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제25편 제국의 난입 (1)
넓은 벌판.
벌판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피로스 왕국과 카를로스 왕국의 병력이었다.
수천의 병력이 목책을 세우고 창을 겨누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진영에서는 살기나 긴장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두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언덕 위에서도 양쪽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공주가 그 모습을 보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얼마 동안 지켜보긴 했는데, 그 왕자의 말이 사실이군요.”
공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마 전 이피로스 왕국의 진지를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전에 만났었던 이피로스의 왕자는 전령으로 방문한 나를 쉽게 만나 주었다.
안내된 천막에는 왕자가 있었고,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우리는 생각보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짧은 사이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기사에게 축복을. 오랜만에 보는군.”
“기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뒤로 계속 이름을 날리는데 잊을 리가 없지.”
신기하게도 왕국 동부에서의 활약이 이웃 나라까지 알려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첩자가 활동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아는 사람이 와서. 그것도 협상이 되는 사람이라……. 역시, 나는 운이 좋은 모양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젊은 왕자는 나를 보며 싱글거렸다.
그는 나를 앞에 앉게 하고,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무슨 자신감인지.
물론, 들어오기 전에 무기는 맡겨 놓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나는 이제 꽤 알려진 기사였다.
실제로 유물 주머니가 가슴안에 있으니 비무장도 아니었다.
그런 사정은 신경도 안 쓰는지, 그는 직접 포도주를 들어, 내 앞의 잔을 채워주었다.
“왜 왔는지야 뻔하니, 우리가 왜 카를로스 왕국을 침범했는지 알려주지.”
따로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카를로스 왕국을 침범한 것은 왕국군, 아니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의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서였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직 1 왕자가 밀리면 안 된다는 저 위의 생각 때문이겠지.”
그의 말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저 위라는 것은 당연히 제국일 테고.
그는 이피로스의 지시, 아니 제국의 지시로 우리 왕국을 침범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꺼낸 이야기에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셔도 되겠습니까?”
왕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그러다가 진짜 전투라도 벌어지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냔 말이지.”
왕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싸우기 전에 전부 이야기하고 서로 조율하는 편이 백번 나아.”
이 왕자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왕자는 시키는 대로 일은 하지만 그 안에서 자기 손해는 절대로 안 보는 인물이었다.
소로카 요새 때에도 협상을 통해서 이득을 얻어 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소로카 요새에 찾아왔을 때보다 왕자의 위치가 훨씬 올라간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럼, 이대로 자리만 지키겠다는 말입니까?”
“공주님의 병력이 이 앞에 그대로 있는다면! 하지만, 카를로스 왕국이 병력을 빼면 우리도 더 나갈 수밖에 없어.”
우리 병력을 묶어놓기 위한 병력이었으니, 병력이 움직이는 것을 놔둘 수 없다는 것은 이해했다.
“이대로 대치한 채로 시간을 보내주면 돼. 기회를 놓쳐 아쉽겠지만, 내전 중에 우리와 싸워서 병력을 잃는 것도 곤란하잖아.”
왕자의 말대로였다. 앞으로 왕자들과 싸워야 하는데, 여기서 병력의 손실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이렇게 당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다.
침략을 당한 것도 우리 왕국이었고, 묶여있는 것도 우리 병력이었다.
나 혼자였으면 깽판을 벌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전령으로 온 상황이었다.
“길어야 두 주 정도가 될 거야. 조금 열기를 식힌다고 생각하라고.”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왕자의 말은 꽤나 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나는 이피로스의 둘째 왕자를 머리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경계를 계속 섰지만, 이피로스 군대는 진지만 계속 강화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2 왕자가 1 왕자에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제대로 싸우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너무 빠른, 일방적인 결과였다.
거기다, 그 뒤에도 2 왕자가 계속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소식에 여유롭던 지휘부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꼴이 되어버렸다.
이대로 대치하지 말고 이피로스군과 승부를 봐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이피로스군을 무시하고 수도로 향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의견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의견들이었다.
여기 모인 병력은 어찌 되었건 여러 귀족이 모아온 병력이었다.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할 수도, 그렇다고 영지를 외국군대의 손에 넘겨줄 수도 없었다.
거기다, 그 와중에 공국왕이 수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지휘부도 참모들도 머리만 쥐어뜯을 뿐이었다.
공주가 지금 이렇게 언덕에 올라온 것도 그것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도 나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쉽지만 이런 대규모 내전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우울한 얼굴로 진을 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언덕 아래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레스티였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스티가 저렇게 열심히 달려오는 것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우리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는 사이, 레스티는 우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헉, 헉……. 급한 소식이……. 급한……. 헉.”
“숨 좀 가다듬고 말해요.”
“헉, 헉, 아……. 네……. 후유…….”
공주의 말대로 숨을 크게 내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신도……. 아니 아는 용병에게서 중요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레스티는 셀린 교단의 신도에게서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데 저렇게 급하게 온 것인지. 공주와 나는 레스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국이 공국을 공격했답니다.”
응, 뭐라고?
“대규모 공격이었다고 합니다. 제국 국경과 맞닿아 있던 공국 수도는 바로 무너지고, 사람들이 남쪽으로 달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레스티의 말에 공주와 나는 서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우리가 이렇게 묶인 뒤에 공국도 제국이 뭔가 제재를 가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고, 공국 병사들이 수도로 다가가고 있다는 소식만 들려왔었다.
그래서 뭔가 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인제 와서?
제국은 공국의 진군을 막기에는 너무 늦게 일을 벌였다.
분명 다른 왕국에 내전에 끼어들었다는 불명예만 가득 지게 될 터였다.
“프리다 님은 괜찮으실까요?”
공주의 말에 대공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제국은 전에도 대공녀를 노린 적이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대공녀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공국을 쳐들어갔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과한 생각이었다.
“공국왕도 분명 소식을 들었을 텐데……. 어떻게 할지 혹시 소식을 들었나요?”
1 왕자가 수도를 떠났다는 소리에 공국왕은 나머지 병력을 데리고 직접 친정에 나섰었다.
당연히 공국 안은 텅텅 빈 상황이었고.
공국왕이 직접 나섰다는 것은 제국이 뭔가 보장을 해주었다는 말일 텐데……. 그런데 그 제국이 빈틈을 노리고 공격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제국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레스티가 대답했다.
“공국왕은…….”
* * *
“돌아간다.”
말과 다르게 공국왕은 멀리 보이는 카를로스 왕국 수도의 성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공국왕의 눈에는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내가 세르지 왕자, 아니 1 왕자와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지.”
그는 한 자 한 자 씹어먹듯이 억지로 말을 내뱉었다.
눈앞에 보이는 목표.
이제 그 목표까지 겨우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걸 차지한 뒤에도 남은 일은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저 도시를 차지할 생각으로 준비하고 노력한 시간이 얼마였는데.
왕국의 수도는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치안을 지키는 반쪽짜리 왕실 기사단은 중립을 선언한 상황이었고.
그나마 있던 1 왕자 파 귀족들은 그가 여기까지 오기 전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그냥,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하지만,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나라가 공격받아서 수도를 빼앗겼다.
그는 그 나라, 공국의 왕이었다.
그가 세우고, 가꿔온 나라.
그의 꿈은 카를로스 왕국이었지만, 그의 가족은 훌리안 공국이었다.
왕이 왕국을 지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미친 듯이 아쉽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했다.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를 코앞에 두고, 공국왕은 병력을 돌렸다.
제국에게 침략당한 자신의 왕국으로 공국왕은 말을 달렸다.
점령했던 여러 영지를 모두 버려두고, 공국왕은 수도와 공국을 잊는 대로로 군대를 몰았다.
빠르게 나아가는 군대.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빠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너무 늦었다.
공국군이 다시 공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제국군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뒤였다.
마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았다.
가지고 있던 식량과 재물은 모두 빼앗기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제국군에 잡혀갔다.
한철 메뚜기떼 같은 행태. 제국군답지 않은 짓이었다.
“더 싸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겠지.”
폐허가 된 마을을 보며 공국왕은 중얼거렸다.
병사들도, 기사들도, 아들의 표정까지 어두운 것을 보니, 제국은 목적을 이미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공국의 수도도 다르지 않았다.
반쯤 무너졌던 성벽은 이제 잔해만 남은 것 같았다.
상점가도 폐허로 변했고, 길가에는 시체와 부상자만 가득했다.
수도가 쑥밭이 된 것을 보고, 왕도 왕세자도 반쯤 포기하고 말았다.
도시가 이런데 멀리 보이는 왕궁도 온전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왕궁에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멀쩡했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왕궁에는 집사도 하녀들도 많이 살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왕이 궁 앞에 도착하자, 상처를 입은 집사장이 나와 왕을 맞이했다.
“수고했다. 왕궁은 지켜낸 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나마 멀쩡한 왕궁을 보니, 그런 희망을 가질 만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집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왕궁도 점령을 당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끌려갔습니다.”
공국왕은 나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한 명 꼭 나와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프리다도 끌려간 건가?”
“……네.”
공국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공국왕은 머리를 흔들고 다시 물었다.
점령을 당했는데 이렇게 다들 멀쩡하다니.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런데 왜?”
집사장은 짧은 공국왕의 질문을 이해했다.
“수도를 철수할 때 제국군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갔는데, 왕궁에서는 저희를 구해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구해준 분?”
“알렉스 데 그레시아 기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