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제10편 공국 방어전 (3)
해가 진 밤.
제국군은 결국 공국 수도를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공주와 기사단이 늦지 않게 온 덕분이었다.
기사단은 먼저 내가 지키고 있던 관문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혼자서는 막을 수 없는 관문이었지만, 기사 열 명 정도면 충분히 병사들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중간이 끼어드는 기사들은 내가 전부 처리할 수 있었고.
그렇게 관문이 안정화되자, 나머지 기사들이 성벽을 지키고, 수도 안에 난입한 적들을 처리했다.
공주와 기사단이 늦지 않게 온 덕분에 수도를 지킬 수 있었고,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성벽과 관문을 지키던 공국 병사와 기사단은 많이 죽고 말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공국 기사도 성벽 위에서 목숨을 잃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창과 검을 들었던 사람들도 성벽을 넘어온 제국 기사들에게 죽고 말았다.
지금 성벽은 그들 대신 지원을 온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지금도 지원병들이 계속 공국 수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적의 첫 번째 공격을 막았을 뿐이었다.
물론, 저번 삶에서는 첫 번째 공격에 수도가 함락되었었지만, 한번 공격에 실패했다고 제국군이 그냥 돌아갈 리가 없었다.
나는 성벽 위에 서서 불이 밝혀진 제국군 진지를 바라보았다.
싸움에 이겼지만, 아직도 제국군은 많았다. 사기도 약해 보이지 않았고.
솔직히 오늘 전투도 우리가 제국군을 밀어냈다기보다 해가 져서 제국군이 스스로 공격을 멈췄다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물론, 해가 질 때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공주와 기사단을 평가 절하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기사단이 왔다고 우리가 유리해진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같이 제국군 진영을 보고 있던 공주가 내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결국, 내가 온 게 잘못됐다는 말이네요.”
“위험했다는 말입니다.”
호위 기사로서 말은 해두어야 했다.
공주는 10대 초반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혜와 행동력, 그리고 카리스마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구심점인 왕위 계승자로서의 안전 의식은 많이 부족했다.
호위 기사가 있다고 해도, 그녀는 최대한 안전한 곳에 있어야 했다.
솔직히 그녀 성격에 그런 곳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계속 주지를 시켜주어야 했다.
“알렉스 공은 왜 남았는데요?”
“저는 임시 호위 기사입니다만.”
“호위 기사면 내 옆에 있어야죠.”
공주는 열심히 내 말에 반박했지만, 둘의 위치가 달랐다.
결국 그냥 투정일 뿐이었다.
“거기다 임시는 또 꼭 붙이고…….”
뒤이어 작게 중얼거리는 말도 들려왔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공주님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가 부탁을 해서 그런 거니까요.”
대화를 들었는지, 성벽 위로 올라온 대공녀가 공주의 편을 들어주었다.
“대공녀님도 문제입니다. 기껏 안전한 곳으로 피하셨는데 다시 돌아오시다니요. 까닥 잘못했으면 제 고생이 허사가 될 뻔했습니다.”
두 사람이 기사단을 이끌고 온 덕분에 공국을 지킬 수 있긴 했지만, 결과가 좋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내 말에 대공녀가 뜻밖에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사과 인사가 아니었다.
평범한 귀족도 함부로 하지 않는 예의를 다한 인사.
나는 그냥 한마디 투덜거렸을 뿐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대공녀의 행동에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공녀의 말이 들려왔다.
“죄송하고, 감사드려요. 위험을 알려 주시고, 끝까지 남아 저희 공국을 구해 주신 은혜를 공국의 모든 사람을 대신해 저 대공녀 프리다가 감사드립니다.”
큰 목소리는 아니지만, 진심이 담겨있는 말이었다.
대공녀가 감사 인사를 한 곳은 왕궁의 화려한 중앙홀이나 알현실이 아니었다.
벌판에는 아직도 제국의 군대가 불을 밝히고 있는 성벽 위였다.
낮에 있었던 전투의 흔적이 가득한 성벽.
대공녀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답게 꾸며진 모습이 아니었다.
왕궁을 떠날 때 입었던 평범한 외출복이었다.
그 옷도 여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돕느라 먼지가 가득했다.
지금은 왕족의 정식 감사를 받을 만한 장소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진정한 감사는 옷도 장소도 상관이 없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
옆에는 갑옷을 입은 어린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힘든 일도 많이 남아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 이 기억은 남게 될 것 같았다.
* * *
다음날 새벽.
나는 성벽에 붙어 있는 기사들의 숙소에서 잠을 깼다.
작년에 지냈던 곳이었다.
왕실 기사단과 같이 썼었던 그 숙소.
다만, 지금 내가 있는 이방은 그때의 방과는 다른 방이었다.
그때의 방보다 작은 일인실. 선임 기사의 숙소였다.
작년에 내가 썼던 곳은 지원을 온 기사들이 쓰고 있었다.
전하고 완전히 달라진 배려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혼자서 방을 쓰게 된 것은 나의 위치를 실감하게 해 주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확인했다.
어제는 오랜만에 무척이나 힘든 하루였기에 걱정했는데, 역시 마나라는 힘은 대단했다.
체력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근육도 문제없었고, 마나도 가득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후에 갑옷을 입었다.
어제 온통 피를 뒤집어쓴 갑옷이었는데, 아침에 보니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투구는 치워 두고, 방에서 나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아직 세상은 어두웠다.
“기사님!”
성벽 위에 오르니,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가 나를 보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경례를 했다.
“그렇게 안 하셔도 됩니다. 공국 기사도 아닌데.”
“아닙니다. 기사님은 이런 인사 이상을 받으셔야 합니다. 저도 어제 이 자리에서 기사님이 싸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살펴보니, 나이 든 병사의 갑옷과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아직 피가 비치는 것을 보니, 어제 다친 상처들이었다.
눈앞의 병사는 어제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병사였다.
많이들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병사를 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눈앞의 병사는 여기서 경계를 설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서 경계를 설 상처가 아닌데요. 상처부터 치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니.
지금도 칭칭 감긴 붕대에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하, 거기다, 사람이 부족해서요. 이쪽에는 저밖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어서…….”
병사의 말에 나는 말을 잃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병사의 말대로였다.
드문드문 서 있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들 사이로 붕대를 감은 병사들이 서 있었다.
어제 도착한 기사들은 선발대일 뿐이었다.
북쪽 성벽을 모두 감시할 정도로 기사가 많지 않았다.
앞으로 지원군이 더 오기는 할 테지만, 그렇게 일찍 도착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한동안 이 다친 병사들과 소수의 기사로 적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어제처럼 막막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도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병사와 잠시 인사를 하는 사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공주와 대공녀, 선발대로 온 우고 선임 기사와 신관이자 용병인 레스티까지.
그동안 레스티가 여러 번 정보를 가져온 덕분에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이상하지 않게 여겨졌다.
다들 레스티를 내가 고용한 용병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제는 달랐지만, 하는 일 자체는 비슷할지도 몰랐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새로운 정보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공국왕께서 회군 중이라고 하십니다. 벌써 삼일 거리까지 올라오신 듯합니다.”
피난을 가서 정보를 구할 데도 없을 텐데, 공국왕의 위치를 알아 오다니.
그의 정보 수집 능력은 신비할 정도였다.
그동안 신뢰성 있는 정보를 계속 구해다 주어서인지, 다들 레스티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삼일이라……. 빠르면 이틀, 늦으면 사흘인가.”
우고 기사의 중얼거림에 다들 생각에 잠겼다.
이 성벽 위에 모인 사람은 공국 대표인 대공녀와 지원군 수장인 공주, 그리고 우고와 나.
이곳을 지키던 공국의 선임 기사가 죽고, 나머지는 출병과 피난을 가는 바람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수도 방어의 책임자들이 되어버린 듯했다.
결국, 성벽 위가 회의장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지금 병력으로 이틀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거군요.”
공주의 말에 우고 기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뒤에 출발한 병력이 계속 도착하기는 하겠지만……. 본대는 공국왕이 도착하는 시간과 그리 차이가 없을 겁니다.”
이피로스군 몰래 밤마다 빼내는 병력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이피로스군을 속이려면 마지막까지 병력을 남겨두어야 했다.
이동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뭉쳐서 움직여야 할 테고.
그럼 우리 쪽 병력도 큰 기대는 하기 어려웠다.
나름,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역시 한번 죽는 것으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러 번 죽어가면서 완벽한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못 할 짓이었고.
결국, 이번에도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을 다할 뿐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고, 이 인원밖에 없다면, 결국 이 인원으로 열심히 싸우는 수밖에는 없겠군요.”
공주의 머릿속에는 퇴각이라는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도망칠 생각이 있었다면 이곳으로 달려올 리도 없었다.
모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여러 방법을 찾아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대공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 대공녀님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뜬금없는 내 말에 대공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젯밤에 수도로 돌아온 것을 두고 뭐라 했었는데, 지금은 다른 소리를 하니,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네?”
“일을 하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 가슴에는 유물 주머니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유물 주머니에는 망가진 검은 화살, 유물 화살과 쇠뇌가 들어 있었다.
당장 고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고칠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써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제국군은 다시 한번 공국 수도를, 성벽을 공격했지만, 결국, 성벽을 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제국 기사가 전보다 줄어들었다는 점, 그리고, 성벽을 지키는 기사들의 실력이 전보다 뛰어났다는 점.
그리고, 공국군이 필사적으로 제국군의 공격을 막아 냈다는 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제국군이 물러선 것은 제국군을 지휘하던 귀족이 전투 중에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숲에서 귀족 한 명이 죽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은 귀족의 머리에는 구멍 하나만 나 있을 뿐이었다.
검은 화살을 보았다는 병사들의 증언이 있기도 했지만, 죽은 귀족의 주변에는 화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