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제5편 결투, 마물 왕 (1)
광산 가장 아래에 있는 지하 광장.
원래 계획은 이곳에 1 왕자를 던져두고 마물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물 왕이 1 왕자 이상으로 나를 인식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계획을 바꾸었다.
1 왕자 대신 내가 이곳에 남는 것으로.
원래 왕자와 함께 남을 생각도 했었던 만큼 왕자를 먼저 죽인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이곳에 남아 마물 왕을 상대하려고 한 것은 마물 왕을 유인하기 위한 희생정신 같은 게 아니었다.
내게 있어 희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의미가 달랐다.
삶의 끝이 아니라, 꽤 심한 고통과 똑같은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결과만 남게 되는 일일 뿐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희생에 의한 결과마저 사라져버리니, 남을 위해 희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은 모두 나를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내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발레아의 말대로 그들과 함께 몸을 피하는 것이었다.
내가 발레아와 같이 움직인다면 발레아가 작업할 시간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긴 하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마물과 드잡이를 하는 것보다야 살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도 내가 이곳에 남은 것은 내가 이 계획을 그리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유적에도 갇혔었던 마물 왕이었으니, 광산 깊은 곳에 묻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계획.
내가 세운 계획이었고, 겉보기에는 그럴듯해서 다들 수긍하고 넘어갔었지만, 알고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계획이었다.
마물을 가두었던 유적은 다른 유적들처럼 고대 제국이 남긴 유적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과 생명체들이 길을 잃게 만드는, 아직도 가동되고 있는 미로 유적이었다.
그런 유적에 마물 왕을 가두고, 유적 자체를 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에 부친 것이었다.
마물이 그 유적을 빠져나가지 못한 것은 유적이 튼튼해서도, 너무 깊어서도 아니었다.
유적 자체의 능력, 미로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지 유적처럼 땅 깊은 곳에 있다고, 평범한 광산에 마물의 왕을 묻어 버린다라…….
성공할 수 있다고 계속 되뇌고 있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세우타 공작도 내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그럼에도 반대하지 않은 것은,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도가 코 앞이었다. 이건 실패하더라도 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적은 확률이라도 성공할 것으로 믿고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까지 이 마물의 힘을 직접 경험해봐야 했다.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최대한 정보를 얻어놓아야 했다.
그것은 성공한 삶이나 실패한 삶에서도 언제나 지켜온 원칙이었다.
“뭐, 그래도 성공한다면 더 좋겠지.”
대전쟁 이후 마물 왕을 죽인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중에 한번이 우리 왕국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마물 왕을 쓰러뜨린 적이 있었다.
물론, 마물 왕을 잡는 데 성공한 것은 제국뿐이었고, 그것도 기사단 여럿과 군단 하나를 날렸지만, 결국 잡긴 잡았었다.
대전쟁 때에는 일대일로도 마물 왕을 쓰러뜨린 용사도 있었다고 들었었다.
물론, 내가 그 용사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한번 해 볼 만은 했다.
“마물 때문에 왕국을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안 그래?”
그르르르릉.
지하 광장에 나타난 머리 두 개의 마물은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마물은 대신 지하 광장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은 마치, 함정에 대비하는 사람 같았다.
마물은 환하게 밝힌 기름 먹인 모닥불들과 사방에 박혀 있는 꼬챙이를 보고 콧김을 뿜어댔다.
내가 무얼 준비한 것인지 아는 눈치였다.
그래도, 마물은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 정도 함정은 함정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죽이겠다는 생각이 더 커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마물은 검을 들고,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알렉스가 다시 마물과 전투를 시작했을 때, 발레아와 두 남자는 발레아가 만들 수 있는 영역 한계까지 이동한 뒤였다.
“헉, 헉. 이제 좀 쉬는 건가요?”
일행이 멈춰서자, 용병 밀톤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그에게는 지금이 마나를 가지게 된 이후로 제일 숨이 벅찬 때였다.
밀톤은 마나를 가지게 된 뒤 어느 정도 실력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같이 움직이던 두 귀족을 보고 전부 날아가 버렸다.
거인처럼 큰 왕실 기사단장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같이 움직인 소녀를 보니, 자신감 같은 것은 전부 사라져버렸다.
물론, 육체 능력자가 아니라,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했지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이동을 보여줄 줄 생각도 못 했다.
거기다, 그녀는 멈추어 서자마자 바로 벽에 손을 올리고, 능력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거인 기사단장이 바로 그녀를 호위하는 것을 보니,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주저앉아, 발레아를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놀란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 벌써 싸움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들이 달려온 동굴 깊은 곳에서 큰 충돌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앙!
밀톤은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분명, 알렉스라는 소년 기사와 마물의 왕이 싸우는 소리였다.
아무리 지하 터널이라지만, 여기까지 이렇게 큰 소리가 들려올 줄은 몰랐었다.
이 정도 소리라면 작은 터널이 무너질 때 나는 소리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밀톤은 혼자 싸우고 있을 알렉스를 떠올라자,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단장에게 달려가 물어보았다.
“저, 지금이라도 가서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우리 세 사람, 아니 두 사람만이라도 도와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평소의 그라면 절대 왕실기사단장에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알렉스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과 마물 왕과 싸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져 앞뒤 가리지 않고 꺼낸 말이었다.
다른 귀족이라면 주제를 모른다고 버럭 화를 냈겠지만, 다행히 단장은 그러지 않았다.
단지 그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럴 수 없다. 한번 결정한 일을 특별한 일없이 중간에서 바꾸는 것은 더 나쁜 결과만 나올 뿐이다.”
그 대답은 무척이나 원론적인 대답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일은 발레아 영애를 지키는 것이지.”
단장의 말처럼 그는 지금 검을 들고 발레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말을 하는 동안, 단장은 핏물이 멈춘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원거리에서 날린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 껍질이 벗겨진 손바닥을.
단장은 마물 왕의 공격을 받아보고, 밀톤은 물론, 자신도 마물 왕의 싸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공격을 막아내는 알렉스가 정말 대단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는 지금 이런 호위밖에 못 하는 자신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하지만…….”
밀톤이 다시 뭐라 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발레아의 고함에 쑥 들어가 버렸다.
“조용히 해봐요!”
통로를 울리는 고함이었다.
밀톤은 눈을 끔벅였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영애의 고함이라니.
귀족 영애가 소리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던 밀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단장도 놀라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레아가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와 발레아는 모르고 있었지만, 알렉스를 쫓아다니는 아름다운 영애에 관한 이야기는 공주 진영의 사람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얼굴과 훌륭한 친화력, 거기다 뛰어난 실력까지.
공주 진영에서도 그녀를 사모하고 추파를 보내는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추파와 권유를 거절하고 알렉스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 이유가 다른 것일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제 그녀는 결혼할 나이. 내전이 아니었으면 두 가문 사이에 이야기가 나오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알렉스가 위험에 빠져 있는데 발레아가 예민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발레아가 화를 낸 것은 알렉스가 위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영역으로 살펴본 마물 왕과 알렉스의 싸움은 그녀의 예상대로, 아니 그녀의 예상보다 더 치열했다.
알렉스는 마물 왕을 상대로 정말 잘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화를 낸 것은 알렉스 때문이 아니라, 정말, 집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발레아는 알렉스가 신호를 보내기 전에 영역을 만들어두어야 했다.
알레스가 부탁한 것이었고, 그녀가 약속한 일이었다.
그런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지금 알렉스의 신뢰를 잃게 되는 것은 그녀에게는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발레아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알렉스의 신호가 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알렉스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발레아는 세심하게 영역을 계속 만들어나갔다.
* * *
내가 준비한 것들은 싸움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마물 왕의 능력들을 막아주고, 싸움을 주춤하게 해 주었다.
덕분에 마물 왕과는 대등한 싸움을 꽤 오래 이어갈 수 있었다.
발레아가 영역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검술도 마물 왕과의 싸움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인간과 다른 육체와 검술 덕에 싸우기가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물의 육체와 검술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물 왕도 마찬가지였다.
“퉤!”
나는 입안에 가득한 피를 내뱉었다.
피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얼어붙었다가 바닥에 닿자 다시 끓어올랐다.
지하 광장은 지금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은 얼어붙어 있었고, 공기에는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뜨겁고 차가운 공기 덕에 지하 광장은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휘돌고 있었다.
뜨거운 바람 사이에는 바람 칼날들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바닥에는 전기를 가득 머금은 꼬챙이들이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접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전류를 머금고 있는 꼬챙이들이었다.
마물 왕은 꼬챙이들과 바닥 전체를 하나의 전력망으로 구성해버린 것이었다.
바닥이 얼어붙은 덕에 내가 전류에 감전되지는 않았지만, 움직이기에는 무척이나 불편해져 버렸다.
꼬챙이만이 아니었다.
기름을 잔뜩 먹여 놓은 장작들도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마물은 열기를 뿜고 있는 장작들을 바람을 이용해서 공중에 띄워버린 것이었다.
이것 모두 마물이 나와 싸우는 도중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처음에 유리한 국면은 마물 왕이 하나씩 상황을 바꾸어나가자 무척이나 불리하게 변해갔다.
싸우는 도중에 이렇게 상황을 변화시키다니, 저 정도면 저 마물 왕은 사람보다 훨씬 머리가 좋았다.
적어도 가짜 천재인 나보다 머리가 좋을 게 분명했다.
“역시, 마물 왕을 일대일로 이기는 것은 무리였어.”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작게 투덜거렸다.
20살짜리 용사도 이기지 못했는데, 마물 왕을 이기려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이렇게 마물이 머리가 좋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의 능력이라서인지 마물 왕은 이런 무시무시한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나도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발이 얼어붙고, 계속해서 화상을 입고 있었지만, 손에 들고 있는 신검이 계속 치료해준 덕에 겉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뿐이었다.
다쳤을 때의 통증도, 회복할 때까지의 통증도 그대로였다.
계속 실시간으로 다치고 있었으니, 통증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통증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땅을 구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치료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저번 죽을 때처럼 신검의 치료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회오리바람 사이로 언뜻 벽에 새겨지는 글자가 보였다.
[준비가 끝났어요.]
발레아의 메시지였다.
좋아. 이길 수는 없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통증을 이겨내고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여유 있어 보이는 마물 왕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