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제7편 왕궁 전투 (3)
캉!
“커억! 이게 무슨…….”
내 검을 막아선 길쭉한 기사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신검의 능력. 방어 무시가 펼쳐진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내가 중수법같이 보였지만, 결과가 좋으니 이름은 뭐가 되었던 상관이 없었다.
나는 쓰러진 기사를 향해 단검을 던지고, 다른 기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 기사는 조금 전 싸움을 보고 내 검과 맞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 좁은 곳에서 검을 맞닿지 않게 된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검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푸욱.
그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은 뒤, 나는 뒤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커다란 얼음이 내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졌다.
허공에 만들어진 얼음은 바로 터져나갔다.
콰앙!
하지만, 그 자리에는 내가 없었다.
얼음이 박살 나면서, 검을 박아넣은 기사의 몸이 터져나갔다.
“안 돼!”
얼음덩어리를 터트려 기사를 박살 낸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기사를 터트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죽였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말을 해 줄 시간이 없었다.
분노한 덩치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덩치가 큰 기사는 자신과 닮은 큰 검을 앞세워 내게 밀고 들어왔다.
죽기 전에도 저 터프함 때문에 저 덩치 기사를 죽이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물론 그전에 많이 다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가 닥치기 전에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유물 주머니에서 뽑혀 나온 검.
덩치는 검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검은 설마?”
확실히 이 검은 유명한 검이었다. 제국 기사도 ‘기사의 검’을 알아보았다.
내게는 정신 공격만 막아 내는 애매한 검이었지만, 다른 기사들은 보기만 해도 감탄하게 되는 검이었다.
카아아앙!
두 검이 부딪쳤다. 엄청난 소리가 방을 울렸다.
상대는 덩치에 맞게 힘이 센 기사였지만, 나도 만만치 않았다.
끼기기긱.
목걸이에 마나를 밀어 넣으니, 점점 상대의 검을 밀어낼 수 있었다.
“힘이 더 세지다니……. 이게 무슨…….”
힘겹게 받아내던 상대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이 내 가슴을 보고 있었다.
“설마……. 그 목걸이는?”
옷 사이로 목걸이가 삐져나왔나 보다.
목걸이를 알아보다니. 확실히 이자들도 같은 조직이 맞았다.
나는 놀란 상대에게 씩 웃어주었다.
잠시 뒤,
서걱.
덩치 큰 기사도 놀란 눈을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놀란 눈을 한 이유는 마술처럼 나타나는 검들에다가, 마지막에는 허공에 휘두른 검에 목이 잘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중간, 중간에 여자 능력자가 얼음을 날려 방해를 했지만, 그 정도 방해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한번은 위험할 때도 있었지만, 반지의 방어막이 잘 막아주었다.
나는 단검을 던져 얼음덩어리를 만드는 여성도 숨을 끊어주었다.
죽기 전과 달리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확실히, 준비하지 않고 함정에 빠졌을 때와 상대의 실력을 알고 제대로 준비했을 때는 결과가 완전히 달랐다.
시간이 없었기도 했지만, 죽기 전에는 상처를 입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상처도 없이 모두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하나.
마음을 읽는 능력자는 나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 공자? 당신이 대공녀를 피신시켰군요.”
어라? 지금은 또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고함을 지르는 여성을 잘 살펴보니, 그녀가 읽고 있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방 안에 있던 하녀장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나는 한쪽에 서 있는 하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대공녀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젊어서 꽤 미인이었는지, 지금도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복도와 응접실을 어지럽혀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돌아오시기 전에 치우면 되니까요.”
방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는데도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역시, 왕궁의 하녀장 정도면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나가시죠. 마무리하고 따라 나가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남은 여성에게 다가갔다.
여성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현재는 대공녀의 하녀장이자, 전에는 공국 왕비의 하녀장이었던 마르타는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살폈다.
피범벅인 복도였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청소해야 할 부분들을 확인해나갔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복도 한쪽에 주저앉은 하녀를 보게 되었다.
자신도 잘 아는 하녀. 옷에는 피가 잔뜩 튀어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마르타는 피 묻은 바닥을 피해, 하녀 앞으로 걸어갔다.
마르타가 다가가자 하녀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허탈하게 웃는 하녀. 마르타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어떻게 여기를 찾아올 수 있나 했더니, 당신이 데려온 거군요.”
“네. 제가 데려왔습니다.”
안내한 사람들은 더 있었지만, 하녀는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녀장도 다른 사람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이 든 하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당신은 이 나라 사람이 될 수 없었나 보네요.”
“마르타 님은 공국 사람이 되신 모양이네요.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제국 인이었습니다.”
마르타와 하녀는 왕비를 따라 이 공국으로 오게 된 이들이었다.
둘 다 원래는 제국인이었지만, 왕비를 따라 이 공국에 와서 공국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하녀는 끝까지 공국인이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정하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프리다 대공녀님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겁니다.”
하녀장의 말에 하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대공녀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방에 있던 어린 기사가 복도로 나왔다.
여태껏 담담했던 하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조금 전에 복도에서 본 장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안의 일을 마무리하고, 복도로 나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하녀와 그 앞에 선 하녀장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 안에서도 복도에서 나눈 대화 정도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찢어진 옷으로 검을 닦은 뒤에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찰박, 찰박.
피를 밟는 발소리와 함께 하녀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간 나는 하녀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대공녀를 배반한 것은 제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조직이란 곳 소속이기 때문이겠죠.”
내 말에 하녀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어떻게 그걸…….”
하녀의 넋두리를 무시하고, 이번에는 하녀장에게 물었다.
“이 하녀도 대공녀님의 능력을 알고 있겠죠?”
“알고 있기는 하지만……. 설마?”
내 질문에 하녀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녀도 겨우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동안 저 하녀가 대공녀의 일을 제국에 알린 겁니다.”
대공녀 주위에 첩자가 있지 않다면, 제국이 그렇게 매번 타이밍에 맞게 쳐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제국이 하녀의 말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녀가 평범한 첩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관계 때문에 따로 질문을 하지 않으시려고 하던데, 그러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하녀는 제국이 공국에 심어놓은 사람 중에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일 겁니다.”
괜히 그녀를 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 기사들을 대공녀가 있는 곳까지 안내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살려둘 리가 없었다.
나는 슬쩍 하녀의 몸에 마나를 흘려 기절시켰다.
하녀는 피범벅인 바닥에 쓰러졌고, 하녀장은 쓰러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쓰러진 하녀를 바라보는 하녀장의 표정에는 조금 전 같은 안타까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녀를 보던 그녀는 내게 부탁했다.
“고문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겠습니까?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뽑아내겠습니다.”
그런 부탁은 내게는 고맙기만 했다.
하지만, 왕궁의 하녀장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방 안의 상황도 말해 주었다.
“방 안의 시체는 제가 치워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절이 바른 하녀장은 내가 어떻게 시체들을 치웠는지 묻지 않았다.
방 안의 시체들은 유물 주머니에 잘 들어 있었다. 덩치가 큰 기사부터 마음을 읽는 능력자까지.
시체를 치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쓸 곳이 있기도 했지만, 대공녀의 응접실에 제국인들의 시체를 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왕궁을 침입한 적을 쓰러뜨리고, 나는 바로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찰을 떠난 병사들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왕궁을 침입한 기사들이 있었으니, 더 확인할 것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기사들은 나를 불렀다.
첩보를 전해서였는지, 아니면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정찰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제국의 기사단과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정찰병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공국 수도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짐을 싸고 남쪽으로 향하려 했고, 병사와 기사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적을 막아 낼 준비를 했다.
물론, 적을 막기에는 기사도, 병사도 부족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피난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공국 수도가 난리가 난 밤.
나는 공국 수도가 아니라, 북쪽 숲에 가 있었다.
원래 밤의 숲도 곤충이나 밤 짐승들의 소리로 그리 조용하지는 않은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벌레도 곤충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 숲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숲은 남쪽으로 향하는 군인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말 한마디도 없이 계속 남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확실히 제국군은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이런 많은 병사가 있는데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니.
같은 숫자끼리 싸우게 되면 제국군을 당해 낼 수 있는 나라는 드물 것 같았다.
나도 제국군의 이런 모습에 감탄했지만, 감탄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은 발밑에서 제국군들이 지나가고 있는 높은 나무의 가지 위였다.
사방에 제국군이 가득했다.
만 명 이상의 대규모 군은 아니지만, 수천의 군대도 이렇게 같이 움직이니, 숲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숫자라니.
밤이고, 위장을 잘한 덕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들키기라도 한다면 도망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물론, 들킬 생각은 없었다.
나 혼자 북쪽 숲에 와 있는 것은 이 대군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도에 남아서 사람들을 남쪽으로 보내는 것도, 병력을 모아 성벽을 지키고 있는 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었고,
결국, 나는 내 볼일을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죽기 전에 세웠던 계획 중에 처리하지 못한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찾았다.’
그동안 계속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마나를 눈에 밀어 넣어 주변을 살폈던 덕분이었다.
나는 조용히 쇠뇌를 들어 올렸다.
검은색 일색의 쇠뇌와 화살.
암살자에게서 얻게 된 이 화살은 멀리 있는 사람을 암살할 때, 최적인 무기이자 유물이었다.
나는 쇠뇌를 들어, 기사들 사이에서 걷고 있는 귀족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쥐를 닮은 얼굴. 저 얼굴은 죽기 전에 확실히 기억해 두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슉.
소리 없이 발사된 화살.
화살은 쥐를 닮은 귀족.
추적자에게 빨려들었다.
퍽!
“크억!”
“기습이다!”
피가 터지고, 귀족이 쓰러졌다.
조용하던 숲이 시끄러워져졌다.
기사들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지만, 한번 발생한 소란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더구나 오히려 그들이 기습을 당한 상황이었다. 거기다, 죽은 사람도 하나밖에 없는 추적자.
추적자로 불리는 귀족은 머리에 구멍이 나 있는 채로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를 죽인 무기도, 화살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죽였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숲의 소란은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