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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84화 (284/563)

제284화

제9편 공국 방어전 (2)

시간이 흘렀다.

벌써 점심이 지나 이제 해가 반대편에 떠 있었다.

해가 떠오를 때 시작된 싸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의 머리는 아직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여태 내가 이겨왔다는 이야기였다.

그 결과, 내 주변에는 기사들의 시체가 늘어서 있었다.

스무 명이 넘어 보이는 시체들.

열 명 이후로는 세지 않아서 시체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 수가 많다는 것은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제국군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성벽 위에 있는 공국군도 놀란 얼굴일까?

나름 꽤 멋진 광경일 텐데. 동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는 내 앞에 선 기사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는 다섯인가.”

그동안 셋 이상은 안 나오더니, 동시에 다섯 명이 나와버렸다.

결국, 끝이 온 것이었다.

“우리가 확인해 볼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를 농락한 것인지.”

생각보다 연기를 잘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내가 죽지 않는 이상 더 속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다. 오늘 하루는 버틸 수 있을지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아침부터 한나절 정도를 버틴 걸까?

그래도, 할만큼은 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검을 힘주어 잡았다.

농락한 것인지 알고 싶다고 했으니,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검을 고쳐잡자, 제국 기사들도 검진을 갖췄다.

서로를 지키고, 보조하는 검진.

“조심해! 생각보다 훨씬 강한 기사로 생각해!”

“진영을 흩트리지 마! 사람을 홀리는 검술이니 숫자로 밀어붙인다!”

진형을 갖추는 기사들에게는 아침에 보았던 분노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죽이겠다는 의지는 확실하게 보였지만, 그 이상으로 냉정해 보였다.

하기야 흥분해서 덤빈 기사들이 저렇게 많이 죽어갔는데, 또 흥분할 리가 없었다.

그들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내 검술을 칭찬하는 기사들의 말은 고마웠지만, 나는 검술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 싸움.

나는 한나절 동안 묶어놓았던 능력들을 풀어헤쳤다.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파파팟.

사방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움찔하는 기사들.

나는 감각과 마나를 펼쳐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들여다보았다.

몸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놀라 슬쩍 자세를 바꾸는 오른쪽 끝의 기사.

나는 그 기사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휘두른 검이었지만, 그 기사는 내 검을 보고 기함을 토했다.

검에서 하얀빛이 튀어 나가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깡!

“이게 무슨!”

원격 공격 능력인 ‘마나 방출’이었다.

하지만, 역시 기사가 보는 곳에서 쓰면 막히게 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나 방출’만 썼을 때 이야기였다.

퍽!

놀라는 그의 이마에 단검이 박혀 들어갔다.

그는 마나 방출을 막느라고 내가 던진 단검을 막지 못한 것이었다.

허물어지는 기사.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른 기사들이 놀라는 사이, 나는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평범한 제국 기사 넷.

이정도 인원은 검술만으로도 감당할 수 있는 숫자였다.

그런데, 능력을 전부 사용했으니, 기사들이 버틸 리가 없었다.

한 기사는 검이 가슴 앞으로 지나가기만 했는데, 심장까지 깊게 베어졌고,

다른 기사는 힘에 밀려 몸이 잘려 나갔다.

나머지 두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한 기사는 검과 함께 머리가 잘렸고, 마지막 기사는 내 검술에 휘말려 검을 놓치고, 가슴에 대검이 박혔다.

마지막 기사는 검술보다 육체 능력이 더 좋은 기사였던 모양이었다.

그는 심장에 검이 박히고도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이런 실력이라니…….”

단장을 믿은 것인지, 아니면 나를 무시한 것인지.

나도 그 점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너희 단장이 나에게 죽었다는 말을 못 믿은 건가.”

“그건 여러 명이 같이 죽였는 줄…….”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제국 기사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여러 명은 너희 단장 쪽이었지.”

나는 진실을 이야기해주고, 기사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피가 솟고, 기사는 허물어졌다.

몸이 튼튼한 기사였지만, 더 버티지는 못했다.

마지막 기사를 쓰러뜨리고,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제국군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전에 들었던 함성도, 웅성거리는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온종일 나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려서일까?

제국군 안에는 경악한 얼굴과 다른 의미로 분노한 얼굴만 가득했다.

곧이어, 귀족 한 명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제국군 앞으로 나왔다.

기사들은 그를 지키고,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을 돌려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새로 뽑은 지휘관일까?

나는 슬쩍,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달려가서 목을 베어 내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도망치기 전에 기사들에게 붙잡히고, 제국군에 포위되어 버리겠지.

유물 화살도 어제 써버려서 공격할 방법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 때면 유물 화살이 일회용인 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수리도 대공녀만 할 수 있고.

아니, 여러 발이거나 연사할 수 있었으면 나도 살아남지 못했으려나.

“전군, 공격 준비. 적 기사는 무시하고 모두 성벽을 공격한다. 그리고, 적 기사는 마스터급으로 간주. 훈련받은 대응법대로 상대한다.”

귀에 마나를 불어넣지 않아도 귀족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스터 급이라는 과분한 명칭도 감사했지만, 그보다 훈련받은 대응법이라.

제국은 군대가 마스터급 기사를 상대하는 방법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이번에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걸 확인한다고 제국군에 뛰어드는 것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무식한 일이었다.

궁금증은 다음에 풀기로 하고, 나는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제국군이 공격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몸을 돌렸다.

석양이 비치는 공국의 성벽.

그 위로 공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고, 성벽 위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아!”

조용하게 공격을 준비하는 제국군과 달리, 공국군은 돌아오는 나를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

내 말에 공국 기사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아뇨. 충분, 아니 대단합니다. 저 많은 제국 기사를 쓰러뜨리다니. 이제 공의 이름은 왕국, 아니 대륙 전체에 퍼져나갈 겁니다.”

그렇게 되려나?

하기야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엄청난 실력의 기사보다 이런 이야깃거리를 더 좋아하는 법이니,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유명세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 군의 사기에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들 기세가 살아났습니다.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온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고 보니, 병사들이 아침보다 더 늘어나 있었다.

그중에는 병사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머리가 벗어진,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도 있었고, 여러 겹의 천 옷을 덧댄 내 나이 또래의 소년도 보였다.

그의 말대로 수도의 백성들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다.

대단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기쁘게 볼 수는 없었다.

공격이 시작되면 이들은 살아남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들 가족과 친우들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걱정을 하지 말라니.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젓는 내 모습에 그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보다 가장 고마운 점은 공께서 시간을 벌어주어서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성벽 너머, 공국의 수도를 바라보았다.

피난 행렬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아직도 남쪽 성문을 빠져나가는 줄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도시는 썰렁해 보일 정도였다.

하긴,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따지고 보면 혼자서 제국군을 한나절 동안 막은 것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그때 북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대한 물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말을 탄 기사들이 있었다.

결투로 많이 죽여 놓았지만, 아직도 숫자가 많았다.

전부 나를 공격한다면 모를까, 흩어져서 공격한다면 나 혼자 절대 막지 못할 숫자였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내가 제국군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자, 공국 기사가 내게 말했다.

아침에 들었던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제 나도 밀고 내려오는 저 제국군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한 곳을 막아 낸다고 해도, 다른 곳이 뚫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냥 훌쩍 떠날 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길이 엇갈릴 수도 있었다.

“곤란하게 되었네요. 이렇게 된 이상, 하는 데까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뭐가 곤란한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신, 내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죽을 것 같으면 도망가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해 놓았는데,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하는 데까지만 하고 열심히 도망갈 생각이었다.

기사와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도시 쪽 방향으로 계단을 통해 내려온 것이었다.

나는 성벽이 허물어진 곳, 제국과 무역을 하기 위한 통관 장소로 쓰이는 검문소로 향했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활짝 열려있던 통로는 여러 겹의 목책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성벽과 달리 이곳에는 수백의 병사와 여러 명의 기사가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올라오는 기사들만 문제가 되는 성벽과 달리, 이곳은 쏟아져 오는 기사와 병사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놀란 병사와 기사들의 눈총을 받으며 통로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목책 바로 뒤에 대검을 꽂아 넣었다.

푹.

이 검이 기준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선.

나는 이곳을 지킬 생각이었다.

솔직히 조금 더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곳을 막으면 처음부터 제국군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아니, 그냥 핑계일 뿐인 건가?”

이렇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것은 공국의 다른 기사와 병사와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내가 여기 남아 있는 것과 떠나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도시에 남아 있는 공국군과 공국의 백성은 저 제국군에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신검을 꺼내 들었다.

물론, 제국군을 멈출 수 있는 대단한 기책도, 능력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직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어느새 제국군은 코앞까지 와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밀려오는 군대의 파도.

그 기백은 나조차 질릴 정도였다.

콰아아앙!

순식간이 앞을 가로막은 목책이 박살 났다.

몸으로 목책을 박살 낸 병사들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 병사들을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사람들의 물결.

나는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뒤에 양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피가 솟구치고, 사람들의 몸이 날아갔다.

고함에 귀를 때리고, 마나가 허공에 휘몰아쳤다.

나는 통로를 막고, 다가오는 제국군을 죽이고, 기사들을 죽였다.

능력도 숨기지 않고,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내 능력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전쟁의 물결에 휩싸여버린 것이었다.

열심히 검을 휘둘러댔지만, 역시, 나 혼자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옆으로 내가 막지 못한 제국군들이 지나갔다.

기사들은 나를 피했고, 성벽 위에서도 비명이 들려왔다.

제국 기사들이 성벽을 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기다, 통로를 지키던 공국 병사들은 어느새 모두 죽은 모양이었다.

주위에 제국군만 가득했다.

“도망도 못 가는 거 아냐?”

나는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점점 쌓여가는 제국군. 아무래도 아까 말한 대응법 같은 것을 할 모양이었다.

설마, 여기서 죽어서 또 반복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절로 식은땀이 흘러냈다.

그런 무의미한 죽음이라니.

이곳에 남은 것이 후회될 지경이었다.

“젠장! 공주하고 대공녀는 뭐 하는 거야!”

결국, 나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순간, 제국군의 함성을 뚫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우!

나팔 소리였다. 그레시아 공작 기사단의 진격 나팔 소리.

나는 포위된 가운데에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공주도 대공녀도, 그녀들 성격에 수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공주가 이끄는 선발대는 대공녀를 만난 뒤에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제국군들 뒤로 보이는 기사단의 깃발을 보며 검을 치켜들었다.

자, 이제 원래의 자리.

공주님의 호위 기사로 복귀할 시간이었다.

나는 검을 휘두르며 남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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