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제12편 마나로 이루어진 세계 (1)
구슬 에고가 ‘통제실’이라고 말한 이 유적의 지하 광장도 크지 않았다.
거기다, 텅 비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구슬을 발견했던 유적에는 다른 방에 쓸만한 유물들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그런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런 것이 있었으면, 예전에 들어왔을 때 전부 가져갔을 터였다.
그렇다면, 광장 중앙에 있는 받침대에 놓여 있는 저 물건은 가져갈 수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우리 네 사람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와 지하 광장에 들어섰다.
눈을 반짝이며 광장을 살피던 카트린은 곧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쩝, 다 쓸어갔네. 텅 비어 있어.”
역시,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마, 여기 있던 유물들은 왕실 창고에 있거나, 다른 귀족들이 가져갔겠지.
그녀는 곧이어 광장 중앙으로 걸어가 받침대 위에 놓인 물건을 살폈다.
역시, 유적을 탐사했던 용병답게 그녀는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않고 눈으로만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이거 반지 같은데.”
그녀의 말에 나도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그녀 말대로 받침대 위에 있는 것은 반지였다.
아름다운 빛이 흐르는 작은 보석이 달린 반지. 하지만, 그 반지에는 엄청난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가짜 세상에 흐르는 마나와 같은 형태의 마나.
반지에 흐르는 마나는 이 광장, 유적과 연결된 게 분명했다.
나는 마나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뒤에 카트린을 물러나게 했다.
반지에 저렇게 마나가 흐르니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자칫 손을 댔다가 마나가 끊어져서 마물 왕이 풀려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두고 볼 수도 없는 일.
다행히 물어볼 곳이 있었다.
나는 구슬을 다시 손에 쥐었다.
[유적 통제용 장비입니다. 관리자가 떠날 때 자율 설정으로 놓아둔 것 같습니다.]
떠났던 관리자는 돌아오지 못했고, 이 반지는 수백 년간 홀로 유적을 움직이고 있었던 걸까?
나는 구슬 에고에게 반지를 만져봐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유적에서 가지고 나가지만 않으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설의 관리자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에고인 저와는 달리, 잘 훈련된 관리자만이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뭔가 슬쩍 자기 자랑이 섞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려나.
어쨌거나 만져보는 것은 상관없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손에 쥐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작은 반지였다. 반지에 박혀 있는 작은 보석에 마나가 흘러 다니는 것을 보니, 저 보석이 핵심 같았다.
“제가 한번 껴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말을 한 뒤에, 반지를 손가락에 끼어보았다.
반지는 새끼손가락에 겨우 들어갔다.
그리고,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다.
우우우우웅.
아쉽게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구슬 에고의 말처럼 에고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머릿속에 사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나와 맞지 않는 유물인듯했다.
나는 반지를 빼서, 발레아에게 권했다.
“그건 반지잖아요? 그걸 제게 주시려고요?”
발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그녀의 장난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에게는 반응을 안 합니다. 다른 분들이 확인을 해봐 주셨으면 합니다.”
나를 제외하고 이 유물을 움직일 가능성이 제일 큰 사람은 발레아였다.
내 말에 발레아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쳇!”
투덜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발레아는 내게 반지를 건네받고, 손가락에 끼웠다.
왼손 검지에 반지를 끼우자, 발레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괜찮아…….”
“물러서요!”
카트린이 놀라 발레아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오히려 사람들을 물러서게 했다.
반지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와 발레아를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발레아의 마나가 반지로 흘러들었다.
발레아의 마나는 반지를 빠져나와 반지의 마나와 함께 이 광장을, 더 나가서 이 유적을 훑고 지나갔다.
우우우우웅.
광장과 유적까지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카트린과 레스티도 검을 꺼내 들고, 주위를 살폈다.
나는 주위를 살피는 대신, 발레아를 지켜보았다.
유적이 울리는 동안에도, 발레아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리고, 점점 발레아의 마나와 유적 마나의 느낌이 비슷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더는 유적의 마나와 발레아의 마나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유적을 울리던 소리가 멈추고, 발레아가 눈을 떴다.
반짝!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에서 잠시 광채가 흐른 것 같았다.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카트린과 레스티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을 뜬 발레아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시간이 오래돼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유적은 제가 다룰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물 왕을 가둔 저 공간도 제어가 가능할 것 같아요.”
세우타 공작에게 이 유적에 대해 듣고, 여기 와서 확인한 대로, 이 유적은 발레아의 능력과 상성이 맞았다.
내가 직접 관리자가 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렇게 되면, 2 왕자가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알렉스 공자님이 원하던 거죠?”
발레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아의 말을 들은 카트린이 끼어들었다.
“그 공간을 제어한다는 게 아까 본 숲도 바꿀 수 있다는 거야? 나무도 움직이고 지형도 바꾸고?”
“그 이상도 가능해요. 마나가 많이 들고,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사막으로 만들 수도, 평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와. 그럼, 바다로 만들어서 마물 왕을 빠뜨려 죽일 수도 있지 않아?”
“어?”
“어라?”
카트린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우리는 모두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발레아가 눈을 감고 뭔가 계산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
“그럼, 이대로 끝나는 겁니까?”
발레아의 말에 카트린과 레스티는 기뻐했지만, 죽기 전에 마물 왕을 보았던 나는 바로 기뻐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발레아에게 물었다.
“그 가상 세계가 파괴되지 않는 세계는 아닌 거죠?”
내 물음에 발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현실 같은 세계이긴 하지만, 마나로 현실을 구축해놓은 세계더라고요. 일정 이상의 힘을 가하면, 세계를 구성하는 마나가 무너질 거예요.”
발레아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게 벼락같은 운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럼, 환경을 바꿔서 마물 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마물 왕이 죽을 위험에 빠지면 앞뒤 안 가리고 세계 자체를 파괴하려 할 테니까요.”
죽기 전에 보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수십, 수백 미터 지하에서 화염이 솟구치는 광경.
마물 왕이 그런 공격을 한다면, 그 세계를 구성하는 마나가 버틸 수가 없을 터였다.
내 말에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지를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이 없는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산사태 같은 건 어떨까?”
“사막이 된다고 했으니, 사막 폭풍 같은 것을 뿌리는 것도…….”
두 사람이 의견을 내는 동안에도 발레아는 나를 보고 있었다.
발레아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려던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발레아에게 물었다.
“실시간으로 그 세계를 감시할 수 있는 거죠?”
내 말에 발레아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치 눈앞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보는 모습이었다.
“네, 지금도 마물을 보고 있어요. 크기는 작은데 머리가 둘이네요.”
확실히 발레아는 마물을 보고 있었다. 이제 감시가 가능하다면 한 가지만 더 확인하면 되었다.
“원할 때, 안에 있는 사람을 빼낼 수도 있고요.”
이 유적의 관리자라면 마나로 만든 세계 안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유적이 용사들을 훈련하는 장소였다면 마나를 만든 세계를 관리자만 통과했을 리가 없었다.
“네. 가능해요.”
발레아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내 예상대로였다.
뜻밖의 운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예상과 틀어지는 불운도 없었다.
내가 만족해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발레아가 나에게 물었다.
“역시, 들어가실 거죠?”
“들어가다니, 무슨 소리야?”
발레아의 물음에 카트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 안으로 들어가신다는 소리 같습니다만…….”
카트린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레스티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에? 마물 왕이 있는 곳에 들어간다는 말이야? 왜?”
레스티의 말에 카트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지만,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마물왕 이 갇혀 있는 곳에 제 발로 들어가다니, 이건 내가 생각해도 영 이상한 이야기였다.
오히려 반쯤 포기한 듯한 발레아와 레스티가 이상하게 보일 정도.
하지만, 나는 죽기 전에 마물 왕을 상대해봤었다.
그때, 마물 왕을 상대하는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실력이 향상됐는지…….
몇 년을 수련한 것보다 더 효과가 좋았다.
거기다, 마물 왕과 싸워보니, 아예 이기지 못할 마물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은 애매한 느낌뿐이었지만, 뭔가 계기가 생긴다면 이길 수 있는 길이 보일 것 같았다.
물론, 다른 사람이라면 미친 짓이 분명했지만, 내게는 반복해서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솔직히 예상대로 안 되었으면, 죽음을 반복하면서 상대해볼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이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상대해봐야죠. 어찌 되었건 저 마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날 텐데, 그 전에 잡을 방법을 알아내야 해요. 그렇죠?”
내 말에 발레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공자님의 말씀대로예요. 이대로 놔두어도 유적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에요.”
그동안, 보아온 유적과 유물들은 모두 한계에 가까웠다.
이 유적도 마찬가지였다.
흘러 다니는 마나를 봐도 한계에 가까웠다.
멀쩡하게 가동되어서 마물 왕을 가두었다는 게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위험하면 발레아 영애가 잘 빼내 줄 테니 걱정 없습니다.”
내 말에 발레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발레아의 저런 표정이라면 어떻게 하든 빼내 줄 게 분명했다.
내 말에 카트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력 차이가 크게 나버리니, 도와주겠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자신 있는 거지?”
나는 씩 웃었다.
“네. 도망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정 뭐하면 죽음으로 도망치겠지만, 도망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마물 왕이 있는 마나로 만들어진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조금 전에 발길을 돌렸던 통로의 끝, 마나의 세계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준비를 끝내자, 발레아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눈을 감았다.
우우우우웅.
그녀가 마나를 움직이자, 숲으로 가득 찬 세계가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