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제20편 광산 도시 (2)
한 시간 대련을 겨우 버티는 팔찌로 저런 허풍을 치다니.
어두운 분위기를 되돌리려는 노인의 노력은 가상했지만, 뻥이 너무 심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분위기는 많이 좋아졌다.
공작이 그때를 노려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후작과 협상을 하러 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나오게 되는 말이었지만, 귀족들은 공작의 눈을 외면할 뿐이었다.
물론, 협상에 성공하기만 하면, 회의실에 있는 공주의 눈에 드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도 큰 전공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1 왕자와 마물 왕이 덮쳐오는 영지에 먼저 가서 협상하라니.
잘못하다가는 제일 먼저 마물의 먹이가 될 판이었다.
이건 명예와 공적에 욕심이 가득한 귀족들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들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손을 든 사람은 눈을 피하고 있는 귀족 중에 있지 않았다.
참모도 아니었다.
전혀 뜻밖의 사람.
바로 나였다.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몇몇 귀족들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하기야 일개 호위 기사가 회의에 끼어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현장에서는 나도 회의에 여러 번 참석했었지만, 수도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에 온 뒤의 회의는 수많은 귀족의 각축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부터 그레시아 공작을 따르던 귀족들과 도중에 공주의 세력에 합류한 귀족들.
수도에 남아 있던 귀족들과 공주가 수도에 입성한 것을 듣고 달려온 귀족까지.
그 사이에 파벌이 갈리고, 논공행상에 정적에 대한 견제까지.
아직, 내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귀족들끼리 싸워대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런 회의에 참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공주가 몇 번 넌지시 말을 꺼내 보기도 했지만, 귀족들이 힘을 합쳐서 반대하니,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들어오지 못할 뻔했지만, 공주가 손을 써서, 호위 기사로 겨우 회의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수도에 온 뒤에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동안의 활약도 잘못하면 다 허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왕비의 약속도, 공주의 노력도 귀족들이 모두 반대하면 공염불이 될 수도 있었다.
내 활약이 전부 허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줄이고 줄여서 내가 받고자 하는 것들은 못 받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수도의 정치, 귀족의 정치는 무서웠다.
나도 이런 정치판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목적을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방법은 한가지였다.
한 번 더 제대로 활약하는 것.
후작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적이 되겠지만, 나는 후작을 설득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마물 왕을 상대해 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마물에게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공주를 돕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적을 쌓겠다는 내 목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나에게는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다.
나는 이미 다른 마물 왕과 한번 싸워 보기도 했었다.
그때도 죽을 뻔하고, 이기지도 못했지만, 마물 왕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한가지 작전을 생각해 두었다.
잘 안될 수도 있겠지만,
목숨 한 번 정도는 걸어볼 만한 일이었다.
정 안되면 후작만 설득하고 물러나도 되고.
나는 그런 생각으로 손을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레시아 공작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었지만, 공작이 말이 없자, 다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감히, 호위 기사가 나설 일이 아니야!”
나를 잘 모르는 귀족이 호통을 치기도 했고,
“이건 기사가 할 일이 아니라 귀족이 움직여야 하는 걸세.”
나를 아는 귀족은 협상까지 나서는 내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위험해요!”
거기다, 공주는 내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보였다. 내 실력을 아는데도 위험하다고 외치다니.
아무래도 너무 오래 같이 다닌 모양이었다.
다행히 공주의 외침은 귀족들이 떠드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렇게 소란은 커졌지만, 그레시아 공작은 나를 빤히 보고만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다행히 그때, 벤자민 선배가 손을 들었다.
“기사로 부족하면 제가 돕겠습니다.”
벤자민이 손을 들자, 시끄러운 소리가 뚝 그쳤다.
“벤자민 참모가 나서준다면야…….”
“이게 맞는 거지.”
나와 달리, 벤자민은 수도에서도 참모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귀족들의 행동에 기분이 슬쩍 나빠졌지만, 금방 그 기분은 풀어버렸다.
어차피 계속 마주칠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벤자민이 나 대신 변명해주었다.
“알렉스 호위 기사는 피센 후작의 집에도 방문할 정도로 그 가족과 가깝습니다. 그래서 나선 것이었으니, 귀족 여러분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과 전혀 다른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험. 그걸 먼저 이야기했어야…….”
“벤자민 참모가 나서고 기사가 호위하는 거라면 뭐, 나쁘지 않겠지.”
벤자민 선배가 나서자, 일은 수월하게 풀려나갔다.
오히려 그가 주가 되고, 내가 그를 호위하는 기사 역할을 하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내 주된 목적은 후작의 설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시아 공작도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벤자민 선배와 나의 후작령 행을 허락했다.
공주도 표정이 안 좋았지만, 반대는 하지 않았다.
똑똑한 그녀가 내가 왜 가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도 가지. 먼저 가 있어야 조언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거기다, 세우타 공작까지 일행에 끼어들었다.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더 좋아했다. 어쨌거나 왕족이자 명예 공작이었다.
당연히 어린 꼬맹이들보다야 믿을 만했다.
마지막 일행은 발레아였다.
약속까지 하고 그녀를 떼어놓을 수는 없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우리는 바로 출발했다.
육체 능력자가 아닌 벤자민과 발레아, 거기다, 평상시에는 평범한 노인인 세우타 공작이 같이 가니, 말을 탈 수는 없었다.
다행히 공주가 왕실 마차를 내어주었다.
튼튼한 왕실 마차는 엄청난 속도로 후작령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말을 달리는 것과 뒤지지 않았다. 그런 속도인데도 이런 승차감이라니.
왕실 마차는 웬만한 유물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가 출발할 때, 왕실 기사단도 모이고 있었다.
우리 뒤를 따라 왕실 기사단도 움직일 모양이었다.
군대도 소집하는 것을 보았으니, 기사단에 이어 군대도 움직일 것 같았다.
그레시아 공작, 아니 우리 쪽 수뇌부는 후작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후작령을 전장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물론,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괜히 협상 결과를 기다리다가, 일을 그르치느니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협상이 어려워질 수도 있겠지만, 잘하면 협박 재료로 써먹을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생각 속에서 마차는 계속 달려 나갔다.
작은 영지를 지나, 피센 후작의 영지로.
영지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걸까?
아니면, 영주 식구들만 도망친 걸까?
하지만, 영주와 동생인 기사단장을 떠올려봐도 유능한 상인이긴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영지를 지나, 연기를 뿜어내는 광산 도시를 통과해 후작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온했던 영지와 광산 도시와는 달리, 저택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기사들은 무장을 갖추고 사방을 경계했고, 후작의 동생인 세르히오 기사단장이 직접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의실에서 후작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후작도, 기사단장도 분명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역시, 후작은 정보에 밝은 장사꾼이었다.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단장은 모든 예식을 건너뛰고, 우리를 바로 후작이 있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얼굴이 검게 죽은 후작이 회의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린 모양이야.”
그리고, 세우타 공작이 그의 앞에 앉았다.
내가 손을 먼저 들고, 왕궁의 회의실에서는 벤자민이 대표처럼 여겨졌지만, 이곳에서는 세우타 공작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차 안에서 세우타 공작과 말을 맞춰 놓았다.
“정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날뛰는 1 왕자를 보고, 뒤로 빠진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만, 갑자기 마물 왕이라니…….”
“우리가 왜 왔는지도 아는 모양이니 이야기가 쉽겠군.”
“협상을 하러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협상일지, 협박일지 모르겠군. 기사단도 군대도 다 출발해버려서 말이야.”
“숨기지도 않으시군요.”
“숨길 게 있나.”
세우타 공작은 의외로 협상을 잘해 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 사이에 벤자민도 잘 끼어들었다.
“어차피, 중립을 지킨다고 문을 닫아도 1 왕자가 곱게 떠나지는 않을 겁니다. 내전 중의 1 왕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건 나도 아네.”
딱 봐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장사꾼에 가까워서인지, 후작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도 부족했고, 이리저리 조율해야 하겠지만, 협상은 잘 진행될 것 같았다.
귀족들의 말대로 나보다 두 사람이 협상에는 더 도움이 되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다들 고개를 돌렸지만, 내가 고개를 숙이니, 금방 다시 협상을 이어갔다.
다만, 발레아는 슬쩍 내 뒤를 따라 움직였다.
문밖에는 기사단장이 지키고 있었다.
나와 발레아가 문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그는 한쪽에 서 있던 하녀를 불렀다.
“가엘에게 가볼 생각인가? 안내할 사람을 붙여주겠네.”
가엘이라. 맞다. 후작 아들 이름이 가엘이었지?
내게 대련을 신청했다가 얻어터진 신입생.
나는 이제야 가엘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기사단장은 후배를 보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지만, 당연히 아니었다.
내가 만나볼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잠깐, 시내에 나가 볼일이 있습니다.”
“시내?”
기사단장은 내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발레아는 내 말에 기대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혹시 광부 조합장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없을까요?”
“광부 조합장? 그 사람은 왜? 거기다가 조합장은 어떻게 알았고?”
기사단장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광부 조합장을 안 것은 몇 번이나 전의 삶에서였다.
이미 없어진 시간대에서 들었던 사람이었으니, 내가 그를 아는 것이 이상하게 여길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만나봐야 했다.
나도 입구는 알고 있었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안내자가 꼭 필요했다.
“광부 조합장과 협상, 아니 협박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오래전에 세우타 공작이 했던 일을 다시 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에는 유적이 없었지만, 비슷한 것은 이곳에도 있었다.
이 도시의 오래된 광산.
나는 마물 왕을 광산 안에 처박아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