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제1편 제국의 난입 (2)
왕은 뜻밖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렉스 기사?”
“그분이 왕궁에 남아 있던 제국 기사들을 쓰러뜨리고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공국왕은 당돌한 어린 기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소년은 공주에게로 돌아갔을 텐데?
“그가 지금 여기 있나?”
어떻게 도와주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식구를 구해주었으니, 감사를 표해야 했다.
하지만, 집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공녀님이 끌려가셨다는 말을 듣고, 왕궁을 떠나셨습니다.”
“프리다 이야기를 듣고?”
“말이 안 되는 생각 같지만, 대공녀님을 구하시기 위해 제국군을 따라가신 것 같습니다.”
공국왕은 황당한 얼굴로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적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러 떠난 기사라니.
이건, 어렸을 적에 보았던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내용이었다.
“그 정도로 프리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분명 저번에 자신의 위치가 낮아서 프리다에게 누가 된다고 말했었는데…….”
옆에서 아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 가관이었다.
현실을 잘 알고 있다는 소리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소리였다.
그냥 기사도 아니고, 신분이 낮은 기사가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라.
유치하면서도 뭔가 슬며시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런 기분 덕분인지, 왕은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우선 박살 난 공국을 수습해야 했다.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았다.
왕은 움직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국으로 납치된 사람들. 그 가운데 프리다, 그의 딸이 있었다.
‘알렉스 기사. 딸을 부탁하네.’
그는 처음으로 마음속이나마 다른 이에게 부탁했다.
* * *
공국왕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한참 그 하늘 아래에서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국경을 넘어 지금 막 제국 땅에 들어서고 있었다.
몰래 국경을 넘는데 뻔뻔하게 길로 갈 수는 없으니, 나는 길과 떨어진 숲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제국 땅이라고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북쪽 지방이라서 그런지 단풍보다 침엽수가 더 많이 보였다.
그리고, 기온도 더 낮았다.
하지만, 나는 추운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온몸에 김이 피어나고, 숨이 가빠왔다.
벌써 며칠째 자지도 않고 움직이는 것인지.
체력에는 자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움직이면 힘든 게 당연했다.
이피로스군이 있던 곳에서 공국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왔고, 왕국에서 한차례 전투를 벌이고, 또 이렇게 제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말을 타서는 도무지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아서, 마나를 활용한 달리기로 열심히 달려왔건만, 아쉽게도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쉴 수는 없었다.
공국을 지나오면서 본 폐허는 내 생각 이상으로 참혹했다.
점령이 아니라 피해만 주고 떠나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느껴지는 흔적들.
초강대국이라면 전생의 미국 같은 곳을 떠올렸던 나에게 이 세상의 현실을 다시 알려주는 폐허들이었다.
점령할 생각이 없는 차르 제국은 전생의 대제국이었던 몽골 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동안 조직과 제국을 어느 정도 분리해서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어.”
숲을 달리며 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수도를 빠져나온 이후 계속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니기만 했었다.
오랫동안 회귀를 하지 않게 되어 너무 마음이 풀어져 있었다.
그래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저장 시점도 이번에 저장해버렸고.
이럴 줄 알았으면 시점을 저장하지 않는 건데…….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레스티에게서 제국의 침공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대공녀를 돕고 싶긴 했지만, 지금 나는 공주의 호위 기사였고, 부대의 기사였다.
거기다, 대공녀가 있는 공국은 너무 멀었다. 이제야 소식을 들었으니, 찾아간다고 해도 너무 늦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이유들로 쉽게 고민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공주의 말로 끝낼 수 있었다.
“프리다 대공녀님은 제 친구기도 해요. 다녀오세요.”
공주의 허락이 떨어지니, 마음속 갈등은 사라져버렸다.
다행이었다.
이제 공국으로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제국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도 파악해야 했고, 우리 군이 움직일 방법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솔직히 그런 것은 다 부차적이었다.
나는 친구, 동료를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남들과 다른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동료를 구하는 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내가 따로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대가 이피로스군에 묶여 있는 상황이었다.
공국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정찰하러 다녀오겠다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몇 귀족은 내가 떠난다니까 기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나는 대공녀를 찾기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대공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구하러 가는 길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는 한번 실패하기도 했었다.
더구나 지금은 실패했던 그때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다.
앞에는 제국군 대부대가 있을 터였다.
솔직히 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스스로 약속했던 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었고, 실패하더라도 뭔가 얻어가는 게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계속 앞으로 달려 나갔다.
* * *
제국의 중부 남쪽에 자리한.
안할트 요새.
요새는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전투 요새였지만, 오랜 세월 공국과의 무역으로 이제는 전투 요새라기보다 무역 거점으로 여겨지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런 요새였지만, 오늘 그 요새는 수백 년 만에 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환하게 밝혀진 불과 성벽 위에 빼곡히 꽂혀 있는 깃발들.
깃발 아래에는 병사와 수습 기사들이 눈을 밝히며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요새 주변에도 천막이 가득했다. 모두 병사들의 숙영지였다.
이들은 모두 공국을 털고 돌아온 제국의 병사들이었다.
숙영지도 요새도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작전의 성공을 자축하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외딴 요새의 구석 성벽 위에도 수련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원래는 병사들이 서는 곳이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 더 위험할 거라고, 야근 장교가 수련 기사들을 이곳에 세운 것이었다.
당연히 경계를 서게 된 수련 기사들은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두 수련 기사 중 하나가 요새 안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리다,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자신처럼 투덜거리는 소리였는데, 대상이 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너무 과한 게 아니었나 몰라.”
뜬금없는 소리에 기사는 동료에게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공국 이야기지 뭐.”
동료의 말에 기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지,
교단도 제국의 행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왕국을 점령하거나 징계할 때와 달리 전부 죽이고 쓸어오기는 했지만, 이것도 전부 작전의 일환이었다.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설마, 어디서 또 왕국 평등론 같은 것을 듣고 온 건가.
내일 기사에게 보고하리라고 다짐하면서 그는 동료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 이번 작전은 저번에 있었던 마물 습격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것이었잖아. 제국이 그렇게 피해를 보았는데, 자기들만 멀쩡하다니. 충분히 혼내 줄만 했다니까.”
출발하기 전에 서기관이 떠든 이야기를 또 말한 것일 뿐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에게 피해를 본 영지가 몇 개인지. 수백 년만의 피해에 제국이 들썩였었다.
거기다 왕국들은 아무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말에 각종 소문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왕국들이 숨겨진 주술을 썼다던가, 마물들을 유혹하는 능력을 썼다는 말도 돌았고, 봉인된 마왕에게 소원을 빌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도 그중에 맞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피로스하고 카를로스 왕국이잖아.”
“공국이나 왕국이나 같은 놈들인데 뭐.”
동료의 말에 그는 코웃음 쳤다.
카를로스 왕 동생이 만든 나라인데 그게 다를 리가.
거기다 이번에도 왕국을 먹겠다고 공국왕이 출진했다고 들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동료를 노려보았다.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기가 귀찮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접적으로 동료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뭐가 불만인데.”
동료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요새에 도착했는데, 왜 내가 여기서 경계를 서야 하냐 이거지. 나도 놀고 싶다고.”
동료의 말에 그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헐, 뭔 소리인가 했더니, 그냥 헛소리였잖아! 괜히 헷갈리게 하고 있어.”
괜한 헛소리에 마음을 졸인 것 같아서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보고할 일이 아니어서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조금만 기다려. 조금 뒤에 다음 조가 올라올 테니까.”
그가 친절히 이야기해주었지만, 이번에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지…….
그는 짜증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동료가 있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로브를 둘러쓴 남자.
그의 손에는 짧은 단도가 들려있었다.
“적……!”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지만, 그는 채 말을 꺼내기 전에 목이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상대의 손에 있던 단도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이 왜 뜨거워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휴……. 병사 대신에 수련 기사를 세웠을 줄이야. 큰일 날 뻔했네.”
쓰러지는 수련 기사를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 기사라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들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지금도 조금만 늦었으면 수련 기사가 소리를 쳤을 터였다.
술판이 벌어진 것 같아서 안심했는데, 역시 제국은 달랐다.
“그보다, 마물 핑계를 댔다는 건가?”
제국 입장으로는 꽤 괜찮은 핑계이긴 했을 것 같지만, 다른 왕국이 보기에는 어이없는 핑계일 뿐이었다.
혼자 마물에 공격당했다고 보복을 하다니…….
그럼 그동안 마물에게 당해왔던 왕국들은 제국에 보복을 했어야 했다는 건가?
제국의 엉뚱한 화풀이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마물의 습격에는 나도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탓은 아닌 듯함.”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성벽 너머 요새 안을 살펴보았다.
화려하게 밝혀진 요새.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은 환한 빛 가운데에서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조용한 시간이 아니었지만, 요새에 스며들려면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요새는 수백 년간 증축이 이어져 와서인지 중앙에 성처럼 되어 있었다.
환하게 켜진 불들.
하지만 그 불들은 낮은 층만 밝히고 있었다.
높은 층은 침실들이었는지 모두 불이 꺼져 있었고, 한 곳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봐야 할 곳이 정해졌다.
나는 다시 단검을 소환한 뒤에 성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벽을 내려가는 내 등에는 배낭이 메어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죽은 수련 기사들은 이미 유물 배낭에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