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제4편 마스터
나는 천천히 천막으로 다가갔다.
여러 명의 기사와 중년의 귀족. 그리고 대공녀와 그.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다들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공녀는 달랐다.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입을 달싹였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설마.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입 모양만 봐서도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황야에 가까운 넓은 벌판.
나는 천막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꺼내 들었다.
검을 잡는 내 모습에 기사들은 허리에 찬 검을 쥐었다.
몇몇 기사는 먼저 나설 생각에 그를 훔쳐보았다.
“아서라.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손을 저어 기사들을 말렸다.
그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나선 남자는 허리에 얇은 검을 하나 차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갑옷이 아니라, 평범한 외출복이었다.
단지, 지저분해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그는 막 중년으로 넘어갈 듯한 나이로 보였다.
“이 아이를 구하러 온 건가?”
그는 손을 들어 대공녀를 가리켰다.
여기까지 와서 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기사를 호위로 두고 있었군. 내가 없었으면 성공했을지도 몰랐겠는걸.”
그렇지는 않았다.
요새에서부터 필사적으로 나를 쫓는 자들이 있었다.
꽤 떨어뜨렸다고 생각했는데, 마나가 다가오는 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얼마 뒤에는 이곳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가 없다고 해도, 이런 추적자들을 달고, 대공녀와 함께 달아나기는 어려웠다.
“누구십니까?”
나는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저 정도 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바꿔볼까 하다가 그냥 내뱉었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 이번에도 다들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린 목소리라 그런 것일 터였다.
그리고, 대공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평범하게 돌아왔다.
“투레 폰 슈폰하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검주라고 불리고 있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뻗어 나오는 기세를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국인이긴 했지만, 나도 그 이름을 들어봤었다.
검의 주인, 검의 마스터로 불리는 그는, 검을 다루는 사람 중에서는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제국 기사의 정점이었다.
검 실력만으로 제국에서 백작이라는 자리를 차지한 사람.
20살 용사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길 것 같은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아마, 그라면 대전쟁 때였으면 용사라고 불리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말이 끝난 뒤, 나는 로브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했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대공녀님의 아카데미 동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난입을 막고, 1대1 대결로 몰고 가기 위해서는 나도 자신을 소개해야 했다.
다들 내 얼굴을 보고 무척 놀랐다.
어려 보이는 내 얼굴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동기라고? 정말, 대공녀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어린 기사라는 건가?”
검의 주인도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군. 그 나이에 그 실력이라니. 무척이나 아까운데. 차라리 제국 쪽으로 올 생각은 없는가. 이 아이도 데려오기는 했지만, 제대로 대우를 해 줄 듯하던데.”
검주의 권유라니, 평범한 기사였으면 감격했을 만한 이야기였다.
나도 공작의 평범한 서자였다면 심각하게 고민을 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제국, 조직과는 선을 넘은 사이였다.
“오면서 엉망이 된 공국을 보았습니다. 그 제국이 한 짓이라고는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내 말에 투레 백작은 옆에 있는 귀족을 쳐다보았다.
“마물로 피해를 본 영지들을 달랠 용도였습니다. 점령을 위한 게 아니라서 병사들을 자제시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지들을 달래기 위한 건가…….”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 마물들을 정리하고 온 나로서는 뭐라 하기 어렵겠군. 어차피 나도 제국인이니.”
이해해 달라는 얼굴이었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아쉬워서 꺼낸 말이었으니. 기사라면 잘못된 선택에도 책임을 져야 할 수밖에.”
다른 사람이라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백작의 말에 대공녀가 급하게 소리쳤지만,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요! 저는 괜찮아요!”
“내게서 도망치기는 어렵지. 그것 말고도 도망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군. 그건 저쪽도 아는 것 같고.”
뒤쪽에서 마나가 정말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나에게 나름 호감이 있는 것 같으니, 싸우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나는 백작에게 물었다.
“대공녀님은 왜 납치하신 겁니까?”
“그건…….”
“슈폰하임 백작님!”
백작이 대답하려고 할 때, 옆에 선 귀족이 백작의 말을 가로막았다.
“벽에도 귀가 있습니다. 포로로 잡게 되더라도 모르는 편이 좋습니다.”
귀족의 말에 백작이 혀를 찼다.
“포로라고?”
“어차피, 조금 더 신경을 쓰시면 사로잡으실 수 있으실 터이니…….”
“포로를 잡을 수 있으면 내가 여기서 권유를 할 리가 없잖은가. 잡아 놓고 꼬시면 그만이지.”
귀족은 백작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나로서도 살려서 잡기는 불가능해. 겉으로 드러난 실력도 아슬아슬한데. 딱 봐도 꿍꿍이가 가득하거든. 저런 자들은 생포가 어려워.”
귀족도 기사들도 다들 놀라서 나를 다시 쳐다보았다.
역시, 저 정도 실력이 되면 내가 숨겨 놓은 실력도 가늠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상대방이 실수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그런 실수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죽기 전에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어야 할 테니, 내가 아는 것은 알려 주지.”
친절한 백작이었다. 확실히 죽는 보람이 있을 듯했다.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대공녀의 능력은 알고 있겠지? 유물을 수리하는 능력 말이야. 나름 비밀로 했다고 하지만, 어머니 쪽 능력이 그쪽이라 제국에는 비밀로 하기가 어렵지.”
확실히, 제국은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런 능력자를 공국왕과 결혼하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대공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능력이 필요한 일이 있어. 고쳐야 할 유물이 있는 거야. 이 아이의 실력이 아니면 고치기 힘들다던데. 그게 너희 쪽 예언가가 한 말이지?”
백작은 옆에 있는 귀족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예언가라니. 설마 미래를 보는 그런 그 예언가를 말하는 건가?
분명, 저 귀족은 조직 소속 같은데. 설마 조직이 예언가가 있다는 건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요즘은 잘 안 맞는다고 하지 않았나?”
귀족은 포기한 얼굴로 백작의 말에 대답했다.
“예전에 하셨던 예언이었습니다.”
“하긴, 사람의 능력에 관한 부분일 테니, 변하지는 않았겠군.”
뜻밖의 좋은 정보였다.
이제는 잘 맞지 않는 예언을 하는 능력자를 데리고 있고.
“나는 남쪽 영지들을 돌아다니며 마물을 잡고 있었는데, 마침 거절하기 어려운 분에게서 요청이 들어와서 말이야. 한참 불만이었는데……. 이런 상대가 있을 줄은 몰랐어.”
검의 주인에게 요청을 할 수 있는 높은 사람이 소속된 조직이라.
역시, 제국과 깊이 연관된 조직이 맞았다.
거기까지 말한 백작이 허리에 찬 검 위에 손을 올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알렉스라고 했지? 어울려주기는 했지만, 자네는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지?”
이런, 이것까지 알아차리다니.
나름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실력자의 눈은 피하기 어려웠다.
“이제 곧 사람들이 올 테니까요.”
마나가 이제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내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은 성격이군. 많은 사람이 봐주길 바란 건가?”
그런 관종 같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따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그 순간, 숲에서 말들이 튀어나왔다.
히히힝!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숨을 헐떡이는 말을 타고 숲을 빠져나왔다.
선두에는 요새에서 나와 싸웠던 덩치 큰 기사가 있었다.
그의 옆에는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쥐를 닮은 남자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따라잡았습니다! 저 앞입니다!”
그 남자가 정확하게 나를 가리켰다.
그 덕분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를 추적한 것이 누구인지.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추적자의 얼굴만 확인할 수 있으면 되었다.
어떻게 추적한 것인지, 방법이야 나중에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기사들 덕분에 대화는 끝이 났다.
다행히 들을 이야기는 다 들어서 아쉽지는 않았다.
“워! 워!”
기사들은 천막 앞까지 달려와 말을 멈추었다.
다들 나를 공격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다들 내 앞에 선 사람을 보고는 난감해했다.
나와 싸웠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루트비히 단장이군. 오랜만이네.”
그는 백작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백작님이 붙잡고 계셔 주셨군요. 감사드립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지, 어차피 여기 있는 공국의 공주를 구하러 온 것이니.”
백작의 겸양에 그는 굳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동료들이 죽었습니다. 적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나를 쳐다보던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덩치 기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무리 백작님이라고 하셔도 저는 동료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백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닐세.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것 같은데. 전부 달려들어도 태반이 죽을 걸세. 그 뒤에 내가 끼어들라는 말은 아닐 테지?”
백작의 말은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양패구상이 될 거라는 말이었다.
백작의 말에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네? 설마……. 넌 어떻게 멀쩡한 거지?”
내가 그 이유를 알려줄 리가 없었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왔고, 확인할 것도 다 했다.
괜히 사람들이 끼어들기 전에 대결을 시작해야 했다.
대신 나는 검을 들어 백작을 가리켰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공녀님을 구하기 위해 알렉스 데 그레시아가 정식으로 투레 폰 슈폰하임님께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신청한 결투였다.
상대방이 거절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 어려웠다.
“좋아, 받아들이지. 투레 폰 슈폰하임은 결투를 받아들이겠다.”
백작은 냉큼 결투를 받아들였다. 그도 나와 싸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덩치 기사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리고, 기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백작은 검집을 쥐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검이 뽑혀 나오는 순간, 싸움이 시작될 것 같았다.
실력 차는 확실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질 수는 없었다.
나는 목걸이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