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74화 (274/563)

제274화

제24편 확전 (2)

이피로스 왕국.

몇십 년 전 마물 왕의 난입으로 멸망 직전까지 갔었던 왕국으로, 그 당시 제국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났었다.

그리고, 그 왕국은 지금도 제국의 위성국으로 불릴 정도로 제국의 영향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피로스 왕국이 홀로 결정을 내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겠네요.”

공주가 언덕 아래, 넓은 분지에 펼쳐진 병력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카를로스 왕국의 영토.

하지만, 분지에는 이피로스 왕국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 왕국의 병력치고는 많지 않은 이천 정도의 병력이었지만, 훈련도 잘되어 있었고, 기세도 나쁘지 않았다.

나도 공주와 같이 적진지를 살피며 지난 일을 떠올렸다.

수도를 향해 출발한 그 날, 우리는 동쪽의 영지들이 보낸 급보를 받게 되었다.

왕국 동쪽에 있는 이피로스 왕국이 대대적으로 침공을 했다는 소리였다.

어이없는 이야기였지만, 여러 영지에서 동시에 날아온 급보에 우리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의 기반은 이곳 왕국의 동쪽 지방이었고, 이피로스 왕국에서 영지 둘만 지나면 그레시아 공작령이었다.

더구나, 다른 왕자들과의 싸움은 내전이었지만, 이피로스 군은 외국의 침략이었다.

쳐들어온 외국군을 버려두고 수도로 진격하는 것은 왕족의 명예에도 큰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병력을 몰고 빠르게 달려와 보니, 지금 이렇게 이피로스 왕국군이 우리 왕국 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문제는 분명, 먼저 국경을 침범한 것이었지만, 지금 분지에 펼쳐진 진형은 공격에 나선 군대가 할만한 진형이 아니었다.

긴 목책과 늘어선 각종 장애물.

아무리 봐도 저건 방어를 위한 진형이었다.

“결국, 시간 끌기인가?”

언덕에 같이 올라왔던 공작도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우리가 수도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일까요?”

“그럼, 이피로스 왕국과 1 왕자가 연계했다고 생각해야 하나…….”

공주의 말에 공작이 중얼거렸고, 벤자민 선배가 공작의 말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제국과 연계를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벤자민은 이제 부대의 참모로 제대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물론, 어린 나이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하는 때도 많았지만, 공주와 친한 선배에다가 공식적으로도 공주를 따르는 왕국군들의 참모장이어서, 모두 겉으로나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벤자민의 말에 언덕에 오른 모든 사람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제국과 1 왕자가 연계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1 왕자의 세력이 강해졌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그 부분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왕세자가 제국과 연계했다는 그 부분에 모두 기분이 안 좋아진 것이었다.

“설마, 이피로스처럼 제국의 위성국이라도 될 생각인가.”

공작도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고,

“말도 되고, 좋은 계획이긴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계획이군요.”

벤자민마저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였다.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들은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왕국을 지켜왔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귀족들에게 왕세자와 제국의 연계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니, 확인될 때까지는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내가 보기가 확실해 보였지만, 공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믿기가 어려운 일인듯했다.

다만, 바로 확인해 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셀린 교단의 신도를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모두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내가 손을 들었다.

“적진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황을 알아볼 겸 전령을 제가 맡겠습니다.”

꽤 먼 거리였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다른 병사와 기사와는 차이가 큰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척이나 화려한 갑옷. 왕족이나 입을 만한 갑옷이었다.

하기야, 이피로스 왕국의 왕자이니 그런 화려한 갑옷을 입는 게 당연했다.

소로카 요새에서 보았던 이피로스의 왕자. 막스 이피로스가 적들 가운데 있었다.

내 요청은 바로 수락되었다.

나는 한 손에 깃발을 들고, 적진지 앞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적 진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말을 멈추고 크게 외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정말 뜬금없을 때 등장한 메시지창이었다.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을 설정하시겠습니까?>

거기다, 문구도 특이했다.

위치도, 시간도, 나에 대한 특정한 이벤트도 아니었다.

내전은 예전에 시작되었는데, 이제야 이런 문구라니.

우리와 개념이 조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어, 따로 생각해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메시지창을 보고 “예”라고 대답했다.

수도에서 나온 뒤로 해나간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그중에는 공작부인 일처럼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고민할 시간이 많았다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메시지창을 치우고, 나는 크게 외쳤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이자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가 전령으로 찾아왔다! 막스 왕자님께 안내를 부탁한다!”

마나를 실은 내 말이 멀리 퍼져나갔다.

이피로스 군의 진지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고, 뒤이어 기사가 진지 밖으로 말을 달려왔다.

“왕자님이 전령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다행히 왕자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안내하는 기사의 뒤를 따르던 나는 방금 전에 보았던 메시지창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상황이 상황이라 대충 넘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내전도 이상했고, 지금 등장한 것도 이상했다.

이곳에서 위험한 일이 생긴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없는 곳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걸까?

하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왕국 전체가 휘말린 내전에 비하면 나는 작은 개인일 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 * *

알렉스가 메시지창을 보던 그 시각.

왕국 반대편에서는 두 왕자 간의 전투가 막 벌어지던 참이었다.

왕국 서부 중앙. 곡창지대로 유명한 서부 영지 중앙에서 두 왕자의 군대가 맞부딪쳤다.

이 영지에 먼저 도착한 것은 2 왕자였다.

더구나 영지도 2 왕자를 지지하는 영지였고,

2 왕자는 싸우기 좋은 지역을 먼저 선점했고, 영주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방어 진형을 갖추었다.

방책을 쌓고, 병사들을 훈련하고, 정찰을 보내고.

그는 전술에 능란한 장군들과 함께 열심히 전술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2 왕자가 준비하는 사이에 1 왕자도 그 영지에 들이닥쳤다.

2 왕자는 차분히 회전에 대비했지만, 1 왕자는 2 왕자에게 어울려주지 않았다.

1 왕자는 전령을 보내 예의를 갖추지도 않았고, 선발대를 보내 간을 보지도 않았다.

멀리 방책을 본 1 왕자는.

“모두 공격! 이대로 적을 짓밟는다!”

그대로 돌격을 명한 것이었다.

어이없는 돌격.

2 왕자 쪽은 황당해했지만, 더 황당한 것은 그 뒤였다.

1 왕자의 기사단 돌격에 2 왕자의 중앙 부대가 목책과 함께 순식간에 돌파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을 준비하고, 귀족들이 능력을 발휘할 틈도 없었다.

쏟아져 내리는 귀족들의 능력에 목책이 박살 나고, 그 사이를 1 왕자를 지지하는 왕실 기사들이 쓸고 지나간 것이다.

2 왕자가 준비했던 여러 장애물도, 치밀한 전술도 소용없었다.

그 모든 것은 1 왕자 쪽의 기세를 이기지 못했다.

중앙이 돌파된 부대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겨우 몇 번의 훈련으로 서로 다른 귀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었다.

겁에 질린 귀족들은 자신이 데려온 부대를 이끌고 진영을 이탈했고, 용병들은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독전대 역할을 맡고 있던 기사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한번 무너진 진영을 되돌릴 수 없었다.

황당한 얼굴로 무너지는 진영을 보던 2 왕자는 멀리서 기사들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1 왕자를 보게 되었다.

1 왕자는 검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다 죽여라! 전리품은 싸움이 끝난 뒤에 전부 나누어 줄 테니, 지금은 한 놈이라도 더 죽이는 데 집중해라!”

미친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

저기서 검을 휘두르는 남자는 만사가 지루해 보이던 1 왕자가 아니었다.

1 왕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1 왕자의 광기가 가득한 목소리는 이런 전장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내가 틀린 것일까…….”

2 왕자는 멍하니 자신의 형을 쳐다보았다.

“후퇴해야 합니다!”

그런 그를 같이 있던 기사와 귀족들이 끌고 갔다.

그들의 말에 2 왕자가 정신을 차렸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겨우 첫 싸움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2 왕자는 형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번 밀리기 시작한 전선은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2 왕자는 영지들을 잃고 계속 뒤로 물러나야 했다.

더구나, 뒤를 쳐주어야 할 그레시아 공작과 공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2 왕자 쪽이 절망에 빠질수록 공격하는 1 왕자 쪽은 활력이 넘쳤다.

뒤늦게 출발한 귀족들이 승리 소식을 듣고, 열심히 본진에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이 이어졌지만, 1 왕자의 부대는 계속 숫자가 불어났다.

1 왕자 부대의 숙영지 중앙.

화려하고 커다란 천막에는 환한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 천막 안에서는 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동안의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지금 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은 더는 그런 이름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천막의 안쪽.

제일 높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왕세자는 한참 귀족들이 건네주는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이피로스 왕국을 움직이시다니. 왕세자께서는 미리 준비하고 계셨군요.”

“왕세자께서는 용맹한 기사에 뛰어난 지략까지. 초대 왕에 버금가는 왕이 되실, 아니 왕이십니다.”

“왕의 명성은 대륙 전체를 진동하고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왕세자 옆에 있는 귀족들의 아부는 끝이 없었고, 왕세자도 계속되는 승리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그런 아부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다른 왕국. 그것도 제국과 손을 잡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조금 위험한 게 아닌지…….”

술김에 귀족 하나가 바른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바로 근처에 있는 기사들에게 이끌려 천막에서 사라졌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아부하던 귀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공국도 마찬가지로 못 움직이게 하신 겁니까?”

귀족의 말에 왕세자가 씩 웃었다.

“내가 뒤에 적을 두고 움직일 리가 없지. 왕 자리를 노리는 놈들은 전부 내 계략에 당한 거야.”

왕세자도 그동안 자신의 계략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술에 취해서였을까?

자리를 깔아주니, 왕세자는 자기 자랑을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래서 내가 검을 들고 외친 거야. 모두 목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술잔을 휘두르며 왕세자가 신이 나서 떠드는 순간.

벌컥.

천막이 활짝 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병사에게 시선을 돌렸고,

“감히 어딘 줄 알고 말도 없이 들어…….”

누군가 화를 내려 했지만, 병사의 말이 더 빨랐다.

“공국왕의 군대가 수도에 접근 중입니다! 여러 영지가 함락되었고, 수도의 병력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천막 안은 바로 조용해졌다.

병사의 말에 모두 술이 깬 것처럼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천막의 안쪽, 왕세자에게로 향했다.

왕세자는 술잔을 내던지고 웃기 시작했다.

“킥킥킥. 역시 제국 놈들인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왕세자가 계속 웃자, 옆에 있던 귀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수도로 돌아갑니까?”

왕세자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킥킥, 아니, 이대로 진격한다. 역시 대단한 악당들이야. 아무리 해도 제국 놈들에게는 이길 수가 없단 말이야.”

수도로 공국왕의 군대가 접근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왕세자의 군대는 계속 서쪽으로 진격해나갔다.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왕세자는 멈추지 않았고, 얼마 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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