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제3편 광산을 내려가다 (2)
발레아와 엔리케 단장은 열심히 탄광 터널을 달리고 있었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수십 미터씩 쭉쭉 나아가는 단장과 땅이 알아서 옮겨주는 발레아의 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터널을 통해 멀리, 안쪽에서 괴물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터널의 바람 소리가 아닌지는 단장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달리던 이들은 교차로가 나온 곳에서 잠시 멈춰 섰다.
안내자도 없고, 터널이 초행인 엔리케 단장은 이제 방향 자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발레아는 달랐다.
그녀는 벽에 손을 올리고, 최대한 넓게 영역을 펼쳤다.
자신의 소유하는 영역이 아닌, 정보만 얻기 위해 펼친 영역.
넓게 펼쳐진 영역의 모습이 발레아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도 속에 나타난 수많은 탄광 터널과 사람의 흔적들. 그중에 알렉스와 마물이 지나간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마물 왕이 지나간 시간이 길지 않아, 지도에는 또렷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어붙은 걸까?’
예상보다 특이한 흔적이었지만,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으니, 지금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좋아! 놓치지 않을 것 같아!’
마물을 상대할 작전을 세울 때, 발레아는 알렉스와 다르게 마물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었다.
그녀가 마물의 뒤를 따라오기로 한 것은, 뒤를 따르며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계획에서 제일 걱정이 되었던 점은 발레아가 과연 제대로 따라올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발레아가 영역을 만들어 그 안의 상황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런 영역이 무한대로 넓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땅속에서는 해 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고.
하지만, 발레아는 할 수 있다고 자신했고, 그렇게 계획이 결정되어 지금 그녀는 마물 왕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발레아의 예상대로였다.
오래전 흔적이라면 모를까, 바로 전에 남긴 흔적은 충분히 따를 수 있었다.
거기다, 이렇게 특이한 흔적이라면 놓칠 수가 없었다.
안심한 그녀는 흔적을 따라가는 대신 반대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많이 흔들릴 거예요. 좀 물러서든가 벽을 잡으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태풍 속 배 위에서도 아무것도 잡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으니…….”
단장의 말에 발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의상 한 말이었다. 저렇게 자신 있어 한다면 더 권유할 이유가 없었다.
발레아는 자신이 지나온 터널을 향해 손을 펼쳤다.
저번 탐사에서 돌아오면서, 그리고, 지금 이곳까지 오면서도 영역을 펼쳐두었지만, 아직, 영역은 단단하게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사물을 움직여 놓으려면 상당한 집중력과 힘이 들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알렉스가 직접 부탁한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제대로 해 놓아야 했다.
“흐읍.”
그녀답지 않게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펼친 손을 움켜쥐었다.
두꺼운 빨래를 쥐어짜듯, 그렇게 손을 그러모으니,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릉.
“엇!”
단장은 갑자기 흔들리는 바닥에 놀라 몸을 휘청였지만, 그가 자신하던 대로 곧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바닥의 흔들림은 더 심해져 갔다.
쿠쿠쿠쿵.
결국, 흔들리던 터널은 갈라지고, 벽과 바닥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이 난 바닥이 위로 솟구치고, 깨져나간 천장이 점점 내려왔다.
벽이 튀어나와 공간을 메우고, 그들이 지나온 통로가 점점 좁아져 갔다.
발레아는 진땀을 흘리며 계속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능력은 환상과 현실을 섞어서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환상을 배제하고, 현실 자체를 바꾸는 것은 발레아에게는 몇 배나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아무런 투정도 부리지 않고, 묵묵히 터널을 막아갔다.
내부를 미로로 만들 수 있는 유적과 달리, 이런 광산에 마물 왕을 가두어 두려면, 터널 자체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이 후작령에서 광산 터널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발레아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부터 메워지던 터널은 결국, 발레아 앞까지 모두 메워졌다.
발레아는 손을 들어 땀범벅이 된 얼굴을 닦고는 단장을 쳐다보았다.
단장은 벽에 몸이 반쯤 박힌 채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끝난 겁니까?”
그는 반쯤 묻힌 채로 발레아에게 물었다. 그의 말투가 조금 전보다 훨씬 공손해진 것 같았다.
“네.”
발레아의 대답에 단장은 벽에서 몸을 빼냈다.
후두두둑.
돌과 바위 사이에 몸이 박혔었지만, 강력한 육체 능력자답게 쉽게 몸을 빼어냈다.
“말씀하신 대로 뒤로 물러 서 있을 걸 그랬군요.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터널을 메우는 여파만으로 자신을 벽에 반쯤 묻어버리다니.
터널을 무너뜨리는 정도로 생각했던 단장은 터널을 지워버린 발레아의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단장이 반쯤 묻히게 된 것은 여파가 아닌 발레아의 장난질이었지만, 발레아는 미안한 얼굴로 단장에게 사과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닙니다. 그럼 다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네. 왼쪽 길로 가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단장은 발레아의 말이 떨어지자, 먼저 왼쪽 동굴로 달려갔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발레아 옆에 있으니, 뭔가 위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표정 없이 먼저 달려가는 단장을 지켜보던 발레아는 자신도 그를 따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벽에 새겨진 표식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칼로 새겨진 화살 모양의 표식.
자신이 향한 곳을 알리기 위해, 알렉스가 남긴 표식이었다.
마물 덕에 표식이 없어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게 되었지만, 발레아는 표식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녀는 표식에 다가가 손으로 표식 주변을 쓰다듬었다.
스르르륵.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파여가는 동굴 벽.
어느덧 화살 표시 주변에 새로운 표식이 그려졌다.
발레아는 자신이 덧그린 표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만족한 얼굴로 단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땅을 접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발레아.
그녀가 떠난 뒤, 터널의 막다른 곳이 되어버린 곳에는 표식만 남게 되었다.
전과 달리진 표식.
그 표식은 하트 모양 중앙에 화살이 박혀 있는 표식이었다.
* * *
콰앙!
발레아와 단장이 열심히 달려오는 동안, 나는 얼음이 뒤덮인 벽에 열심히 처박히고 있었다.
“젠장, 이건 꽤 아픈데.”
수많은 죽음으로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의 고통은 처음이라, 익숙하기는커녕,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어붙는 추위에, 강력한 충격까지.
동굴 안에 들어오게 되어, 큰 한방인 화염 공격은 봉인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마물 왕이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공기 중의 습기까지 얼게 할 냉기 공격에 내 실력 이상의 검술 실력까지.
아직, 마물 왕은 능력을 다 보여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렇게 열심히 처맞고 있었다.
물론, 마물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처맞고 있기는 하지만, 치명타는 모두 피하고 있었고, 지독한 추위는 몸속의 마나를 돌려 버텨내고 있었다.
물론, 피부의 동상과 자잘한 상처는 입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대검이 아니라, ‘신검’이었다.
큰 상처는 전보다 회복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자잘한 상처 정도는 지금도 바로 낫고 있었다.
내가 마물 왕의 공격을 버텨내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마물 왕의 정보를 상당수 얻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삶을 반복하면서 매번 일을 성공시켰던 것은, 그전의 실패한 삶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게 되더라도, 죽게 된 원인은 어떻게든 확인하려 했고,
무슨 정보든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놓으려 했다.
이번에는 아직 죽지 않아, 과거의 실패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비슷한 정보는 상당히 많이 모을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마물 왕을 봉인시켰던 세우타 공작 덕분이었다.
그에게 들은 마물 왕의 능력들은, 마물 왕을 상대하기 위한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쉴 틈도 없는 건가.”
그 자리에 서서, 내게 손을 펼치는 마물 왕을 보고, 급하게 가슴에서 검을 꺼냈다.
새로 꺼낸 검은 후작령 대장간에서 구한 평범한 검이었다.
나는 그 검을 내가 처박혔던 벽 깊숙이 박아놓고, 다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마물 왕의 손에서 번개가 터져 나왔다.
빠지지지직.
번개는 몸을 날리는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내가 벽에 박아넣은 검에 먼저 빨려들고 말았다.
마물 왕이 쏘아 보낸 번개는 전류와 다를 바 없었다.
세우타 공작은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을 구워버린 그 번개에 이를 갈았지만, 나는 전생의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류는 전도체를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통짜 철로 만든 검을 얇은 얼음을 뚫고 통로 안으로 깊게 박아넣었으니, 전류가 그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박아넣은 검은 피뢰침이었다.
그런 피뢰침이 벽과 바닥 여러 곳에 박혀 있었다.
내가 마물 왕에게 처박힐 때마다 박아넣은 것이었다.
임시로 만든 피뢰침들은 내 예상대로 효과가 있었다.
마물 왕의 능력 하나가 봉인된 것이었다.
큰 한방인 화염 공격도 동굴이라 막혔고, 얼음 공격은 마나를 돌려서 버텨내고 있었고, 번개 공격은 피뢰침으로 막아냈다.
이제, 바람 능력 하나만 남아 있었지만, 이런 동굴 안에서 그런 바람을 쉽게 만들어낼 리가 없었다.
결국, 마물 왕의 능력 대부분을 봉인한 것이었다.
쾅!
“크윽. 전부 봉인했는데도 버티는 게 고작이냐.”
카를로스 용사의 능력을 전부 얻었다고 자신했건만, 마물과의 칼싸움에서 밀리는 중이었다.
더구나 이 마물은 검을 주력으로 쓰는 마물도 아니었는데…….
물론, 내 검술이 마물에게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검술 자체는 마물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마물이 너무 크고 마나가 너무 많았다.
4m나 되는 강력한 육체와 공기마저 떨게 만드는 강력한 마나양 때문에 나는 제대로 검술을 쓰지도 못하고 매번 튕겨 나가버렸다.
검술 실력이 지금 같지 않았다면, 튕겨 나가는 게 아니라, 반으로 잘려 나갔을 게 분명했다.
종족 자체의 차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짜증이 확 일어났다.
더구나, 저 마물 왕은 머리가 너무 좋았다.
싸우는 도중, 바람을 움직이려 하기도 하고, 번개의 방향도 바꾸려는 것을 보니, 뭔가 다른 방법을 찾을지도 몰랐다.
그 전에, 발레아와 단장이 와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피하고 있자니, 익숙한 마나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발레아와 단장의 마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