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제17편 두 머리 마물 (1)
1 왕자의 선발대가 마지막 방어를 부수고 협곡 깊숙이 밀고 들어갔을 무렵, 1 왕자의 본대는 막 협곡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험한 산맥의 협곡을 둘러보며 호위 기사 다빗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으로 군대를 이끌고 온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왕실 기사단 부단장의 아들이라는 위치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던 다빗이었지만,
이번 내전으로 그는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제대로 된 기사가 되어 있었다.
1 왕자가 제일 앞에서 검을 휘두르니, 그도 같이 싸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갑옷과 얼굴은 상처가 가득했고, 얼굴도 무척이나 진중해져 있었다.
당연히 부단장 알바로도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유격전을 하는 게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병사들을 버리는 것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니고…….”
알바로의 말에 1 왕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 어차피 곧 끝날 테니까.”
1 왕자의 말에 부관들과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대만 해도 이제 2 왕자 병력보다 많은 상황이었다.
1 왕자의 본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동안의 승리로 병력은 더 불어난 상황.
아무 작전도 없이, 협곡으로 밀어붙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렇게 정리가 되면 이제 수도가 문제겠군요.”
다른 귀족의 말에 다들 표정이 나빠졌다.
뒷일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의 도움을 기뻐했었던 1 왕자와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제국이 싸움에 지고, 이피로스 왕국도 제 몫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릴 줄이야.
결국, 공국과 그레시아 공작의 연합군이 수도에 무혈 입성했다는 소리에 다들 어안이 벙벙해졌을 정도였다.
“무혈입성이라니. 왕실 기사단이 배반할 줄 몰랐습니다.”
“단장 때문이에요. 단장만 돌아오지 않았어도 알바로 부단장이 전부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어차피 우리 편이 될 놈들이 아니었던 거지. 무혈입성이라는 게 아쉽지만, 이렇게 되면 부단장을 따라온 쪽과 단장 쪽 기사 중에 누가 강한지 구경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고.”
1 왕자의 늘어지는 말에 다들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1 왕자의 참모들과 측근들은 1 왕자의 이런 냉소가 항상 걱정되었다.
그래도 전투 중에는 초대 왕의 환생으로 불릴 정도로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싸움이 끝나기라도 하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2 왕자가 패퇴해서 달아나기 시작한 이후로 더 지루해 보였다.
사람들은 세상의 소문대로 1 왕자는 싸움과 파괴에만 흥미를 보이는 그런 파괴왕이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은 너무 이른 걱정이기도 했다.
모두, 걱정을 지워버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협곡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데, 다시 선발대에서 연락이 왔다.
“선발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2 왕자의 본대와 접촉을 했다고 합니다. 2 왕자는 버려진 유적으로 보이는 곳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병력은 지금 차근차근 분쇄하는…….”
전령의 보고는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크와와와와와왕!
협곡을 뒤흔드는 괴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우르르르르르!
평범한 짐승의 괴성이 아니었다. 마나가 얼마나 담겨 있는지, 협곡 전체가 부르르 떨려왔다.
“으악! 귀가!”
“머리가 울려!”
히이이잉! 히이이잉!
일반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았고, 기사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푸드드드득!
새들이 미친 듯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가을 낙엽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단 한 번의 괴성.
그런 괴성으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다니.
이건,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나이 든 귀족과 기사들은 이런 괴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수십 년 전 왕국을 위기로 몰았다는 마물 이야기에서 나왔던 괴성이었다.
부단장 알바로가 검을 빼 들며 중얼거렸다.
“설마 두 머리의 마물인가?”
“하지만, 그 마물은 세우타 공작님과 기사들이 쓰러뜨렸다고 들었는데…….”
다빗 기사의 반문에 1 왕자가 피식 웃었다.
“마물 왕을 우리 왕국 기사단만으로 죽일 수 있을 리가. 어딘가 봉인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저곳이었나?”
왕자는 괴성이 들려온 곳을 보며,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소리만 듣고 그 마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냥 목소리만 큰 보통 마물일지도…….”
젊은 귀족들이나, 마물왕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던 기사들은 애써 다른 마물일지도 모른다고 말을 늘어놓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로 이어서 그들이 본 장면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번쩍!
갑자기 전방이 환하게 빛나더니,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던 것이었다.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보일 정도로 치솟은 불길이었다. 그 불길은 나무가 아니라 숲 일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
이어서 들려오는 불 소리.
“아무래도 그놈이 맞는 것 같지? 저런 화력을 내는 공격을 할 수 있으면 그놈이 아니더라도 마물 왕이라고 불릴 만할 테니.”
근래 왕국에 마물 왕이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린 적이 없었다.
거기다, 왕국을 공격했던 마물 왕 이야기를 보면 두 머리의 마물 왕은 저런 대단위 화염 공격을 하곤 했었다.
거기다, 그 마물이 할 수 있는 공격이 화염 공격만이 아니라서 더 문제였지만,
“큰 거 한 방이라. 저 정도면 우리 선발대도 다 죽었겠군. 들은 내용대로라면 이제 저런 큰 공격은 한동안 못할 테니, 슬슬 방어 진형으로 바꾸자고.”
끔찍한 광경이자, 공포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왕자는 뭔가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장난감을 보게 된 어린이 같다고 할까.
이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모두 느꼈다.
그리고, 1 왕자는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마나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이쪽으로 올 줄 알았다니까.”
1 왕자의 말대로 마물이 움직일 곳은 호리병처럼 생긴 협곡의 입구인 남쪽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마물을 동생 놈이 풀어 준 걸까?”
선발대가 보았다는 버려진 유적과 그곳에서 튀어나온 봉인된 마물.
이것을 이어놓고 보면 그것 말고는 다른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믿을 수가 없었다.
싸움에 지게 되었다고, 왕국을 위태롭게 한 마물 왕을 풀어놓다니.
그게 가능한 것은 둘째치고, 그럴 생각을 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물론, 1 왕자도 제국을 끌어들이는 황당한 짓을 했었지만, 이들의 머릿속에서 그 일은 예전에 지워져 있었다.
“부대 정지!”
“강력한 마물 접근 중!”
“용병들 빨리 튀어 나가서 전방 상황 알아 와!”
“진영을 바꾼다! 방패병 전열로 나와! 창병도 앞으로 움직이고!”
“기사 놈들은 말에서 내려! 산속에서 돌격할 셈이냐!”
“귀족분들도 능력 준비를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족 장교들과 기사들의 고함이 들려왔고, 용병들이 투덜거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용을 갖추었을 때, 용병 몇이 상처를 입은 기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몸의 반이 화상으로 덮여 있는 기사였다. 마나가 없었으면 이미 죽었을 듯한 모습.
거기다, 돌아온 용병은 모두 핼쑥하게 질려있었다. 바로 달아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용병들의 표정은 무시하고, 기사의 보고를 들었다.
기사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선발대의 상황을 열심히 이야기했다.
“선발대는 전멸했습니다. 괴물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왕자는 무시무시한 마나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지금도 볼 수 있었다.
“두 머리 마물 왕이 맞나?”
“신, 신장은 4m 정도, 이족 보행인 머리 두 개 마물이었습니다.”
역시, 나쁜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유적에서 튀어나온 마물은 수십 년 전 왕국을 위협했던 그 마물 왕이었다.
기사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계속 이야기했다.
선발대가 남은 2 왕자의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있을 때, 유적의 열린 문에서 2 왕자와 귀족 장교들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2 왕자와 그 수하들은 선발대와 남은 병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북쪽 산 위로 달아났다고 했다.
선발대도 그들을 쫓으려 했지만, 이어서 나온 마물이 선발대와 남은 병사들을 쓸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북쪽으로 도망친 2 왕자의 수하들은 겨우 수십 명이었습니다. 2 왕자와 여기사 외에는 전부 귀족 장교로 보였습니다.”
“여기사?”
“2 왕자가 제일 늦게 나와 마물에 따라잡히게 되었을 때 여기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2 왕자를 구했습니다.”
“여기사? 그놈 호위 기사인 이네스가 돌아온 건가?”
“얼, 얼굴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네스겠지. 어쨌거나 동생 놈의 호위 기사였으니.”
운도 좋은 동생이었다.
수십 년 전에 봉인해 놓았던 마물 왕을 끄집어내고, 거기다 자신을 떠났던 호위 기사가 찾아와 목숨까지 구해 주었으니.
“그건 그렇고, 역시 핏줄은 어쩔 수 없어. 항상 잘난 척하던 놈이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결국, 그 씨는 어쩔 수 없다니까.”
느긋한 1 왕자의 말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협곡 안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앞에서 풍겨오는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퍼져나간 마나가 사람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물의 왕이라더니. 이거 못 이기겠는데?”
1 왕자가 다가오는 마나를 보더니,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1 왕자는 저런 마나를 본적이 없었다.
손끝도 떨리고 있었고, 언제나처럼 객기도 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1 왕자는 별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이런 곳에서 마물 왕에게 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슬쩍 손을 움직여 지시를 내렸다.
‘몰래 퇴각.’
왕자의 신호에 그의 측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실 기사들이 점차 뒤로 물러서고, 귀족 중에서도 왕자와 가까운 사람들이 천천히 뒤로 빠졌다.
왕자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세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괴물이 모습을 보였다.
기사 말대로 키가 4m 정도인 머리가 두 개 달린 마물이었다.
이야기에 나오던, 산처럼 거대한 마물도 아니었고, 다리가 수십 개 달린 무시무시하게 생긴 마물도 아니었다.
그냥 누더기 천을 두른, 일그러진 피부와 얼굴을 가진, 머리 두 개짜리 거인일 뿐이었다.
어딜 봐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보기에도 징그러웠지만, 겉보기에는 다른 마물들보다 특별히 대단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물을 본 사람들은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크르르르르릉.
그리고, 마물의 두 얼굴들은 그런 인간들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마치 미소를 짓는 듯한 얼굴.
하지만, 그 괴기한 얼굴로는 미소가 더 무섭게 보일 뿐이었다.
마물은 한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녹슨 창을 휘두르며 굳어있는 인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1 왕자의 말처럼 그 굉장한 화염 공격은 당장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이 없더라도 별 차이가 없었다.
공포에 질렸던 병사나 귀족들은 눈앞을 휘날리는 피에 정신을 차렸지만, 4m가 넘는 마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게, 수천의 1 왕자의 군세는 마물 왕을 만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게 되었고,
1 왕자와 그 수하들은 일부의 병력만 구해내서 산맥 밖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두 머리의 마물 왕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산맥을 벗어났다.
그렇게 산맥을 빠져나온 마물 왕은 가로막은 마을과 영지를 부수며 동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