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제2편 추적 (1)
요새 중앙에 세워진 성의 최상층에는 한 방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방에는 여성 한 명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여성은 깨끗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촛불만 일렁이는 조용한 방.
그때, 방을 밝히는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휘잉.
작은 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창문가에서 들려오는 아직 어린 나이일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
“잘못 찾아온 건가? 아니면 함정인가?”
그 말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여성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어 천천히 손을 내린 그녀는 얼굴을 들고, 목소리가 들려온 창가를 바라보았다.
열린 창가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외벽을 타고 이 높은 방까지 올라와 소리 없이 창문도 열었던 것이다.
남자의 로브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덩치로 신분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일반인보다는 조금 덩치가 컸지만, 근육이 가득한 기사들보다는 작아 보였다.
로브를 둘러쓴 남자는 한 손에 단도를 쥐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로브 안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함정이었군.”
“맞아요.”
여자는 그의 말에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공녀가 입던 옷을 입었고,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화장을 했지만, 그녀가 대공녀인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함정에 제 발로 찾아오다니.
변장할 때 화를 낸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애매한 분장 덕분에 원래 미모가 다 깎여버린 여자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분장으로 나를 속일 생각을 하다니.
은은한 촛불로 다른 부분을 숨길 생각이었을 테고,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은 속았을지도 모를 변장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의미 없는 변장이었다.
아니, 내가 이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니, 의미 있는 분장이려나…….
사실, 이 방 근처에 왔을 때는 그냥 다른 사람의 방이라고 생각했었다.
마나와 감각으로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내가, 오랜 시간 같이 다녔던 대공녀의 마나를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라, 슬쩍 창문 틈으로 살펴만 보자고 했는데, 황당하게도 방 안에 대공녀와 꼭 닮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었다.
우연히 비슷하게 차려입은 것일 수도 있고,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함정일 수도 있다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대공녀의 마나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함정이라도 있으면,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듯했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대답과 함께 사방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마나가 가득 담긴 살기들.
확실히 함정다웠다. 방 주변에는 상당한 실력자들이 숨어 있었다.
쾅!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거대한 덩치의 남자였다.
그는 천장을 부수며 방안으로 떨어졌다.
그가 내려선 곳은 바로 내가 들어온 창문 앞이었다.
그는 함정답게 제일 먼저 내가 도망칠 곳을 막아섰다.
그리고, 복도를 통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 둘과 여자 한 명.
남자 둘은 귀족 기사로 보이고, 여자는 귀족 능력자였다.
딱 봐도 다들 대단해 보이는 능력자들이었다.
“내기는 내가 이겼어. 다들 돈 내놓는 거 잊지 마.”
마른 남자가 같이 들어온 사람들에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 인상을 썼다.
“젠장,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잖아. 대공녀를 도와주던 놈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뒤늦게 쫓아온다고?”
상체를 벗어젖힌 육체 능력자가 투덜거리자,
“차라리 왕궁에 쳐들어갔을 때 옆에서 지키고 있었으면 내가 따는 건데. 왜 이렇게 늦게 와서 돈을 잃게 만드는 거야.”
날카롭게 생긴 여자 능력자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게 나를 가운데 두고, 방 안에 들어온 자들은 서로 떠들어댔다.
마치, 이미 나를 잡은 것 같은 말투들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확실히 우리를 방해하는 녀석이 맞아? 좀 비실거리는 것 같은데.”
여자가 두건을 눌러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말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나.
그리고, 방안의 살기는 아직 그대로였다.
역시, 말과 달리 저들은 긴장을 늦추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른 근육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고문 같은 거로 시간을 보내게 하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해주었으면 좋겠어. 네놈은 어디 소속인지, 너 같은 놈들이 더 얼마나 있는지.”
아무래도 대공녀를 구하려는 사람을 잡기 위한 평범한 함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으니,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왕국과 공국에서 계속 일이 실패해서 우리는 방해하던 놈들이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계속 꼬리도 보이지 않아서 다들 답답해했거든?”
확실히 이들은 조직의 일원이 분명했다. 더구나 이들도 내가 조직을 찾았던 것처럼 나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작게나마 꼬리를 잡을 수 있었지. 대공녀를 데려가기 위해 용병으로 참여했던 버나드 자…….”
“비드.”
“아, 비드의 시체를 발견했거든. 그동안 실체를 보지 못했던 방해자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거지.”
결국, 비드의 시체가 발견된 건가.
하기야, 버려진 동네라고 생각하고 깊게 묻지도 않았으니, 나중에는 발견될 거로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내다니.
아무래도 조직은 여태 그의 시체를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그것보다, 왜 이리 열심히 설명해주는 걸까? 더구나 다잡은 뒤에 하는 고문용 설명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를 방해하고 대공녀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 거야. 이번에 대공녀를 데려오는 데도 방해가 없어서 잘못 알았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짠하니 나타나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
이해는 안 되지만 고마운 설명이었다.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듣지 못했기에 결국 내가 물어봐야 했다.
“대공녀는 어디에 있지?”
내 목소리를 듣고, 다들 표정이 묘해졌다.
좀 더 가성을 썼어야 했나?
다행히 마른 남자는 반문을 하는 대신에 이번에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 귀중품을 다른 것들과 같이 운반할 줄 알았어? 다른 녀석들이 데리고 제국으로 달려가고 있지.”
대공녀는 아예 요새에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더 조직, 아니 제국은 대공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것보다, 지금 쫓아가면 따라갈 수 있으려나…….
나는 슬쩍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창문 앞에는 거대한 덩치의 기사가 아직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대공녀를 흉내 내고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원했던 사람이 왔으니, 나는 그만 가도 되죠?”
여자의 말에 마른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벌써 다 확인한 거야?”
여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결국, 마른 남자가 화를 냈다.
“그런데 왜 벌써 빠지려는 거야. 내가 왜 여태 주절주절 떠든 건데.”
“아니, 저는 싸움에 능한 능력자도 아니고, 저 사람을 잡는 데 방해만 될 테니…….”
그렇게 두 사람이 떠들 때, 갑자기 등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 말이 없었던 덩치의 목소리였다.
“설마……. 안 먹힌 건가?”
생각보다 지적인 목소리였다.
천장을 뚫고 내려와서 무식하기만 한 덩치인 줄 알았는데, 내 오판이었다.
“정말이야? 하나도 안 보였어? 그래서 도망치려는 거야?”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입을 딱 벌렸다.
“제 잘못이 아니에요. 이렇게 머릿속이 안 보였던 때는 거의 없었는데……. 들킨 것도 아니고 일부러 막은 것도 아닌데 하나도 안 보여요. 이런 적은 왕족분들이나 전에 잠깐 뵀던 왕실 기사단장님만 그랬던 건데…….”
이번에는 나도 놀랐다.
적이 여태까지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은 것이 전부 이유가 있었다.
내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상대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라니.
그녀가 실패하지 않았으면 내 비밀을 술술 흘러나갔을지도 몰랐다.
어디엔가 그런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능력이었다.
정신 능력에 강한 면역이 있었던 덕에 막아낼 수 있었지만, 이건 그냥 놔둘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쿵.
뒤쪽에 서 있던 덩치가 건틀릿을 낀 양손을 마주쳤다.
양손에서 퍼져나온 마나가 방안을 훑고 지나갔다.
내 주위로 스파크가 터져나갔다.
그것이 신호인 모양이었다. 방안에 들어왔던 자들의 기세가 변했다.
내 예상과 달리, 덩치가 대장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기세를 올리고 내게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몸을 피하는 대신, 손을 까닥였다.
슈악!
“피해!”
내 손에서 단도가 쏘아졌고, 덩치가 그것을 보고 고함을 질렀지만, 너무 늦었다.
퍽!
단도는 여자의 머리에 정확하게 박혀 들어갔다.
여자가 쓰러지고, 내 옆구리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팟!
역시, 단도를 날리고 피하기에는 포위한 적들이 너무 강했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니, 상처가 작지 않아 보였지만,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미친!”
“알리치아!”
“저놈 죽여! 고문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워!”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자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은 너무 자만했다.
자신들의 실력을 과신했고,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몸을 아낄 거라고 믿어버렸다.
적들은 고함을 질러댔지만, 움직임이 굼떴다. 진짜 나를 죽여야 하는지를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계속 움직였다.
이번 목표는 여자 능력자. 나는 맨몸으로 능력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아쉽게도 육체능력자가 아니라 움직임이 너무 느렸다.
나는 들어 올린 손 아래로 몸을 꾸겨 넣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습관이 된 주문을 되뇌었다.
“소환.”
앞으로 내민 손에서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푹!
단검은 여자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허물어지는 여자의 손에는 굵은 얼음 창이 쥐어져 있었다. 동시에 몇 도는 낮아진 것 같은 방.
여자는 얼음계열의 능력자인 모양이었다.
뒤이어, 검들이 날아들었지만, 나는 몸을 돌리며 전부 쳐낼 수 있었다.
내 손에는 몸을 돌리며 유물 주머니에서 꺼낸 대검이 들려있었다.
“좁은 방에서 기사 단장급의 실력자 셋과 싸운다라.”
기습으로 둘을 해치웠지만, 남은 저 세 명도 만만치 않았다.
역시 제대로 준비한 함정이었다.
거기다, 싸움이 난 줄 알고 몰려오는 기사와 병사들까지. 이번의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역시 두렵지 않았다.
다시 살아난다는 확신은 이렇게 무서웠다.
나는 긴장도 하지 않고, 치솟는 살기 속에서 차분히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 여기를 빠져나갈 때였다.
나는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