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제22편 마리아 공작부인 (3)
나는 발레아의 배에 박혀 있는 검을 잡았다.
발레아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요.”
“지금도 열심히 참고 있다고요.”
내 말에 발레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나는 검을 수직으로 쭉 뽑았다.
최대한 장기가 안 다치게 검을 밀어 넣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검을 뽑은 자리에서 피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다른 검을 발레아의 몸 위에 올려놓았다.
손잡이를 잡고 마나를 흘려 넣으니, 피가 빠르게 멈추었다.
그리고,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발레아의 표정이 풀려나갔다.
상처가 치료된 것이다.
확실히, 이쪽은 제대로 된 신검다웠다.
발레아가 치료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발레아의 배를 뚫었던 검을 흘겨보았다.
이 검도 신검에 뒤지지 않는 왕국의 국보였는데. 효과는 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신 면역이라면 가까이 가거나 해도 먹히면 오죽 좋을까. 꼭 몸에 가져다 대야 효력을 발휘하다니.
더구나, 다른 사람을 원래대로 돌아오게 하려면 검을 통해 변형된 마나를 상대의 몸속에 밀어 넣어야 했다.
결국, 상대를 찌르라는 소리였다.
이건, 죽이는 쪽이 백배 편한 방법이었다.
나도 치유 능력이 있는 신검이 없었으면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이게 뭐야! 네놈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분노한 솔로, 아니 공작부인이 고함을 질렀다.
다시 방안에 마나가 몰아쳤다.
나는 놀라, 발레아의 손에 기사의 검을 쥐여 주려 했다.
하지만, 발레아는 검을 거절했다.
“그 검은 공자님도 필요하시잖아요. 괜찮아요. 저도 숨을 수 있어요.”
발레아는 바닥에 누운 채로 능력을 사용했다.
꿀렁.
다시 한번 바닥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발레아의 몸이 바닥 아래로 가라앉았다.
발레아는 바로 바닥 아래로 잠겨 들어가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신검을 허리에 차고, 기사의 검을 손에 쥐었다.
방안에 공작부인의 마나, 아니 능력이 가득했지만, 더 이상 두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돼, 도망가서는 안 돼. 너도 안드레스도 고통받아야 해.”
발레아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공작부인은 의자에 앉아 횡설수설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행동은 빨랐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안 되겠다. 더 두고 볼 수 없겠어. 네놈부터 종으로 만들어 둬야겠다.”
갑작스러운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마나가 몰려오는 게 더 빨랐다.
콰르르르르.
방안에 모여있던 마나와 마을 전체에 퍼져있던 마나까지 모두 나에게 밀려온 것이었다.
전부 공작부인에 의해 변형된 마나. 사람을 세뇌하기 위한 마나였다.
맙소사.
그녀는 이 마을, 아니 이 분지 전체를 세뇌했던 마나를 모두 모아 나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 능력을 한사람에게 쏟아부을 수 있다니, 나는 마나를 가득 끌어올리며 충격에 대비했다.
“이건 안드레스를 위해 준비한 능력이야! 이제 그가 내 사랑을 거절할 수 없을 거야. 아니 누구도 나를 거절할 수 없어!”
쿠우우웅.
엄청난 마나가 밀려드니, 나도 모르게 뒤로 밀려나 버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밀려나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모를 통증과 세뇌에 대비했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뇌는커녕, 두통도 느끼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검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검은 조금 전부터 계속 내 마나를 뽑아가고 있었다.
예상보다 별로라는 말은 최소화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검을 쥔 당사자만큼은 확실하게 지켜주는 검이었다.
그와 동시에 창문 밖에서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털썩, 털썩.
한두 명이 쓰러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택을 감싸고 있던 영지민 전부가 쓰러지고 있었다.
영지민들을 지배하던 마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지민들이 다 쓰러질 정도로 마나를 뽑아내 나를 공격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얼마나 마나가 많이 모였는지, 피부에 진득하니 마나가 달라붙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내 정신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움직이는 것도 방해받지 않았다.
나는 물러섰던 거리를 다시 나아갔다. 그리고, 공작부인을 향해 더 걸어갔다.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얻은 능력인데. 동생에게서 마나를 빼앗아서 끊어진 능력을 다시 이어 만든 능력이란 말이야!”
공작부인의 말에 나는 아직도 부러진 검을 들고 주저앉아 있는 젊은 귀족을 쳐다보았다.
왜 귀족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마나도 없는 검으로 기습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떤 방법으로 능력을 되살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법 안에는 동생의 마나, 능력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어떤 방법일까?
다시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제는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동생의 마나를 빼앗은 것만으로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니. 이건 믿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이 능력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어 치웠는데……. 이게 안 먹힐 리가 없어!”
공작부인의 말에 얼마 전 이 분지로 들어오며 보았던 빈집들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이 없어진 집들.
결국,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전부 공작부인의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사람을 먹은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공작부인은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짓을 벌인 게 분명했다.
천인공노할 짓이었지만, 나에게는 별로 새삼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죽임을 당한 숫자를 생각하면, 내 쪽도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검을 쥐고, 공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나는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다.
윤리도 뒷일도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더는 살아 있으면 안 되었다.
내가 다가가자, 공작부인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안 돼, 안…… 돼, 그게 막히면 안 돼.”
공작부인이 무서워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나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마나였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한다고 해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공작부인은 계속 물러서 벽에 붙어 섰고, 나는 그녀 앞에 멈췄다.
“안돼, 제발. 그만둬!”
공작부인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 있었다.
검으로 베어버리는 것도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검을 움켜잡았지만,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이번에도 공작부인의 마나가 더 빨랐다.
나를 감싸고 있던 마나가 공작부인의 몸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나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마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적을 공격하는 것처럼 공작부인의 머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뜨득. 뚝. 뚜둑.
끈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공작부인의 머릿속에서 계속 들려왔다.
“크억. 살려, 살려줘.”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어 까면서 그녀는 비명을 질러댔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던 공작부인은 잠시 뒤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쉽게도 죽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감싸던 마나도 사라지고, 몸에서 마나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공작부인은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만, 공작부인의 눈은 멍하니 풀려 있었다. 깊었던 주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멍한 얼굴은 어디에도 지능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멍하니 공작부인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늙고 지친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 아이는 벌을 받은 걸세. 치료하지 않아도 되네.”
노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치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노인이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노인. 공작부인의 아버지인 이비사 자작이었다.
공작부인이 마나를 거둬들인 뒤에 기절했던 자작이 깨어난 것이었다.
공작부인의 동생도, 쓰러진 이 마을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정신을 차릴 듯했다.
“그레시아 공작이 보냈다고?”
다행히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자작은 꼭두각시로 지내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처음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공작을 원망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지. 내 딸이 왜 이런 괴물이 되어버렸는지…….”
자작은 모르겠지만, 그 딸은 이미 오래전부터 괴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 정신이 나가버린 딸을 지켜보던 자작은 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손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편히 쉬어라.”
공작부인의 머리에 마나가 스며들었다.
멍하게 허공을 보던 공작부인의 표정이 편하게 변했다.
예전에 보았던 공작부인의 모습이었다. 천사같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공작부인의 그 모습.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야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공작부인은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공작부인이 능력을 회복한 것도, 자신의 마나에 죽게 된 것도,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작부인이 능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누군가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다만, 지금 그런 질문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자작의 영지는 이미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하나 남은 아들은 능력을 잃어버렸고, 영지민들은 반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영지민들도 문제였다.
내 예상대로 깨어난 영지민들은 제정신을 차렸다.
기사들도 죽이지는 않았기에 다들 포션을 먹고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다만, 깨어난 영지민도, 기사들도 모두 분노를 한가득 품고 있었다.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영주 딸에게 죽어버렸었다.
능력의 상승을 위해서라지만, 그것에 공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 본인들도 수년간을 꼭두각시로 지내게 되었다.
지금 보니 그 꼭두각시 기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분노하는 게 당연했다.
자작이 영주가 아니고, 각성한 귀족도 아니었으면, 영지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은 참고 있지만, 언젠가 들고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아무리 늦어도 영주가 늙어 죽게 되면 능력을 잃은 그 아들은 이 영지를 지키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었다.
나는 다른 기사들이 오기 전, 발레아와 함께 영지를 떠났다.
저택을 나서는 나에게 자작이 말했다.
“딸이 능력을 찾기 전에, 로브를 쓴 사람이 찾아왔다네. 나이를 파악하기 어려운 남자였네. 딸 이야기를 듣고, 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는데…….”
공작부인이 능력을 찾기 전에 뭔가 달라진 것이 없는지 물어본 것에 대한 대답이었다.
자작의 대답에 나는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공국왕의 아들. 왕세자가 했던 말이었다.
그에게 능력을 부여했던 자도 분명 나이를 파악하기 어려운 남자였다고 했다.
‘지나가던 현자.’
시간도 다르고, 지역도 달랐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자꾸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