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제16편 충성 맹세 (2)
기사단장과 알렉스의 대련이 끝난 뒤, 도시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숙소로 철수했던 왕실 기사단이 다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왕실 기사단은 왕궁과 성벽, 그리고, 성문까지 돌아다니며 막아서는 자들을 제압했다.
당연히 1 왕자의 기사나 귀족, 병사들이 그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수도에 남아 있는 1 왕자의 부하들은 왕실 기사단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너희들이 왜 여기 온 거지? 왕실 기사단이 왜?”
“뭐긴 뭐야. 치안 정리다!”
“멈춰! 여기는 1 왕자님의 지시한 명령대로…….”
“나는 1 왕자에게 충성한 적이 없었어!”
사방에서 고함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가 사라졌다.
수도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더 집안에 틀어박혀서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1 왕자의 병력은 금방 정리가 되었다.
그들이 강제로 끌어냈던 지원병들은 왕실 기사단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무기를 내려놓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털썩, 털썩, 털썩.
왕실 기사의 말에 사람들은 들고 있는 창과 검을 던져버리고 집으로 달려갔다.
수도의 가정들은 돌아온 가장과 자식들 때문에 다시 시끌벅적해졌지만, 이번에는 나쁘지 않은 소란이었다.
그렇게 수도가 시끄러워진 사이에, 외성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한참 동안 굳게 닫혀있던 문이었다. 공국왕의 군대가 다가왔을 때부터 닫혀있었던 문.
그리고, 1 왕자가 있을 때도 일정 시간만 열었던 문이었다.
그 문이 오랜만에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백기를 든 기사가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는 병력 앞으로 나아가, 말에서 내렸다.
진을 치고 있는 병력 안에서 갑옷을 입은 소녀와 청년이 밖으로 나왔다.
딱 봐도 나이와 상관없는 고귀한 귀족들이었다.
더구나, 기사는 소녀를 알고 있었다.
그는 깃발을 놓고, 공주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수도 안은 왕실 기사단이 정리했습니다. 지금 들어오시면 됩니다. 왕국의 수도는 공주님의 군대를 환영합니다.”
공주 옆에 있던 귀족. 공국의 왕세자가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가 기쁜 얼굴로 기사에게 물었다.
“알렉스 공이 성공했군요!”
“네. 알렉스 공의 연락을 받고 우리 기사단이 움직였습니다.”
그사이에 대련 같은 게 있기는 했지만, 기사는 그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공국 왕세자, 안토니오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아버지가 오시지 않은 게 다행이었네.”
공국왕은 이 성벽을 넘기 위해 오랫동안 작전을 짰었다.
거기다, 그렇게 오래 계획을 세웠는데도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었었다.
물론, 그 계획을 쓰지도 못하고 공국으로 돌아갔었지만, 이렇게 쉽게 성문이 열릴 줄이야.
공국왕이 보았다면 한껏 인상을 찌푸릴 일이었다.
안토니오가 혀를 차는 동안, 공주는 기사들을 시켜서 병력을 움직였다.
병사들이 펼쳐놓은 진지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동안 기사 몇 명이 수도로 가서 사실 확인을 했다.
이제는 성벽에도 흰 깃발들이 꽂혀 있었지만, 확인은 해봐야 했다.
기사들은 무사히 돌아왔고, 진지를 거둔 공주와 공국의 연합군은 열린 성벽을 향해 나아갔다.
연합군은 오래지 않아, 성문을 통과해 수도 안에 진입했다.
행렬의 선두에는 공주가 두 호위와 함께 말을 몰았고, 공국의 왕세자와 그레시아 공작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 뒤에는 여러 귀족과 기사단이 보였다.
그리고, 기사단 뒤로는 병사들이 줄줄이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완연한 승자의 행진.
싸움 한번 없이 점령한 도시에서 벌이기에는 낯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은 행진이었지만,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공주는 자신이 있던 왕궁으로 돌아온 것일 뿐이었다.
아쉽게도 환영 행사는 없었다.
꽃다발도 없었고, 꽃잎이 뿌려지지도 않았다.
길옆에 나와 축하해주는 시민도 없었다. 달려 나와 키스를 퍼붓는 아가씨도 없었다.
시민들은 모두 집 안에 숨어 두려운 눈으로 행진하는 군대를 볼 뿐이었다.
“환영 행사를 준비하라고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어느새 다가온 벤자민이 공주에게 아쉬운 듯 말했다.
하지만,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억지로 사람들을 끌어낼 필요는 없어요. 반감만 살 뿐이에요. 지금은 다들 생업으로 복귀시키는 게 먼저예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벤자민이 공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벤자민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공주는 생각 이상으로 잘 대답해 주었다.
그가 원하던 군주의 모습이었고, 다른 귀족에게도 그녀의 자질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었다.
공주 뒤에 있던 그레시아 공작과 공국의 왕세자도 공주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환영 없는 행진을 이어가던 부대는 왕궁 앞에서 행진을 멈추었다.
왕궁에 도착했기에 멈춘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왕궁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왕실 기사단이었다.
왕실 기사단이라 왕궁으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생각인가?
사람들이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덩치가 큰 중년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기사들보다 월등히 큰 기사. 일반인과 같이 선다면 거인처럼 보일 것 같은 기사였다.
뒤에 있는 병사들은 잘 몰랐지만, 귀족들도 기사들도 모두 그 거인을 알고 있었다.
공주도 잘 알았다.
왕실 기사단장.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공주를 귀여워해 주었었다.
아쉽게도 지금 그는 공주를 귀여워해 주었던 그때의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공주 자신도 그 시절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얼마 전까지 쓰고 있었던 가면은 벗어던졌지만, 지금은 왕위 계승자라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가면은 그녀가 목표를 위해 스스로 쓰고 있는 가면이었다.
다른 어른들과 다를 바 없는 가면.
그녀는 남들보다 조금 빨리 썼을 뿐이었다.
그는 멈춰선 공주 앞으로 다가와 섰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어서, 공주도 말에서 내렸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 서니, 공주는 더 작아 보였고, 단장은 더 거인 같았다.
공주가 앞에 서자, 단장은 공주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는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왕실 기사단장이 자신에게 이렇게 머리를 숙이다니.
단장 정도 되면 함부로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할 상대라면, 그건…….
기사단장이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빼 들어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고, 그는 맹세했다.
“왕실 기사단장 엔리케 디 라보아는 아이샤 데 카를로스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척. 척. 척. 척.
이어서 뒤에 있던 왕실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단장과 똑같이 무릎을 꿇고 검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그들 입에서 단장과 똑같은 맹세가 흘러나왔다.
“왕실 기사단 전원 단장님과 함께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왕실 기사단이 공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수도의 문을 싸움 없이 열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충성 맹세라니.
더구나,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단장은 선대 왕부터 중립을 지키기로 유명한 기사였다.
1 왕자와 2 왕자의 추근거림을 피해서 칩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충성을 받다니.
사람들은 도대체 공주가 언제부터 이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주를 쉽게 보았던 귀족들도, 경계했던 귀족들도 모두 공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공주가 세력을 얼마나 펼쳐두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충성 맹세라니.
기쁘고 좋은 일이었지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단장이 분명 공주를 귀여워해 주기는 했었지만, 단장은 충성을 맹세할 정도로 공주 자신을 알지 못했다.
왕실 기사단도 같은 편으로 싸웠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게 이렇게 바로 현실이 될 줄 생각도 못 했었다.
그래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무릎을 꿇은 기사들 뒤에 젊은 기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공주의 호위 기사였다.
이번에 왕실 기사단과 교섭을 하러 간 것도 그였고, 그녀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을 해결한 것도 그였다.
그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주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날, 왕국의 수도와 왕궁이 공주의 손에 들어갔다.
수도를 점령하게 되니, 공주는 이제 왕국의 반을 손에 넣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미, 왕국의 동쪽 영지들은 태반이 공주를 따르고 있었고, 북쪽의 공국도 공주의 편이었다.
남쪽 영지들은 눈치를 보는 중이었고,
서부 영지들만이 1 왕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서부 영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2 왕자는 1 왕자의 추격을 받으며 북부 산맥으로 들어가 있었다.
* * *
북부 산맥의 한 협곡.
2 왕자는 지금 이 협곡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험한 지형에, 좁은 입구까지.
이 협곡은 무척이나 험난한 곳이었다.
알렉스가 보았다면, 게릴라 활동을 하기 딱 좋은 지형이라고 하겠지만.
2 왕자는 이곳에서 유격전이나 게릴라 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계책을 알지도 못했고.
그는 단지 추격하는 형의 부대를 방해하기 위해, 부대를 잘게 나누어 후미에 뿌려두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병력을 나누니, 수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2 왕자의 주변에는 지금 수백의 병사만 남아 있었다.
병사들만 남겨 두었기에 그의 주변에는 이미 갈 곳이 없어진 귀족 장교들이 모두 보였다.
다만, 그를 따르던 장군 몇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장군들은 전세가 기운 것처럼 보이자 냉큼 몸을 피한 것이었다.
2 왕자는 그런 장군들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병사들이 줄어든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협곡 앞을 지키고 있던 부대가 전멸했다고 합니다.”
“얼마 뒤에는 1 왕자의 선발대가 협곡 안으로 들어올 겁니다.”
전령이 달려와 위기 상황을 전해도 2 왕자는 정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옷차림도 전과 달리 흐트러져 있었고, 날카로운 눈도 광기에 젖어있었다.
사람들의 조언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형과 비슷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2 왕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그는 눈앞의 철문을 여는 것에만 정신을 쏟을 뿐이었다.
“조심해! 마나를 잘못 주입하면 다시는 유적이 열리지 않을 거야!”
그는 철문에 매달려 있는 귀족 장교들에게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절벽에 박혀 있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오래전 고대 제국 때 만들어진 유적의 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귀족 장교들은 그 유적의 문을 여는 중이었다.
그들은 문에 박혀 있는 작은 열쇠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 열쇠는 2 왕자가 가져온 열쇠였다.
수십 년 전 있었던 일을 듣고, 2 왕자가 왕실 창고에서 빼낸 열쇠였고.
이 유적은 수십 년 전, 카를로스 왕국을 침입한 마물 왕을 가둔 유적이었다.
세우타 공작이 능력을 잃어버린 그 시절.
분명, 세우타 공작과 왕국군은 왕국을 침입한 마물 왕을 막아 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마물 왕을 죽일 수 없었다.
단지, 마물 왕을 이 유적에 가둔 것뿐이었다.
그리고, 2 왕자는 마물 왕을 지상으로 끄집어낼 작정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됐다!”
2 왕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그그그긍.
결국, 유적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