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제24편 왕실 기사단 vs 왕실 기사단 (2)
성벽 위에 늘어선 기사단장과 왕실 기사단.
왕자도 단장의 말을 듣고 성벽 위를 살펴보았지만, 그가 말한 변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변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뭐, 상대하기 힘들다면 내가 한 팔 거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검을 흔들며 왕세자가 자신 있게 말했지만, 부단장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왕세자가 잘 싸운다는 것은 그동안의 전투로 잘 알고 있었다.
왕실 선임 기사 이상, 왕실 기사단이 아니라면 단장도 했을 만한 실력이었다.
더구나, 왕자라는 위치와 그 담력은 그의 실력을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 뛰어난 활약은 일반 병사들 사이에 뛰어들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양들 안에 사자가 뛰어든 것 같은 왕세자의 모습은 기사들과 싸울 때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늑대무리와 싸울 때면 사자도 제 실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사자보다 더 강한 괴물이라면.
솔직히 그는 기사들을 붙여 왕세자를 이 성에서 탈출시키고 싶었다.
지금도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는 신호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왕세자를 탈출시킬 수 없었다.
왕세자의 명령만 들어온 그는 이제 자신의 직감을 신뢰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전에도 이런 상황에 항상 왕세자가 활로를 찾았었다.
결국, 그는 이번에도 왕세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왕세자의 지시대로 싸울 준비를 했다.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진영을 반전시켜 성벽을 보게 했다.
그렇게 1 왕자 쪽이 진영을 갖추는 동안, 단장과 기사들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른 기사들은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고, 단장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쿵.
턱. 턱. 터턱.
차례로 내려서는 단장과 기사들.
그들은 벽을 뒤에 두고 길 위에 늘어섰다.
결국, 왕실 기사단이 반으로 나뉘어 서로를 마주 보게 되었다.
기사들은 착잡한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같이 말을 달리고, 검을 나누던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적으로 만나게 되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험로를 이어온 1 왕자 쪽 기사들은 처음부터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단장 쪽 기사들도 상대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만, 지금 상황은 1 왕자 쪽이 많이 불리했다.
길 양옆은 상점과 대장간들이 가로막고 있었고, 뒤쪽은 땅에서 튀어나온 창의 숲.
정면은 단장과 과거의 동료들이 성벽을 등지고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왕자와 그의 기사단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단장이 낡은 갑옷들을 입고 있는 과거 부하들을 보더니, 부단장에게 항복 권유를 해보았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 항복하는 게 어떻겠나.”
단장의 말에 부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항복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에게 그런 권한도 없었다.
이건 1 왕자가 결정할 일이었다.
왕자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게 무슨 소리냐. 네 놈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꽤 놀랐지만, 그래봤자, 그 마물 놈이 올 때까지일 뿐이야.”
1 왕자가 이렇게 상황이 안 좋게 된 것은 오직 그 마물왕 때문이었다.
줄기차게 자신을 쫓아다니고, 가로막는 군대를 부숴버리고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물왕의 봉인을 풀어버린, 2 왕자의 수가 통했다고 할까.
그래도,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1 왕자의 군대는 남아있었다.
조금 먼 곳에서 따라오고 있었지만, 마물왕만 없다면 바로 합류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단장이나 수도에 있는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것은 마물왕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마물왕을 그들에게 던져주게 되면, 다시는 그런 생각을 못 하게 될 게 분명했다.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그럼 결국, 이 함정, 눈앞의 반쪽짜리 왕실 기사단을 부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자신들 쪽이 수가 적긴 했지만, 1 왕자는 자신이 나선다면 그런 차이는 금방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뭔가 말로 이리저리 시간 끌 필요는 없겠지. 후딱 치고 나간다!”
그는 검을 치켜들고 자신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나를 따르라! 또다시 승리를 안겨줄 테니!”
와아아아아!
그동안 기사들과 그의 군대에 승리를 안겨주었던 1 왕자였다.
마물왕에게는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기사와 병사들을 최대한 많이 살려놓았었다.
성격이 어쨌건 간에 기사들은 전쟁터의 1 왕자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왕자의 호위 기사는 긴장을 더해 갈 뿐이었다.
그는 거인 단장 옆에 있는 어린 기사를 보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왕자는 전투 시작을 외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호위 기사에게 물었다.
“저 녀석이 누구인데, 왜 이리 긴장하는 거야. 아는 놈이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사였지만, 왕자의 뇌리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왕자의 물음에 호위 기사 다빗은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질 것 같은 게 아니라, 이미 졌던 상대입니다. 왕자님도 보셨던 자입니다. 공주의 호위 기사입니다.”
그의 말에 왕자는 기사 대전 때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호위 기사들을 전부 쓰러뜨린 크지 않은 기사.
그때, 자신도 대전을 보고, 수하로 끌어들이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중간에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그런데, 저렇게 어린 얼굴이었나?
그때는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어린 얼굴을 보고, 왕자는 다시 아쉬워졌다.
그래도 지금은 적이 되어버렸으니, 아쉬워하기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럼, 죽이면 그만.
왕자는 검으로 어린 기사를 가리켰다.
“모두 공격! 실전이 어떤 것인지 과거 동료들에게 보여줘라!”
와아아아아!
왕자의 말에 왕자 쪽 기사들은 기세를 올리며 예전 동료들에게 달려들었다.
왕자의 말에 상대 기사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거기다, 갑작스럽게 바뀐 상대의 모습에 우리 쪽 기사들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짧은 기간이었지만, 전투를 경험해본 기사들과 수도에 남아있던 기사들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싸우다 보면 차이가 줄겠지만, 지금 움찔한 것을 봐도, 시작부터 기세가 밀린 것이다.
초대왕의 재림이라더니, 확실히 1 왕자는 전쟁터에서 아군을 이끄는데 재능이 있었다.
우리 쪽에서 기세를 올려주어야 할 기사단장은 이미 저쪽 부단장이 달려들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동료와의 싸움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고.
지금 나설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바탕 연설을 한다고 해도 왕자처럼 들어줄리도 없을 테고.
역시 나는 실력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마나를 끌어올리자, 손에 든 대검이 가볍게 느껴졌다.
기사들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긴장도, 부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장과의 싸움에서 이겨서인지, 이제는 내 실력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졌다.
적어도, 이 왕국에서 일대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이.
저렇게 달려오는 기사들도 내 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이.
나는 그 믿음을 품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순식간에 달려오는 기사들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빛나는 선이 검에서 튀어 나가 전방으로 날아갔다.
“이게 뭐야!”
“피해!”
거리도 멀지 않으니, 평범한 병사나 용병들이면 절대 피하지 못했겠지만, 기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훌쩍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들의 발아래로 지나가는 빛나는 선.
“아니 전장에서 이렇게 빤히 보이는 능력을 쓰다니.”
“역시 실전은 처음…….”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기사들은 나를 비웃었지만, 그 비웃는 말은 중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빛나는 선을 따라 몸을 날린 내가, 공중으로 뛰어오른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높이 뛰어올라, 대검의 길이로는 조금 모자랐지만…….
서걱, 서걱, 서걱.
그들은 한순간에 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쏟아지는 피와 흩어져서 떨어지는 신체들.
나는 그 피와 살점들을 지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말도 안 돼!”
“맙소사!”
사방에서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서로 맡 붙기 직전.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까이 있던 기사가 움찔하고 물러서기도 했고, 다른 기사들은 분노하며 나에게 달려왔다.
내 일 검에 왕자 쪽 기사들의 진영이 어그러져 버렸다.
이제는 제법 싸움이 될 것 같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왕실 기사단은 이 왕국 최고의 무력. 싸움을 길게 끌면 그 무력이 다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병법에서 언제나 강조하던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방법이었다.
나는 막아서는 적을 베고, 왕자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왕자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보고 웃어 재꼈다.
“푸하하하! 정말 강하잖아!”
그리고, 검을 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몸이, 그의 검이 점점 밝아졌다.
그는 분명 ‘마나 감응력’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마나를 끌어올려 빛을 밝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마나 감응력 활용법인가?’
괜한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힘을 모으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기사들 때문이었다.
왕자에게 다가가자 왕실 기사들이 떼를 지어 덤벼들었다.
두세 명의 기사가 합격하고, 몸을 날려 내가 전진하지 못하게 막는 기사도 있었다.
그 기사들을 다 쓰러뜨리니, 전에 싸웠었던 1 왕자의 호위 기사가 내 앞을 막았다.
부단장의 아들이라고 했었나…….
실력도 좋고 성격도 나쁘지 않은 기사였다는 게 떠올랐다.
부단장의 아들이니 나중에 왕실 기사단을 수습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배려할 때가 아니었다.
1 왕자의 몸이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1 왕자가 뭔가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서걱.
나는 호위 기사의 목을 그대로 날려버리고, 1 왕자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기 전에 1 왕자가 먼저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나는 뒤로 밀려났다.
급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힘 싸움에서 밀린 것이었다.
“하하하! 이것 봐라! 내가 더 강해졌잖아!”
빛 안에서 1 왕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1 왕자의 마나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왕실 선임 기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마나만으로는 단장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늘어난 마나, 또 그만큼 거칠어진 마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내용이었다.
“제국하고 이리저리 연계를 하는 것 같더니, 그것까지 받았군요.”
“뭐?”
어리둥절한 왕자를 보며, 나도 마나를 가슴으로 움직였다.
우우우웅.
내 마나가 점점 강해졌다.
왕자의 몸에서 쏟아져나오던 빛이 흔들렸다. 그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우우우웅.
목걸이를 통과한 마나가 왕자와 똑같이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