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제14편 수도 입성(2)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어.”
그의 방에 마주 앉은 뒤, 기사단장이 나에게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앉은 의자도 맞춤 제작인 듯 다른 의자보다 커 보였지만, 그가 앉아 있으니 작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실 기사단장.
거인에 가까운 저 커다란 기사가 노려보고 있으니, 공국왕과 다른 압박감이 절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늦지 않은 정도죠.”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그 압박감을 흘려보냈다.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이 얼마인데…….
이 정도 압박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뻔뻔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단장은 눈썹을 찡그렸다.
음, 이건 좀 데미지가 있었다.
압박은 흘려보낼 수 있어도 저 덩치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은, 보기만 해도 심장이 쫄깃해졌다.
공포 영화를 보는 기분이려나.
“그런데, 여길 왜 찾아온 거지? 뭔가 협상하려면 성벽 위에 진을 치고 있는 제1 왕자의 기사들에게 해야 하는 것 아냐?”
단장은 내가 온 이유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딴소리를 했다.
“거기다, 여기 왔다는 것은 성벽을 몰래 넘었다는 이야기일 테고, 왕국 기사가 수도 성벽을 몰래 넘는 것은 큰 범죄행위인데 말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설마, 왕실 기사단이 수도 치안을 맡아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 건가.
아무래도 단장은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단장과 왕실 기사단과 친하다는 이유로 또 이런 일을 맡게 되었는지.
호위 기사를 기간제로 할 생각을 한 게 잘못이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뽕을 뽑힐 줄이야…….
아무래도 공주를 얕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왕실 기사단을 움직여서 성문을 열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수도로 들어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거기다, 수도의 시민이 공주에게 스스로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왕위에 오를 때도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단장은 삐뚜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툭 하니 말을 내뱉었다.
“기사의 성 앞에서 왕국 기사들끼리 싸우라는 건가?”
이미, 얼마 전에 제1 왕자와 제2 왕자의 기사들이 신나게 치고받았었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단장이 그 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게 성벽을 피범벅으로 만드는 공성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내 말에 단장은 입을 닫았다.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보셨겠지만, 공국왕도 공주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수도의 백성들도 기사단이 문을 열면 기뻐할 것입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공주님이 지나온 행적은 충분히 훌륭했다.
세력을 모아 수도로 향하다, 이피로스 왕국의 침공을 듣고, 말을 돌려 침공을 막아내고.
공국이 제국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에 이피로스 왕국군을 속이고 말을 달려 공국을 제국의 손에서 구해냈다.
그리고, 공국을 수하로 들이고 이렇게 수도로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 내막은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건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소식은 듣고 있어. 공주님이 잘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네놈이 많이 도와주었다는 소식도 들었지.”
아니, 그보다 좀 더 알고 있었나?
“하지만, 왕실 기사단은 내전에 중립을 지켜야 해.”
이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틀려버린 전통이었다.
왕실 기사단의 반이 제1 왕자를 따라갔다.
거기다 남은 기사단도 그저 단장을 따라 여기에 남은 것일 뿐이었다.
그 가운데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중립이란 것은 단장과 고문만의 생각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단장도 내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꺼낸 말일 뿐이었다.
이미 내전이 벌어졌는데 저런 말로 회피를 하는 것은 기사답지 않았다.
이번에도 뭐라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내 표정에는 그게 드러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무시당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단장은 내 얼굴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런, 실수했다. 사람을 꼬시러 와서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다니.
발레아가 봤다면 평생을 놀릴만한 실수였다.
“뭐, 네 표정대로 이건 핑계에 불과할지도……. 그래도 뭔가 계기가 있어야 다들 이해할 테니까.”
어라? 이거 전화위복인가?
그런데, 계기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
단장이 말을 돌릴 만한 계기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사니, 기사답게 하지. 다른 기사들 앞에서 나와 대련을 하자. 30분 이상 버티면 성벽의 문을 열어주지.”
단장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럴듯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장의 말대로 기사다운 이야기랄까.
대련으로 정한다니, 왕실 기사들도 이건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시간도 30분이라.
내가 그와 처음 싸웠을 때 15분 정도 버텼나?
30분이라면, 단장이 승패를 조절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할만했다.
아마도, 살짝 봐주면서 30분 정도 싸우다 끝낼 생각일 것 같았다.
단장은 계기 말고도 나와 대련을 하려는 이유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이유까지 고민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나는 반색을 하고는 단장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버텨내면 왕실 기사단이 공주님을 지지하게 되는 겁니까?”
아쉽게도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끝이다. 아직 소문만 들어왔을 뿐 공주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중립에 관한 생각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이런, 좋다 말았다.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왕실 기사단이 도와주면 다른 왕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확률도 엄청나게 올라가고, 공주의 권위도 더할 나위 없이 높아질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어나지. 대련하려면, 기사들도 불러야 하니.”
하지만, 나는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잠깐만요, 대련에 한가지 내기를 더 추가했으면 하는데요.”
“추가?”
“네, 30분을 버티면 문을 열어주신다고 했으니, 제가 이긴다면 공주님을 지지해주시는 것으로요.”
내 말에 단장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나를 이긴단 말인지…….”
단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는 내 제안을 호쾌하게 받아주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혹시라도 네가 나를 이긴다면 공주에게 왕실 기사단이 충성 맹세하는 게 문제가 될 리도 없을 테니.”
어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어쨌거나, 내 제안이 수락되었으니, 나도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단장이 밖으로 나가 다른 기사에게 몇 마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다.
“단장과 공주 호위 기사 알렉스 기사의 대련이다! 모두 모여!”
이야기를 들은 기사들이 사방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기사들은 금방 모여들었다.
다들 기사단 숙소와 그 근방에 모여 있었다.
전에는 수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사단은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수도 방어에 소외되어 있었고,
수도의 시민들은 문과 창문에 못질하고 집에 박혀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치안을 지킨답시고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기사단 숙소 앞 공터.
기사단의 연병장에 남은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오, 간만의 대련이군요!”
“오랜만이야! 알렉스 공자!”
“또, 키가 큰 것 같은데?”
“어라, 다들 아는 거야?”
모여든 기사들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남아 있는 기사 중에는 아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공국을 같이 다녀온 기사들도 있었고, 공주의 호위와 단장의 일, 그리고 세우타 공작 일로 본 기사들도 있었다.
세우타 공작도 양반은 아니었다.
속담을 꺼내기에는 이상했지만, 그를 떠올리자마자, 지팡이를 짚고 연병장에 나타나는 것을 보니, 전생의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우타 공작이 나를 보고 지팡이를 흔들었다.
“슬슬 때가 된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하고는 싱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기사들은 알아서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기사들은 순식간에 원형으로 둘러싸 대련할 장소를 만들어 버렸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안심할 수가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는 과거 어떤 시간대에서도 나와 싸웠던 사람들은 없었다.
확실히 그런 기사들은 전부 제1 왕자와 함께 떠난 모양이었다.
나는 대검을 들고, 기사들이 만든 대련장 가운데 섰다.
나는 대검만 손에 들고, 다른 무기는 유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목걸이도, 반지도, 신검도, 단검도.
이번 대결에는 유물의 도움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솔직히 기사단이 수도의 문만 열어주어도 충분했다.
단장의 배려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고.
물론, 이기면 공주님을 지지하겠다는 내기가 걸려있었지만, 이 대련에 편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보여주고 싶었다.
짧은 실전이었지만, 그 실전을 경험한 내 검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많은 검술을 보고, 경험해서 하나로 묶은 나였지만, 그건 대련과 훈련일 뿐이었다.
확실히 전쟁은 대련과 달랐다.
수십의 기사와의 차륜전도 평범한 대련과 달랐고, 수백, 수천에 둘러싸인 전투는 일대일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거기다, 검의 주인이라 불리는 투레 백작과의 결투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련이 시작되기 전, 잠시 정보창을 불러보았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육체 최적화 : 레벨 (30/30)
- 마나 회로 구축법: 레벨 5
- 마나 감응력: 레벨 3
- 장비 소환: 레벨 1
- 마나 방출: 레벨 1
< 비인가 능력 >
- 마나 유형화: 레벨 2
- 사자 회귀: 레벨 3
< 능력 부여 >
- 상태 보정: 최적의 신체
육체 최적화가 최대한도까지 올라갔고, 마나 회로 구축법도 두 단계가 올랐다.
마나 감응력도 한 단계가 올라, 어이없게도 이 왕국에서 마나 감응력은 내가 제일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실력이 늘어난 것은 이 정보창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유물을 쓰지 않고도, 목걸이를 쓰지 않아도, 왕국 최강의 기사인 왕실 기사단장과 싸워 볼 만했다.
단장이 거대한 검을 들고 내 앞에 섰고, 나도 대검을 들고 그를 가리켰다.
나는 묶어놓았던 마나를 풀어놓았다.
파아아앙!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옷자락이 나부꼈다.
드디어 순수한 마나가 현실에 영향을 줄 정도가 된 것이었다.
“맙소사!”
“윽!”
주변에서 놀란 신음이 들려왔다.
다들 내가 이 정도 마나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단장의 표정도 달라졌다.
파파파팟!
스파크, 마나의 충돌로 만들어진 불꽃은 정확히 단장과 나 사이에서 튀어 오르고 있었다.
마나량은 동일하다는 소리였다.
“이 짧은 시간에 이 정도까지 마나를 끌어올린 건가?”
“마나 만이 아닙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은 마나가 아니었다.
나는 검을 잡고, 단장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전쟁으로 단련된 내 검술이 단장을 향해 펼쳐졌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날, 초대 왕의 검술이 드디어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