜곡되어서 외부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듣긴 했지만, 조심할 수 있으면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나는 무장을 확인하고 괴성을 지르는 마물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내 등에는 대검이 메여 있었고, 허리에는 단검과 신검, 그리고 쇠뇌까지 꺼내 어깨에 걸쳤다.
이번에는 모든 능력을 사용해서 마물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카트린과 레스티는 멀어서 보지 못하겠지만, 분명 발레아는 이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동안 지켜봐 왔고, 저번 삶에서도 확인했었다.
발레아는 믿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내 능력과 유물을 말해 주어도 괜찮았다.
물론, 회귀 능력은 말할 수 없겠지만, 내 능력들과 신검, 그리고 기사의 검까지 보여 주어도 문제가 없었다.
그동안 보아온 발레아는 세상의 명예와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이렇게 나를 따르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가 관심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나중에 나와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그녀는 나를 배신하는 대신 나를 직접 죽이려 들 터였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설마, 진짜 죽이려 하지는 않겠지?”
뜬금없는 생각에 쓴 웃음을 짓고, 나는 부서진 방책 안으로 들어갔다.
방책 안은 잠깐 사이에 폐허로 변해 있었다.
마을은 집들도, 영주, 아니 이바나의 저택까지 모두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물이 있었다.
나를 죽인 마물. 머리가 두 개 달린 마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르르릉.
일그러진 마물의 얼굴들과 마물의 괴성은 웬일인지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반가울 만했다.
마나로 만들어진 이 세상은 사람도, 마물도, 동물도, 곤충도 없었다.
단지 땅과 하늘, 그리고 식물만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수십 년간 다른 살아있는 마물이나 동물들을 보지 못했으니, 나를 보고 반가워할 만했다.
하지만, 나는 반갑지를 않았다.
일부러 이렇게 마물 왕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보고 싶어서 온 것일 리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마물 왕을 찾아온 것에 지금까지 여러 이유를 댔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죽인 놈을 그냥 놔두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었다.
“자, 덤벼! 이번에는 네가 죽을 차례다!”
크아아앙!
나는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고, 곧이어 마을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나는 가지고 있는 검들을 모두 사용하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모두 쏟아부었다.
하지만, 죽기 전 광산에서 싸울 때보다 훨씬 마물 왕을 상대하기 힘들었다.
능력들을 막기 위해 준비해 놓은 것들도 없었고, 광산처럼 내게 유리한 환경도 아니었다.
나는 덤벼들 때 소리친 것과 달리, 덤벼드는 시간보다, 막고 도망치는 시간이 더 길어지게 되었다.
크아아아앙!
그래도,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마물 왕도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하기 전이었다.
열린 공간이라 마물 왕의 능력을 피할 곳도 많았다.
덕분에 신검의 치유 능력에 크게 기대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그 실력이 더 기울어진 만큼, 결국 제대로 치유 능력을 쓸 때가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을 벗어나게 되었다.
시야가 바뀌고, 내 몸이 마치 제 조합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통로 앞에 서 있게 되었다.
통로에 선 채로 순식간에 상처가 낫는 내 모습에 카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지만,
발레아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마나로 만들어진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폐허가 된 마을이 땅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반쯤 무너진 성벽이 쭉쭉 올라갔다.
그 안에 집과 상점들이 가득 들어찼고, 이어서 높은 왕궁이 쭉쭉 솟아났다.
“아…….”
이번에는 모두가 알아보았다.
발레아가 만든 것은 공국의 수도였다.
“이번에도 위험하면 다음에는 왕국 수도 차례에요. 그 뒤에는 아카데미를 만들까나…….”
아무래도 발레아는 내가 다친 것에 화가 난 것 같았다.
뼈가 가득 담긴 목소리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발레아가 이상한 세상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번부터는 정말 열심히 싸워야 할 것 같았다.
회복을 끝낸 나는 다시 마나로 만든 세상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