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제19편 광산 도시 (1)
갑작스러운 마물 왕의 등장으로 그동안 준비한 계획들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향하게 되었다.
1 왕자, 2 왕자의 부대를 상대할 여러 전략도 무용지물로 변했고, 대규모 전투를 상정한 훈련도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왕국에 등장한 마물 왕이라니.
왕국에서 마물 왕을 상대해본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그것도 비밀리에 상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고.
거기다, 지금 수도로 다가오는 마물 왕을 직접 상대해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한 사람은 마나를 잃은 세우타 공작이었다.
“이런 시선들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노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보고, 끌끌 웃었다.
수십 년 만에 왕국이 다시 위험이 휩싸이긴 했지만, 그런 이유라도 퇴물이 된 그가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다니.
뭔가 우스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세우타 공작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왕궁의 대회의실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다.
아이샤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 그리고 공국의 왕세자 안토니오와 왕실 기사단장.
그리고, 참모 역할을 하는 젊은 귀족 몇몇과 나름 힘이 있다는 귀족들도 보였다.
그리고, 회의실 뒤쪽에 서 있는 몇 명의 기사들.
귀족들의 호위 기사들이었다.
다들 모르는 얼굴들이었는데, 한 명은 아는 기사였다.
그동안의 활약을 보면 왜 저기 서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기사.
하지만, 젊은 기사는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노인은 고개를 젓고는 말을 시작했다.
“모두, 마물들이 인간을 싫어하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봉인된 마왕 때문인지, 마물들이 가지고 있는 변형된 마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물들은 인간을 싫어하고 죽이고 싶어 하지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뻔히 아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세우타 공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몇몇 귀족은 공작이 치매가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마물은 강해질수록 지능도 높아져서 마물 왕 정도만 되면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일도 있다지만, 인간을 증오하는 것은 마물 왕도 다르지 않지요.”
“때에 따라서는 그 지능으로 더 증오하는 경우도 있고.”
마물 왕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제야 본론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그 마물은 증오가 더 심한 경우였지. 그 마물은 인간들을 싫어했고, 특히 마나를 가진 인간, 용사의 피를 짙게 이은 인간을 증오했어.”
노인의 말에서 존대가 사라졌다. 하지만, 다들 뭐라 하지 않았다.
마나를 잃기는 했지만, 노인의 나이와 지위를 봐도 반말로 불쾌할 사람은 몇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노인이 고의로 말을 놓은 것도 아니었다. 노인의 눈이 허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과거를 회상하는 중이었다.
“우리 왕국에서는 그 피를 가장 짙게 이은 사람이 왕족들이었고, 그때 당시에 제일 잘 싸운 사람이 나였으니, 내가 나서는 것은 당연했지.”
노인의 머릿속에는 그때의 일이 어제 일어난 일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요새 성벽에 기댄 부상병들과 지치고 좌절한 기사들.
왕은 장군들과 기사들에게 고함을 질렀고, 전령들은 계속해서 비보를 전해왔다.
“수도 기사단 전멸! 왕실 기사단도 큰 피해를 보며 후퇴 중입니다!”
“2군단이 발을 묶고 있지만, 벌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됩니다!”
이어진 보고에 왕은 머리를 감쌌다.
“기사도, 귀족도, 군대도 안된다는 건가…….”
“무리입니다! 머리 두 개가 각기 다른 능력을 사용하고 있어서……. 기사도 귀족들도 상대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막아야 해! 수도에 사람이 몇 명인데! 수도에 닿게 되면 우리 왕국은 끝장이야!”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던 왕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을 마구 늘어놓았다.
“아니, 방향을 돌리기라도……. 이피로스 왕국도 다 부수지 않고 우리 왕국으로 넘어 온 거잖아.”
하지만, 그 마물은 이피로스 왕국에서도 부술 곳은 다 부수고 죽일 사람은 다 죽인 뒤에 카를로스 왕국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거기다, 다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왜, 마물이 수도로 향하고 있는지.
아니, 마물은 수도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수도에 있는 왕족, 아니 이곳에 있는 왕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마물은 항상 적을 찾고 죽이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사람을, 기사가 있으면 기사 먼저, 귀족이 있으면 귀족을 먼저 찾아내 죽였다.
그리고, 왕과 왕족이 느껴지면 항상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왕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왕족 외에는.
“그 방향을 바꾼다는 것. 제가 해보죠.”
지금 왕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라고 불리기도 하는 기사인 왕의 막냇동생. 세우타 왕제(王弟).
그가 나선 것이다.
“하지만, 너는 부상이 심해서…….”
“포션 덕분에 꽤 괜찮아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사들과 저 마물을 막아낼 방법도 하나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마물이 처음 왕국에 들어왔을 때, 왕실 기사단과 함께 세우타 왕제도 마물을 막기 위해 나섰었다.
결과는 왕실 기사단의 붕괴와 그의 부상.
왕에게 하는 말과 달리, 그의 부상은 쉽게 낫는 상처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 마물을 유인할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왕인 큰 형이 나설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다른 형들은 상처를 입기도 하고, 병사들을 모으러 돌아다니기도 해서 여기에 없으니, 저밖에 없죠.”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는 부양해야 할 사람들이 없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직 분가해서 영지를 가지지도 않았으니, 자신이 나서는 게 맞았다.
그렇게 세우타 왕제와 수십의 기사들은 다가오는 마물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말을 하던 노인의 눈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라고 할까. 그때 나와 같이 마물을 유인했던 기사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지. 솔직히 그 유적까지 마물을 유인한 것도 기적이었으니까.”
말을 하던 노인은 팔찌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 유적 안에서 또 상처를 입는 바람에 마나를 잃게 되었지만, 그래도 목표대로 마물 왕은 유적에 가둘 수 있었어. 대전쟁 때 만들어진 유적인데도 잘 움직여 주더라고.”
그리고, 긴 이야기의 마지막은 유적을 봉인한 열쇠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유적을 봉인하는 열쇠는 잘 가지고 돌아와서 왕궁 비밀 창고에 넣어두었는데…….”
노인의 말을 듣고 다들 같은 생각을 했다.
왕궁 비밀 창고에 있던 그 열쇠는 지금 없을 거라고.
1 왕자나 2 왕자 둘 중 하나가 가지고 나갔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1 왕자도 2 왕자도 공주의 형제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왕실에 오점이 되는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노인은 이야기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노인이 자리에 앉자, 상석에 앉아 있던 그레시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세우타 공작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수도로 다가오고 있는 그 마물 왕을 막을 방법을 이야기해보죠.”
이런 회의는 그레시아 공작이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주가 아직 어리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레시아 공작 세력이 그만큼 강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공국의 왕세자도 공작의 진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공국은 나중에 합류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앞으로 나서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마물이 오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수도 방향은 아닙니다.”
세우타 공작과 다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마물은 피센 후작의 영지, 정확하게는 그의 광산 도시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어진 그레시아 공작의 말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공작은 손을 들어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그 마물의 앞쪽에는 1 왕자와 그의 부하들이 말을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세우타 공작님의 말대로라면, 마물은 1 왕자를 쫓는 것일 테고, 결국, 1 왕자가 피센 후작 영지로 가는 것이겠죠.”
공작이 말을 멈추자, 다른 귀족이 입을 열었다.
“다른 영지 때처럼 후작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걸까요?”
“아니, 1 왕자가 쉬었던 영지들이 모두 마물에게 쑥밭이 된 것을 봤는데, 후작이 그를 받아들일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도, 후작은 1 왕자 쪽 계파였는데.”
“지금은 거의 중립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1 왕자에게 병력도 안 보내고, 우리와 거래도 하고 있으니, 아예 우리 쪽으로 불러도 무방할지도요.”
한 명이 입을 열자, 귀족들끼리 계속 말이 이어졌다.
중요한 대화 같으면서도 어딘가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대화들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그레시아 공작이 손을 들어 대화를 막았다.
“여러분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 후작의 정확한 의도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것인지.”
그는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후작이 어떤 뜻이 있는지 알아내야 하고, 또 필요하다면 1 왕자가 후작령에 도착하기 전에 협상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피센 후작령은 수도에서 영지 하나만 넘으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지금부터 빠르게 달린다면 서쪽에서 달려오는 1 왕자보다는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작을 끌어들인다고 뾰족한 수가 없을 텐데요. 후작이 성문을 걸어 잠근다고 1 왕자가 다른 곳으로 갈까요? 아니면 수도로 바로 올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레시아 공작의 말에 귀족 한 명이 반박했다.
다른 귀족들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을 끌어들인다고 해도 시간만 조금 벌 뿐이었다.
거기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후작이 쉽게 이쪽 편을 들지도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을 보고, 그레시아 공작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 마물 왕과 싸우는 장소가 이 수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물 왕에게 수도가 쑥밭이 된다면 내전이고 나발이고 전부 의미가 없었다.
“수도에서 싸우지 않으려면, 다른 곳에서 싸워야 합니다.”
공작의 말에 다들 표정이 변했다.
“그 장소가 피센 후작령이었으면 합니다. 거리를 봐도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마물 왕을 막을 수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습니다.”
결국, 공작의 말은 늦기 전에 기사단과 병력을 모아 후작령에서 1 왕자와 마물 왕을 막아 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후작과의 협상은 그 병력과 기사단을 후작가가 지원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자신의 영지를 마물 왕과의 전장으로 삼으라는 소리였으니.
후작 입장이라면 차라리 문을 닫아거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다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세우타 공작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 뭐하면 내가 다시 유인해도 되니까.”
노인, 세우타 공작이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흔들리는 손목에는 마나를 머금은 팔찌가 은은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팔찌가 마나 팔찌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귀족들은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 팔찌의 마나양을 알고 있었던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