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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87화 (287/563)

제287화

제12편 내 호위 기사입니다.

성벽 위에 휘날리는 공국왕의 깃발들.

등 뒤에 깃발들을 느끼며, 나는 바닥에 꽂아 놓았던 검을 뽑아 등에 멨다.

그리고, 백작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공국의 왕이 돌아왔으니, 이제 검주님께서 군대와 함께 공격하셔도 상관없을 듯합니다.”

말을 끝내고 몸을 돌렸다.

“허…….”

뒤에서 불만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백작은 등을 보이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훌륭한 기사여서이거나, 검의 주인이라는 명예 때문일 터였다.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마나를 무시하고 성벽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성벽 위의 깃발들을 보았다.

성벽 위에 휘날리는 깃발을 보니, 다른 나라의 깃발인데도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이제는 급한 것이 없으니, 성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차례로 밟으며, 몸을 솟구쳤다.

그렇게 성벽을 밟고 오르니, 곧 성벽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성벽 위에는 수많은 깃발과 여러 기사가 서 있었다.

공국 쪽 기사들이었다.

다만, 그 기사들은 숫자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거기다,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반나절 이상 빨리 온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공국왕은 일부 기사만 데리고, 수도로 말을 달린 것이었다.

위험한 짓이었고, 지금도 들키기라도 한다면,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승부수는 제대로 먹힌 것 같았다.

공격 준비를 하던 제국군이 깃발을 보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검의 주인도 어느새 사라졌다.

역시, 공국왕의 명성은 작지 않았다.

그 공국왕이 나를 보고 있었다.

공국왕만 보는 게 아니었다.

그가 데려온 기사와 성벽 위의 모든 이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란 얼굴과 감탄한 얼굴, 그리고 감동한 얼굴까지.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리개를 올리려다가 그냥 손을 내렸다.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니 정치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평범한 배려라고 해도 괜찮겠지만.

나는 공국왕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보고했다.

“다행히도, 적을 막으라는 왕의 명령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명령을 한 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뒷일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무리.

공국왕에게 보고를 한 뒤에 나는 한쪽 손을 가슴에 올리고, 크게 외쳤다.

“왕과 공국에 영광을!”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며, 사방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촤좌좌좌좍!

그리고, 기사들은 검을 높이 쳐들고 내 말을 따라 했다.

“왕과 공국에 영광을!!!”

기사들의 외침이 성벽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니, 수도 전체, 적군까지 들었을 만큼 큰 소리였다.

사람들은 감동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장엄한 분위기 속에 공국왕은 말없이 무릎 꿇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뿜는 기세가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니,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잘했다. 수고한 기사에게는 내가 따로 치하하겠다.”

공국왕은 내가 만든 판을 깨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서 높게 쳐들었다.

“공국의 왕인 내가 돌아왔다! 이제, 적은 내 땅에 한 걸음도 들이지 못할 것이고, 더는 내 백성에 손을 대지 못할 것이다!”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던 왕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더니, 말을 끝마쳤다.

“앞으로 공국은 나와 기사들이 끝까지 지킬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공국왕의 연설에 함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공국왕의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도,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었다.

공국왕이 공국을 지킨다는 말은, 카를로스 왕국의 왕위를 노리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환호성에 공국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 *

제국군은 하루 더 성벽 앞에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다른 깃발이 성벽에 걸린 것을 보고, 발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깃발이었다.

다음 날, 공작이 본대를 이끌고 공국에 도착한 것이다.

그사이에, 공국군들도 차례로 수도에 진입했었다.

피난 갔던 사람들도 하나둘 군대와 함께 돌아왔고, 텅 비었던 수도는 돌아온 사람들로 조금씩 다시 채워지는 중이었다.

제국군이 떠난다는 소식은 바로 수도 전체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성벽으로 향했다.

군인과 기사들도 사람들이 성벽에 오르는 것을 막지 않았다.

위험할 것을 알고도 돌아온 사람들이었고, 이곳에서 죽은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우들이었다.

모두, 적이 물러나는 광경을 지켜볼 자격이 있었다.

멀리, 제국군이 등을 돌리며 떠나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욕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껴안았다. 공국군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기사들도, 동부의 다른 기사들도 지금은 모두 그들의 기사들이었다.

공국이 수십 년 만에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이었고, 우호국 이상이었던 제국이 공국의 진정한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제국군이 물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돌아온 사람들과 군인들은 힘을 합쳐서 전투로 망가진 수도를 복구해 나갔다.

사람들을 치료하고,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고, 무너지고 부서진 건물을 고치고, 피 묻은 거리를 닦는 등,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의 군대도 그 일을 도왔다.

그렇게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공국왕과 공주, 그레시아 공작,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곳은 공국왕의 집무실 옆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두 어른과 어린 소녀 한 명이 담소를 나누는 편안해 보이는 자리였지만, 알고 보면 내전 당사자들의 회담 자리였다.

다행히 궁의 고용인들은 대부분 무사했고, 제일 먼저 돌아왔기에 회담의 준비는 완벽했다.

공주를 위한 차와 다과, 공국왕과 공작을 위한 최고급 와인까지.

훌륭하게 회담을 준비한 하녀들과 집사장은 응접실 한쪽에 대기하고 있었었지만, 호위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를 믿고 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커다란 덩치에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공국왕과 귀족적인 분위기의 공작, 그리고 귀여운 소녀인 공주까지.

전혀 안 어울리는 세 사람이었지만, 회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세 사람이었지만, 그 시간은 공국왕이 꺼낸 말로 끝이 났다.

“우선 감사를 드리오. 공주에게도 공작에게도. 구두로 한 약속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다오.”

공국왕이 처음 꺼낸 말은 지원에 대한 감사였다.

당연한 감사였지만, 일국의 왕이 한 감사가 평범한 것일 리가 없었다.

“공주님이 협상하신 덕입니다. 저는 뒤에서 지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한 게 많지 않아요.”

공국왕의 말에 공작도 공주도 겸양을 표했다.

“둘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감사는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하겠군.”

두 사람의 겸양에 공국왕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 비슷한 말을 꺼냈다.

“하하…….”

공작은 난감한 듯 웃었지만, 공주는 그렇지 않았다. 공주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공국왕께서 감사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공국왕은 시선을 돌려 공주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험악한 모습이었지만, 공주는 지지 않고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공국왕은 공주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공주의 객기가 아닌가 했는데……. 작년과는 많이 다르군.”

“그럼, 두 사람에게 감사는 그만하도록 하지.”

공국왕의 말에 그레시아 공작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성벽에서 하신 연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연설에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공국은 카를로스의 왕권 도전을 포기하신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다들 그 연설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확답을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공국왕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수도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왕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무방하오.”

그의 말에 그레시아 공작은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경쟁자가 하나 줄어든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줄어든 경쟁자가 하나밖에 없는 우호적인 경쟁자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당장은 안 좋은 쪽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공작의 표정을 보고, 공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지만,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오.”

제국 때문에 왕위 쟁탈전에서 발을 빼게 되었지만, 공국왕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공국과 나는 공주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소. 지금부터 훌리안 공국은 아이샤 공주가 왕위에 올라가는 데 전폭적인 협력을 할 것이오.”

감사에 대한 보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국 입장으로도 내전이 알아서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다.

“제국이 저 모양인데, 공국을 지키려면 그 두 왕자 중 하나가 왕국을 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적어도, 협상이 가능한 대상이 왕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거기다, 이리저리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면 더 좋고.

공주가 전과 달라졌다지만, 그래도 다른 두 왕자보다는 훨씬 좋은 상대였다.

“거기다, 그레시아 공작 혼자 공주의 후견인을 자처하게 둘 수도 없으니.”

공국왕은 그레시아 공작을 보며 씩 웃었다.

“그래 주신다면야 저희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공국왕의 말에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공국왕의 말대로라면, 괜히, 공국을 도와준다고 투덜거리던 다른 귀족들의 입도 전부 틀어막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 중립을 지킨답시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던 영주와 귀족들도 생각을 바꾸게 만들 수 있었다.

마지막 말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공국왕의 말대로라면 이제 공주와 자신의 세력은 제1 왕자에게도, 제2 왕자에게도 꿀리지 않게 된 것이었다.

공국왕의 말 덕분에 응접실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졌다.

그 좋은 분위기 속에서 공국왕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도 대신이라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

공국왕답지 않게 뜸 들이는 말에 공작이 재촉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요.”

공작은 웬만한 것은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공국과 함께 제국과 한판 붙어 달라는 소리라도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국왕의 부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알렉스 기사를 내 딸의 호위 기사로 보내주면 어떨까 하는데…….”

“알렉스를 말입니까?”

공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동시에 차를 마시던 공주의 손이 우뚝 멈췄다.

둘 다 표정이 바뀌었지만, 공작과 공주가 표정이 바뀐 이유는 전혀 달랐다.

“알렉스는 공주님의 호위 기사라서 제가 뭐라 요구하기가…….”

공작은 난감한 얼굴로 공주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탓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어렸을 때부터 엇나갔던 아들이었다.

얼마 전에는 아예 공주의 호위 기사라고 선을 그어 버리는 바람에 자신이 지시를 내리기가 어려워졌다.

공작이 공주를 쳐다보고, 공국왕도 그녀를 바라보자, 공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아요. 알렉스 공은 제 호위 기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호위 기사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거기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부드러웠던 응접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

“그리고, 저는 곧 수도로 향해야 하고, 알렉스 공은 저를 호위해야 합니다. 저는 알렉스 공처럼 중요한 기사를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공주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응접실을 떠났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고, 조금 전까지의 어른스러운 행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남은 두 어른은 공주가 떠난 자리를 보고 각자 생각에 잠겼다.

높은 분들이 나를 가지고 이리저리 이야기하는 그 순간.

나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짐을 싸고 있었다.

이제 공국을 떠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국군도 떠나갔는데, 공국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메시지창도 때에 맞춰서 나타나 주었고.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이제, 원래 가야 할 곳.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 기사의 성으로 가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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