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86화 (286/563)

제286화

제11편 공국 방어전 (4)

싸움에서 이기고, 공국의 수도를 지키기는 했지만, 그 대가는 작지 않았다.

“사상자가 삼 분의 일이 넘는다라…….”

물론, 사망자보다 부상자가 더 많고, 포션 덕분에 나중에라도 복귀할 수 있는 기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분명 적은 수는 아니었다.

전생의 군대였으면 전멸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사상자 이렇게 많이 나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벽으로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병력의 숫자가 너무 차이가 났다.

더구나 이 세상은 성벽을 무시할 수 있는 기사나 귀족들이 있기에 성벽의 효과는 전생보다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삼 분의 일이라는 사상사는 분명 선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숫자였다.

“선방은 선방이고, 문제는 오늘 버티는 건데…….”

공국왕의 병력은 아무리 빨리 달려온다고 해도 오늘 밤이나 내일 도착하게 될 터였다.

어젯밤에는 우리 쪽 지원 병력도 도착하지 않았고.

결국, 오늘은 남은 사람들이 공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물러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어제 아침과 같은 장소에 선 채로 공주에게 물어보았다.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제국군 진영 곳곳에 피어놓은 횃불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희미한 제국군 진영을 보며 공주는 나에게 사과했다.

“네. 고집을 부려서 죄송해요.”

어제와 같은 시간이었지만, 여기에는 공주와 나밖에 없었다.

어제 있었던 싸움 탓에 다른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제 전투에 다들 열심히 참여했지만, 다행히 공주도, 우고 기사도, 대공녀도 다치지 않았다.

물론 공주 옆에는 내가 붙어 있었다.

도중에 잠깐 화살을 쏘기 위해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공주 옆에 붙어 공주를 보호했었다.

우고 기사도 열심히 기사들을 지휘했고, 대공녀도 어제 싸움에는 한 손을 거들었다.

그녀가 유물로 만든 방어막으로 제국군의 수많은 화살을 막아 주었던 것이다.

병사들이 예상보다 적게 죽은 것은 모두 그녀 덕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활약해준 덕에 결국, 다들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힘든 것은 제국군도 마찬가지일 테니, 오늘은 하루 정도 쉬어주었으면 무척이나 고마울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슬슬 움직이는 것을 보니, 제국군은 오늘도 싸움을 걸 모양이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제국군을 보며 공주가 말을 이었다.

“군대를 이끄는 자는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이기기 힘들 것 같으면 물러서야 한다는 것도 배웠고요.”

확실히 기사의 나라여서일까?

왕궁에서는 공주에게도 군사학을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싸우다 보니, 물러서지 못하는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물러서지 못하는 때라…….

수도에 남은 사람들 때문일까?

“당장 승패 때문이 아니라, 나를 따르는 사람과 더 큰 미래를 위해, 위험을 각오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공국에 관한 호의로 이곳을 지키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말을 하는 공주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은 서늘한 빛을 머금은 눈빛.

아무리 봐도 12살 소녀의 눈이 아니었다.

그 눈은 대권의 도전하는 승부사의 눈이었다.

“지금이 그때입니까?”

“네! 여기서 버텨 내는 것이 왕국 내전에 분수령이 될 거로 생각해요.”

그 말이 사실일지, 아니면 공주의 망상일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공주는 내 눈에도 스스로 왕권에 도전하는 왕위 계승자로 보였다.

성장을 한 것인지, 그녀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나는 공주의 호위 기사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지켜보겠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 나도 끝을 볼 생각이었다.

“네, 알렉스 공만 믿을게요.”

나만 믿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지금은 의욕을 북돋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말을 남기고, 공주는 기사들을 살피러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나는 혼자서 떠오르는 해를 기다렸다.

가을이 깊어지니, 해가 전보다 늦게 떠올랐다.

그래봤자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그 덕분에 제국군이 조금이나마 늦게 움직이게 되었다.

이런 게 쌓이면 더 많은 시간을 벌게 되겠지.

“결국, 공격 한 번에 뻥 뚫릴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옆에서 레스티가 냉소적으로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는 어제는 중간에 사라지더니, 또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났다.

레스티도 카를로스 왕국인이면서 그는 공국도 왕국도 이렇게 제삼자의 처지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년간 배척을 받아왔던 셀린 교단의 신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용병을 오래 했기 때문일까.

그런 사람이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피난 때문에 신도들의 연락망이 많이 망가져서 그걸 수습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는 이렇게 내가 묻지 않아도 어제 사라졌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만약의 상황에서 몇몇 중요한 분들을 피신시킬 장소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역시 그도 지금 상황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하기야 모르면 이상한 일이었다.

더구나 피신 장소를 마련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곳에 공주나 대공녀를 피신시키고, 공국왕이나 지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잘하셨어요. 그런데, 제국군 쪽 정보는 알기 어렵겠죠?”

내 말에 레스티가 고개를 저었다.

“신도는 있는 것 같았지만,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접근해 보기는 했지만, 신도를 찾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아니, 접촉하려고 하기는 했다는 소리였다.

내 생각보다 훨씬 담대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방안에 앉아서 경매유물을 살펴보고 있었다니.

역시 사람은 두고 볼 일이었다.

“아쉽게도 이틀 전부터 북쪽으로 새들을 날려 보내고 있다는 정도밖에 알려드릴 게 없습니다.”

새라니. 여기도 통신용 비둘기를 쓰나?

어쨌거나 제국 쪽 정보는 얻기 어려워 보였다.

어제, 지휘관을 죽인 뒤의 사정을 알았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과한 욕심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가 뜨고, 아침 식사까지 마친 뒤,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스티는 또 어디로 사라졌고.

“지치지도 않나. 벌써 3일째 공격이라니.”

어제 아침에 보았던 나이 든 병사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나도 제국군의 전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국군의 움직임이 어제와 달랐다.

어제는 기사들이 앞으로 나오고, 백인대로 묶인 병사들이 뭉쳐서 다가왔는데.

오늘은 진용을 갖춘 채로 넓게 퍼져서 다가오고 있었다.

기사들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의문이 가득한 제국군의 전진은 벌판을 반 이상 전진한 채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또 대기.

제국군이 알아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은 좋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국군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전도 반이 지나고, 결국 우리는 왜 제국군이 멈춰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넓게 펼쳐진 제국군의 진영 뒤에서 기사 한 명이 걸어왔다.

막 중년으로 접어드는 귀족답게 생긴 기사였다.

기사는 늘어선 병사들을 피해 가며 진영을 가로질렀다.

그가 지나가자, 병사들도 기사들도 모두 정중한 자세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에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난감함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제국군 진영을 가로질러 오는 사람은 내가 죽기 전에 본 사람이었다.

나를 죽인 사람이기도 했고.

그는 검의 주인으로 불리는, 제국의 백작.

투레 폰 슈폰하임 백작이었다.

분명, 나는 죽기 전에 백작이 제국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들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것은 생각에서 지워버렸다.

그런 그가 왜 저기서 나타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백작은 진영을 빠져나와 벌판 한가운데 섰다.

마치 이틀 전에 내가 제국군 앞에 서서 외친 것처럼, 그도 성벽을 향해 외쳤다.

“나는 투레 폰 슈폰하임이다. 이틀 전, 제국 기사들을 쓰러뜨린 기사를 보기 위해 이틀 밤낮을 달려왔다.”

마나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성벽을 훑고 지나갔다.

성벽 위의 기사들은 그가 이름을 이야기하자 입을 딱 벌렸다.

기사가 검주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국의 기사가 단장과 기사들의 머리를 던져가며 제국 기사들을 모욕했다고 들었다. 그는 자신을 꺾고, 기사들의 머리를 가져갈 수 있는 제국의 기사가 없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아니, 뉘앙스는 비슷하긴 해도 내가 한 말은 저게 아니었다.

거기다, 그 말은 그냥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어그로일 뿐이었다.

그런 어그로에 저런 기사가 딸려오다니.

거기다, 레스티가 봤다는 새가 검주를 불러오기 위한 연락조였던 거였을까?

내가 황당해 있거나 말거나, 투레 백작은 말을 이어갔다.

“그 대답을 하고자, 나 투레가 찾아왔다. 제국의 검주가 공국의 기사를 상대하러 왔으니, 공국의 기사는 내 말에 앞으로 나서라!”

검주라는 말에 이제는 병사도 대공녀도 모두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성벽 위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공녀와 공주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표정을 보니 나를 말리려는 것 같았다.

공주를 보니, 아침에 한 말과 다르게 그냥 물러서자고 말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가까웠다. 조금만 시간을 벌면 될 것 같았다.

공주와 대공녀가 도착하기 전, 나는 유물 주머니에서 투구를 꺼내 머리에 쓰고, 성벽을 뛰어내렸다.

그리고, 대검을 한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대검을 한 손에 들고, 한걸음, 한걸음.

여유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게. 그렇게 백작 앞으로 걸어갔다.

천천히 걸어, 백작 앞에 서니, 백작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젊군. 그런데 풍겨 나오는 기백은 보통이 아니야. 도대체 자네는 누군가. 공국에 이런 기사가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손을 들어 가리개를 내린 투구를 가리켰다.

“얼굴도 가렸는데 알려드릴 리가 없죠.”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고 다시 한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슬쩍 목소리를 바꾸었기는 했지만, 나이를 숨기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군. 하지만, 싸우게 되면 숨길 수는 없을 텐데. 뭐 이길 수 있는다고 믿으면 상관없겠지만.”

백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들고 있던 대검을 땅에 꽂았다.

결투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내가 검을 꽂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틀 전에는 우리 기사들의 머리를 던져댔다고 들었는데. 싸울 생각이 없다고?”

“대공녀를 납치하기 위해 몰래 왕궁에 잠입한 기사들이었습니다. 그 정도 수모를 받을 만했습니다.”

“허…….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군.”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너무 과한 짓이었다. 그리고, 제국에 대한 모욕은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래서 내가 왔으니, 어서 검을 들어라.”

하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계속 싸우자는 말과 거절이 이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모두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이 흐르니, 백작은 점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결국, 백작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강제로 검을 들게 하려는 건가!”

“그래도 안 들 생각입니다. 빈손의 기사를 베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 기사답지 않은 이런 인간이 있다니!”

백작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협박을 했다.

“당장 검을 들지 않는다면 내가 군대와 함께 저 성벽을 공격할 것이다! 당장 검을 들어!”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성벽 위.

보이지 않던 깃발이 높게 솟아 있었다.

공국 왕의 깃발.

그 아래 무섭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언제나 무시무시하게 여겨지던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듬직하게 느껴졌다.

역시, 시간을 번 보람이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백작에게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이제 공국의 주인이 돌아왔으니까요.”

내 말과 함께 수많은 깃발이 성벽 위로 올라왔다.

왕이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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