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제15편 충성 맹세 (1)
이길 작정을 하고 보니, 내 능력을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 보고 있는 기사들은 모를까 직접 검을 맞대는 단장에게는 들킬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하지만, 들킬 것을 걱정하며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카아앙!
빗살같이 내지른 검이 단장의 검에 막혔다.
거대한 검이 내 검을 튕겨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다음 공격을 이어나갔다.
튕겨 나간 반동에 마나를 실어 방향을 바꾸고.
다시 반대편으로 검을 찔렀다.
번개 같은 속도에 단장의 표정이 바뀌었지만, 단장은 슬쩍 손을 움직이는 것으로 내 검을 막아 냈다.
단장의 대검이 워낙 컸기에 막는 것도 그만큼 쉬웠다.
캉!
다시 막힌 검.
하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검이 허공에서 막혀 버렸지만, 상처는 이미 난 상황이었다.
살짝 구멍이 난 옷과 피부.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비쳤다.
단장의 눈이 커졌다.
“이건,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능력인데?”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피부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고, 단장은 바로 어떤 능력인지 알아냈다.
하기야, 왕궁에 있었으니, 왕의 처가 쪽 능력은 쉽게 알아챌 만했다.
그래서 단장과의 대련 때는 숨겨왔었던 능력이었지만, 이번에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
“잘못 보셨습니다.”
대신 말로는 부인을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괜한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부인 정도는 해두어야 했다.
부우우웅.
내가 부인하는 사이, 거대한 검이 밀려 들어왔다.
저 커다란 검이 움직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검이 지나가고 소리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검을 피한 뒤였다.
나는 단장이 팔을 휘두르는 순간, ‘마나 감응력’으로 미리 알아차렸다.
전에는 마나가 부족해서 단장의 마나와 근육의 움직임을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검의 풍압에 몸이 밀릴 지경이었지만, 나는 검이 지나가는 순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단장의 코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기 어려운 거리.
나는 반대편 주먹을 하늘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콰앙!
휘청 뒤로 물러서는 단장.
그의 턱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다 입술에 비치는 피.
“단장 얼굴이!”
기사들이 단장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 단장 얼굴에 상처 입는 거 처음 봐!”
“와! 저 얼굴에 상처를 낼 수도 있었던 거였어?”
뭔가 내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보다, 단장의 얼굴에 손을 댔다는 것을 놀라는 것 같았다.
단장이 대검을 크게 휘두르고는 침을 뱉었다.
피 묻은 침이 바닥에 튀었다.
“퉤! 젠장 얼얼하잖아.”
그는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능력은 둘째치고, 확실히, 달라졌군. 전투를 경험해서인가…….”
그는 다시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의 몸에서 폭포수처럼 밀려 나오는 기세.
마나처럼 보이는 것도, 힘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자세가 마음가짐과 경험이 모두 모여, 기세가 되어 나를 압박했다.
전쟁터에 휘몰아치던 광기와는 또 다른 압박.
확실히, 왕국 제일의 기사는 다른 기사와 달랐다.
하지만, 이런 기세는 다른 곳에서도 받아 보았었다.
그것도 더 큰 압박을.
나는 검주와의 싸움을 떠올리며, 기세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얕본 게 맞아.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승부를 볼만해.”
한걸음 씩 다가오는 내 모습을 보고 단장은 검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아직 질 생각은 없어.”
말과 함께 이번에는 단장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 * *
흩날리는 흙과 먼지.
기사의 눈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두 사람의 움직임.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들려오는 충돌음과 핏줄기.
단장은 중전차처럼 검을 휘두르며 어린 기사를 압박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린 기사는 단장의 검을 모두 피해냈다.
거기다, 그 짧은 틈에 반격까지 넣고.
구경하던 기사들은 중반 이후에는 두 사람의 검술을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승부의 향방 정도는 떨어져 있어도 보이는 법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한 기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기사가 턱을 긁적였다.
“밀리는 것 같기는 한데…….”
“단장이 덩치가 커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제대로 된 상처는 하나도 없었잖아. 거기다 단장은 한방이면 끝날 테니까.”
그의 말대로 단장이 입은 상처는 옷과 피부 위에만 살짝 그어진 상처였다.
거기다, 단장은 아직도 무식한 속도로 저 큰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 한 방에 역전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기사의 말에 바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장이 이렇게 상처를 입었던 적이 있었나?”
어쨌거나, 기사들의 말대로 단장도 제대로 된 상처를 입지 않고 있으니, 싸움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10분, 20분, 30분.
어느덧 단장이 말했던 시간을 넘어갔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움직임은 느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싸움은 끝이 찾아왔다.
콰아아앙!
검으로 땅이 박살 내는 소리가 들리고, 흙먼지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싸우던 소리가 멈추었다.
흙먼지가 바로 흩어졌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손을 쓴 것이었다.
흙먼지가 흩어지고, 드러난 광경은 혹시나 했던 기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마지막 소리와 흙먼지는 단장이 만든 것이었다.
깊게 팬 땅을 반쯤 가르며 박혀 있는 거대한 검.
그 검은 단장의 검이었다.
어린 기사는 그 앞에서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딱 봐서는 누가 이겼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단장의 가슴에 그어진 가느다란 선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갑옷이 갈라지고, 그 사이에 피가 맺힌 긴 선.
알렉스가 단장의 공격을 피하고 가슴에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었다.
조금만 깊이 들어갔으면 크게 다치었을 상처였다.
결투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승부가 난 것이었다.
연병장은 조용했다.
다들 난감한 얼굴로 단장을 쳐다보았다.
기사들도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었다.
물론, 그들도 단장이 어느 정도 봐주어서 공주 쪽 편을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었다.
기사들도 중립을 마냥 지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단장도 여러 번 그런 기색을 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승부를 내버릴 줄이야. 그것도 단장이 지는 쪽으로.
기사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단장은 자신의 검과 눈앞의 기사를 번갈아 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대에게 30분을 버티라는 소리를 했다니.
만용도 그런 만용이 없었다.
물론, 이렇게 빨리 성장하리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지만, 어차피 기사의 명예는 결과로 증명하는 법이었다.
더구나, 부하들은 보지 못했지만, 승부는 더 확실하게 난 상황이었다.
그가 큰 기술을 걸기는 했지만, 이렇게 검이 땅에 파묻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휘두른 검이 상대의 검에 휘말려 더 빨라졌고, 그의 제어를 벗어났던 것이었다.
결국, 검은 땅에 박혀 버렸고, 상대는 그의 검을 밟고 서서 자신의 가슴에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그것도 딱 피부만 갈라질 정도로.
이 정도면 완패였다.
물론, 실전이 아니라서 손해를 본 면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확실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확실히 졌군. 패배를 인정하지.”
그의 말에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가지 뜻이 담긴 한숨이었다.
무슨 뜻이 담겼는지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한숨을 받아들였다.
환호성을 받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여기 있는 기사들은 모두 단장을 따르던 기사들이었다.
여기서 박수를 받기는 어려웠다.
“좋아, 도시 안은 우리가 정리하지. 모두 움직여!”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단장은 바로 일을 진행했다.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일까?
모여있던 기사들은 바로 움직였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사들.
그들은 모두 수도에 남아 있는 1 왕자의 수족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었다.
연병장에는 금방 단장과 나, 그리고 세우타 공작만 남게 되었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공주에게 가려고 했지만, 단장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서 뿌려지는 마나.
그 마나는 방음벽이 되어 우리를 감쌌다.
“해야 할 일을 했으니, 이제 궁금한 것을 풀 차례인 것 같은데?”
좀 더 빨리 도망쳤어야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들킬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다.
“우선, 그 능력들은 뭐지? 능력이 하나가 아닌 것 같은데.”
단장의 말에 세우타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노인도 본 건가?
노인의 손을 보니,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당당했다.
그는 나와 공작의 대련을 보기 위해 반지를 써먹은 것이었다.
단지 싸움을 잘 보기 위해 반지의 마나를 뽑아 쓰다니.
어이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덕분에 내 능력들도 보게 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보니, 더는 능력을 숨기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숨길 생각도 없었다.
내전이 시작된 뒤부터 나는 내 능력을 하나씩 드러내려고 했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내전에서 이름을 드러내려면 그만큼 실력을 드러내야 했다.
더구나, 이번 내전의 결과로 작위를 받게 될 텐데, 나는 ‘서자’라는 약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약점을 지우고, 제대로 된 작위와 영지를 받으려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주어야 했다.
물론, 모두에게, 모든 능력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부분만.
그렇게 해서 내 위치를 다질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싸울 때마다 내 능력을 드러냈다. 실적을 쌓고, 능력을 보이고.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 내 실력을 드러내야 했다.
“네, 다중 능력자입니다. 그동안 숨겨서 죄송합니다.”
공주가 다중 능력자라는 것을 알린 덕분에 사람들은 다중 능력자라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에 놀란 듯했지만.
“하지만, 아무리 봐도 능력 두 개가 아니던데…….”
세우타 공작은 내 말에 투덜거렸다. 하기야, 공주도 능력이 두 개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내전 중이라, 비밀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에는 세우타 공작도 단장도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단장은 거기서 질문을 끝내지 않았다.
그가 묻고 싶었던 것은 능력이 여러 개라는 점이 아니었다.
“나는 다중 능력자 자체로 뭐라 하는 게 아니다. 싸우는 중간에 보였던 네 능력 때문이다. 그건 왕실…….”
나는 예의 없게도 단장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까지 알아차리다니.
레벨이 올라서 빛을 숨길 수 있었는데, 싸우는 상대에게는 숨기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가 왕족과 같이 지냈기 때문일까?
“아닙니다.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지금 공주의 호위 기사. 그레시아 공작의 ‘서자’입니다. 왕실에 위해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내 말에 단장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라는 말이지. 알았다. 그렇게 알고 있지.”
음. 뭔가 잘못 전달한 건가?
뭔가 대답하는 뉘앙스가 이상했지만, 그냥 넘어간다고 했으니, 더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또 뭐가 있었어?”
옆에서 노인이 계속 물어보았지만, 단장도 나도 그 뒤로는 ‘마나 감응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