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제6편 왕궁 전투 (2)
공국의 수도는 긴장이 가득 느껴졌다.
제국의 군대가 내려오고 있다는 첩보는 아직 확인이 안 되어 피난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북쪽을 가로막고 있는 북쪽 성벽의 경계는 어느 때보다 강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계로도 일련의 기사들과 능력자들이 수도로 몰래 숨어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과거 공국에 심어두었던 조직은 얼마 전 있었던 공주 납치 건으로 상당히 무너졌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도 상당수가 풀려났고, 왕국의 내전에 참여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많아서, 조직은 금방 예전의 세력을 되찾았다.
그렇게 되니, 전처럼 수도로 사람들을 몰래 들여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일단의 기사들과 귀족 능력자들은 포섭된 병사들의 안내로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긴장된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왕궁으로 향하는 뒷길.
로브를 뒤집어쓴 십여 명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사처럼 보이는 덩치가 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두 명은 여성으로 보이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도 특출나게 덩치가 큰 사람이 있었다.
수도로 잠입한 일행의 리더이자, 제국 남부군 소속의 기사단의 단장인 루트비히였다.
그는 로브로 감싼 커다란 몸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뒷길이라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뒷길까지 긴장이 느껴질 정도였다.
“공격이 들킨 거겠지?”
그의 물음에 그들을 안내하던 병사가 대답했다.
“첩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외부의 도움인가.”
“어디선가 정보가 샌듯합니다.”
“그 정도 규모의 군대가 움직이는데 들키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예상보다 빨리 들키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의 말에 투덜거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알아차려봤자, 막을 군대도 없고, 피난하기도 시간이 부족할 거다. 거기다, 지금은 후속 부대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아니, 우리가 문제인데요. 분위기가 이런데 대공녀가 왕궁에 곱게 있을 보장이 없잖아요.”
여성의 말에 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서둘러야겠군.”
그는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일행의 발이 빨라졌다.
발이 빨라지자, 여성은 다시 투덜거렸다.
“추적자가 같이 왔어야 했어. 우리 정신 능력자는 이렇게 같이 잠입해주었는데, 그 인간은 뭐가 무섭다고 뒤에 남은 건지.”
추적자가 같이 왔다면 대공녀가 도망가도 걱정이 없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여성이 로브 사이로 피식 웃었다.
“전투 능력도 없이 이런 일에 참여한 제가 이상한 거예요.”
여성의 말에 뒤쪽에서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다만, 그 음성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맞아, 넌 좀 조심해야 해. 그렇게 계속 위험한 일에 뛰어들다가는 다칠 수 있어.”
“그렇게 되지 않고 지켜주면 되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남자는 슬쩍 물러섰다.
“그런 건 대장님에게 부탁하라고.”
다들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공격이 알려지고, 대공녀가 도망쳤을 수도 있었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실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들은 공국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대공녀가 도망쳐서 일에 실패하는 것이었지만, 그건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더라도 추적자를 기다려 다시 쫓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기사단과 귀족 능력자들은 뒷길로 이동해서 외진 구석의 왕궁 성벽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고용인들이 출입하는 작은 쪽문이 나 있었다.
물론, 그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병사들은 이미 자신들의 편으로 바뀐 뒤였다.
“그래도 너무 허술한 거 아니에요?”
“좀 더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들 신경들을 안 쓰더라고요. 경비를 바꾸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투덜거렸던 여성이 그 광경을 보고 의아해했고, 이들을 안내하던 병사가 그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으니, 더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뒷문을 통해 내성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곧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여기서부터는 숨어다닐 이유도 없고, 숨어다닐 수도 없었다.
로브를 벗으니 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거대한 루트비히 단장과 그의 기사단원들이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 가운데 말라 보이는 남자와 평범한 남자 한 명은 입고 있는 갑옷이 달랐다.
그 두 사람은 같이 있는 두 명의 여성처럼 이들 기사단이 아니라 외부에서 지원을 온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기사단장과 검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두 여성도 각기 얼음 능력과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로 루트비히 단장과 함께 여러 번 작전을 수행했었다.
물론, 그들은 루트비히 단장과 함께 한 조직에 소속이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기사단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궁 안에도 그들을 안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지극한 하녀였다.
그녀는 앞장을 서서 복도를 나아갔다.
물론,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열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복도를 지나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앞장을 선 하녀를 보고 반가워하던 다른 하녀가 뒤에 선 기사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고,
“콘차 님 뒤에 누구……. 컥.”
그녀는 기사들의 손에 쓰러졌다.
말을 건 하녀는 죽지 않았다. 그저 기사의 손에 기절했을 뿐이었다.
아직은 평범한 고용인들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안내하는 하녀도 공국인이었다. 위험한 때가 아니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릴 생각이었다.
위험한 때라 하면, 지금처럼 복도를 지키는 병사가 창을 치켜드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냐!”
기사들을 본 병사는 한 손으로 창을 치켜들고,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지만, 그는 호각을 꺼내기 전에 검에 찔리고 말았다.
이런 좁은 복도에서 일반 병사는 기사의 움직임을 피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트비히가 대표로 사과했지만, 안내하던 하녀는 개의치 않았다.
“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죠.”
무언가 사정이 있을 듯했지만, 그녀도 말하지 않았고, 일행도 그녀에게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병사나 기사를 죽이고, 하녀나 고용인들은 기절시켜가면서 일행은 계속 이동했다.
얼마 뒤, 그들은 정갈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루트비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서 숨소리가 들리는군. 아직 궁에 남아 있었던 건가?”
“들어갑니까?”
기사의 말에 단장이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가리켰다.
“나머지는 밖에서 지키고, 기존 멤버들만 들어가지.”
“언제나처럼 말이죠.”
마른 남자가 그 말에 씩 웃었고, 다른 갑옷을 입은 두 기사가 문 앞에 섰다.
그 뒤에 귀족 여성이 손에 얼음을 피워 올렸고, 다른 여성도 따라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단장의 신호와 함께 두 기사는 문을 박찼다.
쾅!
문이 활짝 열리고, 두 기사와 단장, 그리고 두 여성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활짝 열렸던 문이 반동으로 그들이 들어간 뒤에 다시 닫쳤고,
쿵.
그들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방안을 살펴보았다.
화사하고 정갈한 귀족의 응접실.
대공녀의 응접실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소파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성이 등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루트비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지는 여성들이 먼저 알아차렸다.
“대공녀가 아닌데요. 머리모양도 그렇고, 목에 주름이 보이고, 나이가 꽤 있는 사람인데요?”
손에 얼음을 띄우고 있는 여성의 말에 정신 능력자가 말을 이었다.
“하녀장이에요. 대공녀는 이미 떠났답니다. 우리를 유인하려고 남았답니다.”
하녀장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의 생각을 모두 알아맞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트비히는 그녀의 능력을 칭찬하는 대신에 몸을 돌렸다.
“함정?”
그의 눈앞에 그들이 들어온 닫힌 문이 보였다.
그리고, 문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막아!”
“너무 빨……. 컥!”
쾅! 서걱!
보지 않아도 밖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루트비히는 문을 열지 않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두 기사도 문을 향해 검을 들었고, 두 여성도 빠르게 움직여서 남자들 뒤에 섰다.
그들이 채 자리를 잡기 전에 문밖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멈췄다.
단장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빨리 소리가 멈출 리가 없었다.
여기에 데려온 기사들은 전부 자신이 엄선한 기사들이었다.
검주 같은 괴물들이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당할 리가 없었다.
긴장이 빠르게 올라갔다.
오랜 동료들도 긴장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문 사이로 보이기 시작한 복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벽과 바닥에 뿌려진 피와 그사이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
전부 그의 부하들이었다.
그리고, 열린 문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무척이나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하지만, 단장도 다른 사람들도 어려 보이는 얼굴에 속지 않았다.
남자의 몸에는 몇 방울의 피밖에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밖에 있는 기사들을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죽이고, 저렇게 적은 피만 묻히다니, 저런 기사가 평범한 기사일 리가 없었다.
“하나, 둘, 세, 넷, 다섯. 한 명이 빠졌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문 안을 확인한 어린 남자가 일행을 세어보더니 씩 웃었다.
* * *
나는 긴장한 사람들을 보고 웃을 수가 있었다.
추적 능력자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일 꺼림직한 마음을 읽은 능력자가 응접실 안에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죽기 전에 전부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내가 함정에 빠진 격이어서 꽤 고전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여기까지 몰아넣었는데 확실하게 끝낼 생각이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내 대검만큼 딱 맞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신검도 손에 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좁은 실내에서 대검을 쓰기는 힘들었다.
거기다, 전에 싸워봤기에 실력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이제 싸울 때였다.
“안, 안보여요. 내 능력으로는 머릿속이 보이지 않아요.”
뒤쪽에서 들려온 말에 속으로 웃으며 몸을 날렸다.
정신 능력자라는 것을 몰랐던 전에도 보이지 않았는데, 알고 있는 지금 보일 리가 없었다.
“막아!”
동시에 얼음덩어리들이 뿌려지고, 기온이 빠르게 내려갔다.
하지만, 더 빨리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나는 입김을 내뱉으며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