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제13편 수도 입성(1)
무슨 일인지, 공주가 출발을 서둘렀다.
대공녀는 아쉬워했지만, 왕자들의 싸움이 끝나기 전에 수도를 빼앗으려면 서둘러야 하는 게 맞았다.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수도를 떠났다.
이피로스 왕국군을 속이기 위해 병력을 남겨놓은 덕분에, 공국 수도를 떠나는 공주의 병력은 많이 줄어 있었다.
하지만, 떠나는 기사와 병사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공국왕이 자신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지원해 준 것이었다.
공국군의 지휘관은 왕세자인 안토니오. 그는 출발하기 전 공주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공국군의 합류로 더 규모가 불어난 연합군은 단풍이 깊이 물든 가을 늦게 수도를 향해 다시 출발했다.
우리가 출발한 그 시각에도 제1 왕자와 제2 왕자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1 왕자가 초전의 승리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결정적인 승부는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2 왕자는 뒤로 물러서면서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제1 왕자의 진격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는 듯했다.
이미, 공국왕이 다녀갔던 길을 따라, 우리는 수도로 나아갔다.
한번 공국왕이 미리 정리한 영지들이라, 방해하는 영지들은 없었고, 우리는 싸움 한 번 할 것 없이 왕국의 수도 근처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 * *
공주의 부대가 수도에 다가가는 그때.
제2 왕자 두아르도는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보며 손톱을 짓씹고 있었다.
“젠장, 저 미친X은 멈출 생각이 없는 건가? 이렇게 다 박살 내고 진격해오면 나중에 나라를 다 차지해도 뭐가 남는데!”
그는 제1 왕자의 군대를 표시하는 붉은색 말로 가득 찬 지도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도 위의 제2 왕자의 세력을 표시하는 말들은 계속 제1 왕자의 말로 바뀌고 있었다.
첫 패배 이후 계속된 일이었다.
물론, 제2 왕자가 항상 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제1 왕자가 직접 참가하지 않는 전투와 후방 기습 같은 자잘한 전투들은 이긴 적도 많았었다.
하지만, 제1 왕자가 직접 군을 이끄는 적 본대는 한 번도 제대로 막을 수가 없었다.
제1 왕자가 저렇게 선두에서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으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제2 왕자의 전략과 작전은 제1 왕자의 맹목적인 진격에 매번 박살이 나고 말았다.
얼마나 날뛰었으면, 제1 왕자는 양쪽 군 모두에게 모두 초대 왕의 재림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더구나, 제1 왕자가 끌고 온 왕실 기사단의 돌파력도 큰 문제였다.
제2 왕자는 왕국군의 장교들에게 기대를 걸었었지만, 제1 왕자는 같이 온 전통 귀족들에게 그들을 상대하게 해버렸다.
결국, 제2 왕자에게는 왕실 기사단을 막을 만한 기사단이 없었다.
“반이라도 떼어낸 게 다행인 건가…….”
왕실 기사단이 전부 제1 왕자에게 붙었다면 싸움은 예전에 끝났을지도 몰랐다.
물론, 수도에 남아 있는 나머지 왕실 기사단이 제2 왕자를 지지했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제2 왕자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 기사들은 왕실 기사단장을 따르는 기사들이었다. 산적같이 생긴 기사단장을 떠올리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진격이라 일반 병력 손실은 저쪽이 더 큰데 이 모양이라니…….”
계속 죽어 나가도 제1 왕자의 병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병력이 줄어드는 것은 제2 왕자 쪽이었다.
눈치를 보던 영지들이 점점 제1 왕자 쪽으로 붙어 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패배 때문이었다.
제2 왕자가 계속 지고 있으니, 중립을 지키던 영지들은 제1 왕자 편에 붙고, 제2 왕자 편이었던 영지들도 슬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제1 왕자는 병력 문제 전에, 군량이 떨어져서 진격이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제1 왕자의 군대는 계속 마음을 바꾼 영지들에게서 보급을 받고 있었다.
손실된 병력도 마찬가지였고.
줄지 않는 병력과 군량을 믿고 제1 왕자가 저렇게 무식하게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한 번만 제대로 꺾어주면 대세를 뒤집을 수 있을 텐데…….”
제2 왕자는 깨물고 있는 손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왕자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다 제국과 손을 잡는 미친 짓까지 하다니. 정말 뒷일은 생각도 안 하는 걸까?”
제2 왕자는 도무지 제1 왕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내전 중이니 다들 의심만 품고 말을 안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전 뒤에는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왕국을 침범한 이피로스 왕국도 문제였지만, 공국을 공격한 제국군이라니.
승자의 기준으로 역사가 쓰인다고 하지만, 저 일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말, 왕이 되고 싶기는 한 건가…….”
제2 왕자로서는 형의 목적이 왕좌가 아닌 다른 진정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지도를 보며 그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전령이 들이닥쳤다.
“급보입니다!”
예의 없는 짓이었지만, 계속된 싸움으로 모두 그런 예의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하지만, 왕자는 들이닥친 전령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예의 때문이 아니었다.
이렇게 전령이 들이닥쳤을 때마다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공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국이 제국군을 격퇴했다고 합니다. 제국군은 물러났고, 공국군은 아이샤 공주의 군대에 합류해 다시 수도로 진격 중이랍니다!”
전령이 전해준 말에 왕자는 입을 딱 벌렸다.
“뭐라고?”
도대체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제국군이 물러나다니.
공국군이 소식도 오기 전에 회군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공국 수도가 함락되기 전에 도착한 것일까?
하지만, 분명 시간이 안 맞을 텐데. 공국에 남아 있던 병력이 제국군을 막았을 리도 없었다.
당연히 공국 수도는 점령될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었다.
왕자는 전령이 건네준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들은 것보다 더 어이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궁에 잠입한 기사들이 전멸하고, 공국에 남아 있던 병력과 그레시아 공작의 지원군이 수도를 지켜냈다고?”
편지에는 이야기 속에나 나올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공작의 군대는 이피로스군에게 묶여있었던 것 아니었나?”
거기다, 공주의 지원군이 어떻게 공국에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아예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계속 튀어나오는 이 기사는 도대체 뭔데.”
그 사이에, 영웅적인 역할을 했다는 기사 이야기가 계속 나왔지만, 왕자는 그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좋아, 이해한다는 것은 둘째치고, 공작의 군대와 공국군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말인 거지?”
왕자는 아직도 공주 주위에 모인 귀족과 군대를 공주의 군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어린 공주를 생각하면 공주는 그레시아 공작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당연히 모인 귀족들도 공작이 세력이고, 공주의 군대라고 불리는 병력들도 공작의 군대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국군이 거기에 합류하다니.
생각해보면 이건 또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나타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뒷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좋아, 형님에게도 이 소식은 갔겠지? 제국도 물러갔으니 이제는 진짜 회군밖에 없을 테지.”
제국이라는 뒷배를 믿고 밀고 들어온 바람에 엄청난 피해를 보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의 세력은 엉망이 되었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제1 왕자가 물러난 뒤에 다시 세력을 갖추면 그만이었다.
거기다가, 강성해진 저들 연합군과 제1 왕자가 서로 싸워서 둘 다 약해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오랜만의 좋은 소식에 왕자는 자리에 앉아 잔에 술을 따랐다.
그동안, 두통을 잊기 위해 마셨던 술이었다.
마나가 아니었으면 술중독자가 될 정도로 마셨었는데…….
이번만은 편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왕자의 즐거운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땡! 땡! 땡!
시끄러운 종소리가 그의 휴식을 방해한 것이다.
이곳은 왕자가 군대의 사령부로 삼은 작은 영지의 수도원.
이 종소리는 이곳 수도원 종탑의 종소리였다.
위험할 때가 아니면 치지 말라고 한 종소리였다.
그 종소리가 났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예상대로 기사 하나가 문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조금 전에는 전령이 좋은 소식을 가져왔었지만, 이번에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제1 왕자 군이 대대적으로 진군 중입니다. 모든 부대가 움직였습니다. 제1 왕자는 왕실 기사단을 이끌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뒤도 안 생각하는 총공격이라니.
이건 끝장을 보자는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조금 전에 공국 놈들과 공작의 군대가 수도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미친 인간은 그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건가!”
아니, 듣지 않았다면 이렇게 달려들 리가 없었다.
“맙소사. 수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나랑 끝장을 보겠다는 건가.”
수도를 점령당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것인지, 동생을 먼저 끝장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제1 왕자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나를 먼저 쓰러뜨리고, 수도에서 다른 놈들과 마지막 승부를 볼 생각인가?”
제2 왕자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이렇게 얕보이다니.
이렇게 당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당하려고 낯선 사람에게서 능력을 얻은 게 아니었다.
“뒤가 없이 싸우겠다면, 좋아! 그렇게 해주지.”
제2 왕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령을 보내! 모두 북서쪽으로 후퇴한다!”
“북서쪽에는 산맥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넵! 알겠습니다!”
전령은 제2 왕자의 말에 의문을 표했지만, 살기가 가득 실린 제2 왕자의 눈을 보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 * *
제1 왕자와 제2 왕자 간의 싸움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수도가 다른 이들에게 점령당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제1 왕자는 제2 왕자를 향해 진격을 명했고,
제2 왕자는 그런 제1 왕자를 피해 다른 영지가 아니라, 대륙을 가로지르는 북부 산맥으로 군대를 후퇴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둘 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략과 전술이었고, 그들의 행동에 왕국 서부는 개판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시각 나는 왕국 수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공주의 군대가 수도를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
군대는 지금 수도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직 수도에 있는 제1 왕자의 군대는 항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의 수도 많지 않았고, 수도의 시민들이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제로 징집이 되어 성벽을 지키는 병사의 숫자는 작지 않았다.
제1 왕자가 남긴 기사도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병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지금 성벽에 진을 치고 있는 병력만으로 충분히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무력으로 수도를 점령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왕위를 차지한 뒤의 명예를 위해, 다른 왕자와의 싸움에서 수도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라도, 무혈로 수도를 얻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내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다.
몰래 담을 넘어 왕실 기사단의 숙소까지.
물론, 기사단의 숙소에서는 몰래 움직이는 것을 들키고 말았지만, 그들은 내가 기사단장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기사단장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