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제8편 공국 방어전 (1)
노을이 가득한 아침.
공국 수도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어떤 사람들은 살림살이 전체를 수레에 싣고 남쪽 성문으로 향했고, 다른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짐을 가득 지고 길을 나섰다.
어제까지의 피난 행렬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때의 피난은 차분한 이동이었다면, 오늘 아침의 대이동은 살기 위한 필사의 탈주였다.
남쪽으로 달아나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이들이 이렇게 서두르게 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던 제국군의 남하를 모두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국군은 오늘 새벽, 북쪽 성벽 너머의 숲을 빠져나와 벌판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북쪽 성벽 위와 도시에서도 그 모습이 보이게 되었고, 결국 이런 소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오늘 아침까지 공국 수도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남아 있었다.
제국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믿지 못했던 사람들과 가산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제국군이 오는 것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물론, 미리 남쪽으로 미리 떠난 사람도 있었지만, 남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금 피난을 가려고 도시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도시와 달리, 제국군과 마주한 북쪽 성벽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도시 안에서 보는 북쪽 성벽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성벽에 피가 가득 묻어 있는 듯했다.
성벽 위에도 병사들이 노을에 붉게 물들인 채로 제국군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을에 붉어진 얼굴이었지만, 그 붉은 노을 속에서도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성벽 위에 나도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밤에 숲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난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행히 제국군에게 들키지 않았고, 지금 제국군이 진지를 만드는데 굼뜬 것을 보니, 밤사이에 벌인 일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내 옆에는 공국의 선임 기사가 서 있었다.
전에 공국에 왔을 때 보았던 기사였는데, 이렇게 방어 책임자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제국이 이렇게 뒤치기를 할 줄이야…….”
그는 벌판에 늘어선 제국군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예상을 못 했나 보네요.”
“예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없었지요. 왕비님도 제국인이셨고, 수백 년간 이 공국은 제국과 교역지로 인정을 받은 곳이었으니…….”
그는 내게 말을 높였다.
하기야 공작의 아들과 공주의 호위 기사라는 위치로 찾아온 것이었느니, 말을 높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기야, 그의 말대로 제국이 공격해 올 것을 미리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백 년간 쌓아온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 신뢰는 사라져버렸다.
“막건 못 막건 이제부터 공국과 제국의 관계는 달라지겠네요.”
“그렇겠죠. 그런데, 아직 남아 계셔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오늘 안에 공격해 올 것 같은데……. 왕께서 돌아오지 않는 이상 막아 내기 어려워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보였다.
저 제국 병력이 일순간에 몰아친다면 성벽에 있는 병사들만으로 막기 어려웠다.
적도 병사들만 있다면 모를까. 제국군에는 기사들이 있었다.
이정도 높이의 성벽은 쉽게 오를 수 있는 마나 사용자들.
귀족들이나, 같은 기사가 아니면 막기 어려웠다.
공국의 기사들은 남쪽으로 대부분 내려가 있어서, 이곳에는 내 옆에 있는 기사 외에 몇 없었다.
물론, 적 기사들만 한쪽으로 모아 막아 낼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겠지만…….
그걸 할 수 있는 기사가 남은 공국 기사 중에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남은 거죠.”
“네?”
기사는 내 말에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옆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자루를 등에 멨다.
오랜만에 판금 갑옷에다가 투구까지 쓰고, 자루까지 등에 짊어지니, 좀 웃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루는 뭡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물건이라고 할까요.”
전생이었으면 관종 아이템이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성벽을 훌쩍 뛰어내렸다.
도시 쪽 방향이 아니라, 성 밖으로.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기사만이 아니라 주변의 병사들도 모두 놀라고 말았다.
대공녀도 구했고, 걸리는 적들도 처리했으니 이대로 물러나도 상관은 없었다.
검의 주인이라 불리는 제국의 백작은 아직 상대할 실력이 안 되었으니 제쳐 두고…….
제 할 몫은 다했으니, 남을 필요는 별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뒷일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공국왕과 공국에 도움을 주면, 나중에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대공녀와 공주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내가 이대로 빠질 수는 없었다.
쿵.
갑옷을 입고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짓은 마나를 가진 기사도 함부로 하긴 어려운 짓이었다.
덕분에 발이 반쯤 파묻히고, 무릎이 저려 왔다.
나는 무릎을 주무르는 대신, 푹 파인 땅속에서 다리를 뽑아냈다.
성벽 위에서도, 멀리 적 제국군에게서도 시선이 모여들었다.
성벽을 뛰어내리는 무식한 짓을 한 덕분이었다.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투구 가리개를 내렸다.
나중에 다 알려지긴 하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할 짓은 솔직히 민얼굴로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받으며 커다란 자루를 메고 걸어가다가, 벌판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성벽과 제국군의 딱 중간 지점.
얼마 전 이피로스 왕국군 앞에서 전령으로 외쳤을 때와 비슷한 위치였고,
소로카 요새 밖에서 전직 왕실 부단장과 싸웠던 것도 이 정도 위치였다.
그러고 보면, 소로카 요새 앞에서 전 왕실 부단장이 나섰던 것과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적에게 시비를 걸어서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는 일.
기사의 로망이 살아 있는 이 세계가 아니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턱.
나는 등에 메고 있던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루의 입구를 풀었다.
열린 입구에서 피 냄새가 가득 피어올랐다.
나는 자루 안에 있는 물건을 보고 혀를 찼다.
전생에는 평범한 일반인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중세의 바바리안도 아니고, 하도 많이 죽어서 뭔가 머릿속이 이상해진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제국군의 관심을 끌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자루에 손을 넣어, 잡히는 것을 꺼냈다.
그리고, 제국군을 향해 힘껏 던졌다.
휘이이익.
둥그런 물체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제국군도, 다른 일을 하던 제국군도, 모두 내가 던진 것을 쳐다보았다.
제국군 앞을 구르고 있는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왕궁에서 내게 죽었던 제국 기사의 머리.
나는 자루에서 다른 머리를 꺼내 높이 들어 올리고, 제국군을 향해 크게 외쳤다.
“밤에 몰래 왕궁에 숨어들어왔던 너희 기사들이다. 모두 내 손에 죽었다. 이 기사도, 또 이 기사도.”
나는 자루에서 머리를 꺼내 계속 제국군에게 던졌다.
그렇게 기사들의 머리를 던지고, 마지막 남은 머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너희들의 기사단장까지.”
덩치가 컸던 기사의 머리. 나는 그 머리를 내 앞에 던져 놓았다.
“너희들 중에 실력 있는 기사가 있다면 내게서 이 머리를 가져가라. 이 기사들처럼 여러 명이 덤벼들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쓰레기 같은 제국 기사들이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목소리에 마나를 가득 담아 크게 외쳤다.
제국군 전체가 들을 정도로.
다행히 한바탕 연설은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말이 새지도 않았다.
이제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고 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최대한 열심히 준비한 일이었지만, 내 생각대로 되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 도발을 무시하고, 그대로 전군을 성벽으로 진격시킬 수도 있었고,
너무 화가 나서 기사단과 병력 전체가 한꺼번에 달려들 수도 있었다.
물론, 제국의 기사단도 상대 기사들의 머리를 창에 꽂은 채로 승전 퍼레이드를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꽤 예전 일이라 내가 한 행동이 어느 정도 수위로 느껴질지는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제국군 사이에서 분노가 타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시, 투구를 쓰고 오기를 잘한 것 같았다. 투구를 썼는데도 살기에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살기 속에서 분노를 못 참고 사람이 튀어나왔다.
역시, 일대일 기사 대전의 로망 같은 것은 웃기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제국군 쪽에서 튀어나온 기사는 세 명이었다.
말도 타지 않고, 투구도 쓰지 않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분노로 머리가 뒤집힌 것 같았다.
“감히 단장님을! XXXXXX”
“네놈을 갈가리 찢어버리겠다!”
“죽어! 이 시[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쏟아지는 욕설을 봐도 확실히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일대일 대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계획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나는 등에 멘 대검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신검이나 ‘기사의 검’을 쓰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저런 기사들에게는 이 대검으로 충분했다.
내 애검이자 부러지지 않은 검.
전 주인도 서자라서 그런지, 나는 이 아무 능력이 없는 검에 이상하게 애착이 갔다.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세 기사는 동시에 나를 덮쳐왔고, 나는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캉, 캉, 캉.
검이 튕겨 나가고, 피하고, 막고.
현란한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제국군도 성벽 위의 공국군도 손에 땀을 쥐고서 싸움을 지켜보았다.
삼대 일의 싸움이었지만, 그 싸움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더욱 격렬해져만 갈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비등한 싸움도 결국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십여 분 정도 지났을까.
서걱!
제국의 첫 번째 기사가 팔이 날아가 버린 뒤에는 승부가 기울어졌다.
첫 번째 기사는 날아간 팔을 지혈하지도 못하고 곧 목이 잘려버렸고, 남은 두 기사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된 지 20여 분이 지나고, 벌판에 서 있게 된 것은 나밖에 없었다.
“헉, 헉, 헉.”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싸움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실력이 대단한 기사들이 아니라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며 시간만 끌어야 하는 것은 그냥 죽이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든 일이었다.
싸우는 도중에 죽일 뻔한 적이 도대체 몇 번이었는지.
이렇게 오래 끈 게 기적일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쓰러진 기사들을 배경으로 크게 소리쳤다.
“제국은 기사가 이들밖에 없는 건가! 복수는커녕 내 검의 먹이가 될 뿐이 아닌가!”
내 말에 제국군이 술렁였다.
역시 아직 말빨은 줄어들지 않았다.
나도 아직 발레아 같은 괴수들만 아니라면 충분히 속일 수 있었다.
“내가 상대하겠다!”
제국군에서 다시 기사가 튀어나왔다.
다음 손님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긴장을 풀었다.
다시 연극을 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