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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80화 (280/563)

제280화

제5편 왕궁 전투 (1)

백작과의 싸움은 길지 않았다. 결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환하게 밝아오는 빛.

나는 밝아오는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크억!”

목을 매만져 보았다.

다행히 목은 잘 붙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에는 오히려 다른 때만큼 고통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영 생소한 감각이 나를 소름 끼치게 했다.

검이 목을 지나가면서 느꼈던 그 감각.

전에도 목이 잘려 나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영혼이 뽑혀 나가는 느낌이랄까. 고통을 각오하긴 했지만, 이건 전혀 다른 고통이었다.

“그 정도 실력자에게 죽으면 뭔가 다른 건가.”

검에 영혼을 싣는다든가. 상대의 영혼을 날려 버린다든가.

하지만, 실제로는 백작의 마나 탓일 터였다.

그의 검술에 맡게 변형된 마나.

그의 겉모습과 다르게 검술도 마나도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섬뜩했다.

“5분은 버텼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목걸이에 마나를 가득 밀어 넣었는데도 힘과 실력에서 밀려버렸다.

근래 이런 적이 없어서 신기하게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나름 잘 싸운 것 같았다.

주변의 놀란 시선들과 간절해 보이는 대공녀의 표정까지.

백작의 검술에 온 정신을 집중하면서도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슬픈 대공녀의 표정과 아쉬워하던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쨌거나 싸움은 전부 기억해 놓았다. 마나의 움직임과 검술까지.

시간을 들여서 검토하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지금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여기서 일을 잘못 처리하면 괜히 죽을 자리를 찾아간 보람이 없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깃발이 나부끼는 군대의 진지가 앞에 늘어서 있었고, 뒤쪽으로 공주님의 군대가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고,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 왕국을 침입한 이피로스 왕국과 처음 마주친 그때였다.

내가 전령으로 나섰던 그 시간.

그것을 확인해 주듯이, 다른 손에는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전과 똑같이 크게 외쳤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가 전령으로 찾아왔다! 막스 왕자님께 안내를 부탁한다!”

마나를 실은 내 말이 멀리 퍼져나갔다.

다행히 전과 같이 일이 진행되었다.

나를 알아본 왕자가 자신의 천막으로 나를 맞아들였다.

왕자는 전에 들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했다.

자신이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의 군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전처럼 그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진지로 돌아온 뒤에 공주와 다른 귀족들에게 왕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피로스 왕국은 우리를 최대한 붙잡고 있기를 원한답니다. 하지만, 왕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모른 척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한 말은, 전에 내가 했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말이자, 이피로스의 왕자가 한 말과 차이가 큰 이야기였다.

하지만, 왕자에게 따로 물어보지 않는 이상 확인할 방법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왕자에게서 정보를 얻었습니다. 제국이 공국의 뒤를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공국왕에게 연락하고, 빠르게 움직이면 아슬아슬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다, 죽기 전에 경험한 일을 왕자에게 들은 것으로 해버렸다.

졸지에 이피로스 왕자는 우리의 내통자가 되어버렸다.

이 일이 밝혀지면 왕자도 이피로스 왕국이나 제국에게 크게 문책을 당하게 되겠지만.

까놓고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그를 배려해 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전에 있었던 일도 거래에 불과한 일이었고, 이번에도 왕국을 넘어와 놓고 강짜를 부리는 것에 불과했다.

저번에는 혹시나 몰라 조심했지만, 한 주 이상 시간만 끄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번에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하지만, 밤을 이용한다고 해도 들키지 않고 병력을 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레시아 공작이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일할 때는 객관적인 사람이었다.

내 의견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소리, 그럼 할 수 있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동료 한 명을 추천했다.

“네? 저요?”

발레아가 내 이야기를 듣고 눈을 흘겼다.

무리한 부탁이었나 생각했지만, 그녀가 눈을 흘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설마, 나를 떼어놓고 가겠다는 건가요?”

나는 안도와 난감함이 교차했다.

그녀는 나 때문에 합류한 것이었으니, 열심히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아슬아슬해서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합류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어쩔 수 없죠. 잘 끝나면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물론입니다.”

다행히 발레아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 진영 중앙에 작은 천막 하나가 더 올라갔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기사들이 단단히 천막을 지켰다.

천막 안에는 발레아가 있었다.

그녀는 천막 중앙에 앉아 눈을 감고 진영 전체에 영역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 밤.

스스스스.

낮은 소리와 함께 우리 진영 곳곳에서 땅이 위로 올라왔다.

솟구치는 흙은 사람 크기로 자라나며 점점 형태를 잡아갔다.

솟구친 흙은 점점 사람 형태로 변해 갔다.

병사들은 낮에 미리 들은 덕분에, 갑작스러운 변괴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사람 형태로 자리 잡은 흙 인형들은 색도 사람 비슷하게 변해 갔다.

얼굴은 살 색으로 몸은 갑옷 형태와 색상으로.

흙 인형들은 멀리서 보면 이곳 병사와 기사들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언덕 위에서 우리 쪽 진영을 확인하던 나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발레아였다.

이정도면 적 진지에서는 낮에도 구별하기가 불가능했다.

아쉽게도 급하게 펼친 영역이라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이건 시간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흙 병사들이 세워지자, 진영 뒤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선발대로는 충분한 숫자였다.

밤마다 병사들을 빼내 공국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들키겠지만, 그때는 이미 공국 쪽 일이 해결된 뒤일 터였다.

그렇다고 왕자 성향상 싸움을 걸지도 않은 테니, 욕이나 실컷 들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병사들이 빠져나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공주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선발대와 같이 움직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공주도 선발대와 같이 움직이니, 같이 가자는 말이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선발대가 늦을 수도 있었다.

공국을 도와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늦지 않게 대공녀를 빼내야 했다.

나는 아쉬워하는 공주에게 인사를 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북서쪽. 공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죽기 전과 똑같은 달리기였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일주일 빨랐다.

이번에는 늦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고, 달리면서 식사까지 하며 줄기차게 내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공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공국의 마을들은 아직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그런 마을들을 지나, 수도에 도착했다.

수도도 괜찮았다.

수없이 오가는 상인들과 한가로워 보이는 문지기들.

공국왕이 출진해 있는 공국치고는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제국이 공격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인들을 검문하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나를 시큰둥하게 보던 그들은 곧 내가 메고 있는 대검을 보고 표정을 바꾸었다.

여유로워 보였지만, 그건 겉보기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래도 전쟁 중인 나라답게 기강은 잘 갖추고 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는 병사들 뒤에 서 있던 기사가 내 얼굴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알렉스 공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대공녀님을 뵈러 왔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굳은 내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먼지가 가득한 내 옷 때문이지, 기사는 바로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그리고, 그가 직접 왕궁으로 나를 안내했다.

조금은 한가해 보이는 상점가를 지나, 기사와 나는 공국의 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궁을 지키는 기사들은 나를 알아보았다.

바로 집사장에게 연락이 갔고, 한걸음에 내려온 집사장은 나를 대공녀에게 안내했다.

문이 열리고, 나는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는 대공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지 않았습니다.”

대공녀 프리다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눈을 보니, 죽기 전에 보았던 그녀의 슬픈 눈이 떠올랐다.

역시, 이쪽 눈이 훨씬 보기가 좋았다.

잠시 뒤, 대공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놀라게 되었다.

그동안 신뢰를 쌓은 덕분인지, 내 말은 바로 믿어주었다.

하지만, 이어진 권유에 대공녀는 머뭇거렸다.

“……그래서 지금 제가 왕궁을 떠나야 한다는 건가요?”

그녀도 이 공국의 공주였으니, 왕궁을 빠져나가라는 말을 바로 따르기는 어려웠던 것 같았다.

하지만, 대공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먼저 움직였다.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공국의 집사장이었다.

그는 내 말의 진의를 대공녀에게 확인한 뒤에 바로 행동을 취했다.

“기사들을 준비하겠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왕궁을 지켜야…….”

“왕궁을 지키는 것은 공주님이 하실 일이 아닙니다. 왕께서 저희에게 공주님의 안위를 부탁하셨습니다. 저희가 책임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집사장의 말에 대공녀도 결국 마음을 돌렸다.

대공녀가 마음을 돌리는 것을 보고, 나는 집사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공국왕님께도 연락을 드렸으니, 올라오고 있을 겁니다.”

저번 삶에서도 수도 앞에서 물러선 공국왕이었다.

다른 사람 편에 보낸 내 말을 믿어준다면 이번에도 공국으로 회군을 할 터였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 선발대도 지금쯤 공국 경계에 도착했을 겁니다. 아이샤 공주님도 같이 계시니, 선발대와 합류해서 남쪽으로 내려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사단들이 먼저 움직였을 테니, 거기까지는 도착했을 터였다.

“다른 일들은 집사장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집사장은 급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할 일이 많았다.

북쪽으로 정찰병을 보내 내가 한 말을 확인해야 할 테고, 사실이 확인되면, 방어계획과 수도의 사람들을 남쪽으로 피난시켜야 할 터였다.

거기다 그 외에도 할 일이 가득하겠지만, 나는 그를 돕는 대신에 다른 할 일이 있었다.

“공자님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대공녀가 나에게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손님을 맞이해야죠.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갚아야 할 빚도 있습니다.”

나는 아쉬워하는 대공녀를 보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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