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제19편 악연 (2)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저택이 오늘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관과 달리, 이상하게 서늘해 보이는 저택.
두꺼운 쇠창살로 되어 있던 정문은 우그러지듯이 열려 있었고, 아름다운 정원은 폭풍을 맞은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정원 곳곳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
다들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 죽지는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어디 한군데 부러진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 든 기사 홀로 저택의 활짝 열린 정문 앞에 서서, 앞에 늘어선 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영지전을 신청하지도 않고, 이렇게 다른 영지를 침범해도 되는 건가!”
부하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지만, 그의 기백은 아직 죽지 않았다.
중년의 기사가 나서서 그의 말에 대답했다.
“이미, 여러 번 연락한 것을 전부 무시한 것은 그쪽 영주님이신 것 같습니다만.”
기사는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아래쪽에 왕족의 인장이 찍힌 문서였다.
“더구나, 이번에는 계승 왕족이 직접 내린 요청입니다. 가부 간의 답이 없으면 확인을 위해 방문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게 무슨 방문인가!”
“죄송합니다. 영주님을 뵙는 것을 막으시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중년 기사, 앙헬은 담담히 상대 기사에게 사과했다.
어차피 다른 병사와 기사들은 전부 쓰러뜨린 뒤였다.
솔직히 마지막 남은 이 영지의 기사단장도 쉽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한 말처럼 그레시아 공작의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답변을 듣기 위해 방문한 것일 뿐이었다.
덤벼드는 기사나 병사들은 전부 쓰러뜨리면 그만이었지만, 상대 영주의 명예를 위해서는 기사단장 정도는 남겨 두어야 했다.
그래서 이렇게 저택 앞에서 상대 기사단장과 말로 투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저 기사단장은 영주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테지만, 앙헬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 영지가 기사단이 거쳐온 세 번째 영지였다.
그동안 한 번도 상대 영주나 귀족을 놓치지 않았었다. 지금도 놓칠 이유가 없었다.
아직도, 알렉스 공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과 같이 온 귀족 영애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챙그랑!
“으아아악!”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이 2층 창문에서 튕겨 나왔다.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는데, 그도 각성한 귀족이었던지 2층에서 떨어졌는데도 무사히 바닥에 내려섰다.
하지만, 바닥에 내려선 귀족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2층 창을 바라보았다.
뭔가, 믿지 못할 것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귀족이 던져진 2층 창에는 예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죄송해요. 말로 해 보려고 했는데, 그냥 도망쳐서 어쩔 수 없었어요.”
깨진 창문 안에서 모습을 보인 사람은 아직 어려 보이는 처녀였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 모습에 넋이 나간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마……. 마녀…….”
늙은 귀족은 발레아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솔직히 기사들도 귀족이 중얼거리는 말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의 온갖 사물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앙헬도 마녀라고 부를 뻔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지금은 많은 도움을 받는 같은 편이었다.
“감……. 감히! 남의 영지에 와서 난동을 부리다니! 그레시아 공작이 이렇게 경우 없는 귀족일 줄이야! 내가 이 일을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다른 영지의 기사들이 검을 들고 늘어서 있었지만, 늙은 영주는 기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명분을 걸고 찾아온 기사들이었다. 같은 기사인 기사단장이라면 충분히 말싸움할 수 있었지만, 귀족인 영주에게는 불가능했다.
앙헬은 뒤로 물러섰다. 영주를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앙헬이 물러난 자리에 젊은 기사가 나섰다.
어리다면 어리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젊은 기사였다.
아직 종자나 수련 기사나 할 정도의 나이로 보였지만, 늙은 귀족도 귀족의 기사단장도 그를 보고 움찔 뒤로 물러섰다.
저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의 대부분은 그가 쓰러뜨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을 죽이지 않고, 저렇게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은 기사단장이 여러 명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능력이 전투와 관련 없는 영주는 더 불가능한 일이었고.
귀족과 기사단장의 굳어진 표정에 젊은 기사가 입을 열었다.
“공작님은 관계없습니다. 공주님의 호위 기사인 제가 나서서 하는 일일 뿐입니다.”
“너는…….”
“그레시아 공작의 서자, 알렉스입니다.”
서자라는 말에 늙은 귀족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레시아 공작을 걸고 넘어가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영주와 기사단장의 표정을 보고,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야, 공작의 생각처럼 굴러갈 것 같았다.
서자라는 내 위치를 이용하면, 공작가의 명예에 흠이 가지 않게 주변을 압박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내 명예는 엉망이 될 터였다.
‘하지만, 명예랄 게 없었으니…….’
어차피 서자라는 자리 때문에 다른 귀족들에게 존경이나 경외를 받기는 예전에 틀려먹었다.
그렇다면, 결국, 공포를 이용하는 수밖에.
어차피 내전 중에 나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적에게는 공포로 유명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미 앞의 두 영지에서도 그렇게 했었고.
푹!
나는 들고 있던 대검을 귀족 앞에 꽂아 넣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답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내, 내가 다시 무시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지요.”
내 말에 늙은 귀족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로 옆 영지 영주님께 영지전을 신청해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리고, 제가 그 영주님의 초청 기사로 참가하는 겁니다.”
귀족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병사와 기사들이 보였다.
“그때까지 빨리 치료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번에는 기사단장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지금, 답을 하겠네.”
결국, 늙은 귀족은 앞선 다른 귀족들처럼 항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뒤에 대기하던 기사들과 서기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실질적인 협력 작업을 할 시간이었다.
돈과 식량 등을 기부받고, 공주님을 지지하는 서판에 영주의 인장을 새기고,
강압적인 협력이었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한 영지가 더 우리 편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검을 등에 걸고, 기사들과 서기관들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친 병사와 기사들에게 포션을 먹이고, 이쪽 영지의 서기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 전까지 싸운 상대였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는 친하게 지냈던 기사들이 같이 오지 못했다.
그들은 내가 데려온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공작령에 남게 되었다.
대신 온 선임 기사가 첫 번째 공작부인 쪽인 앙헬 기사였다. 다른 기사들도 그리 친하지 않은 기사들이었고.
아쉽게도 이번에는 우리 편과도 친하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다만 한 사람 내게 쓱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어쨌든 간에 발레아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 영지가 이비사 자작의 영지죠?”
다만, 다가와서 꺼내는 말은 매번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거기다가, 안부까지 묻고.
“괜찮아요?”
‘병 주고 약 주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발레아는 왜 둘째 공작부인이 쫓겨났는지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다들 쉬쉬하는 이야기일 텐데, 어떻게 들은 것인지…….
발레아의 마당발은 매번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은 것 이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 계속 죽어 나갔던 기억.
그리고 공작의 힘을 빌려서 겨우 두 번째 공작부인을 쫓아냈던 것까지.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이 내게 트라우마로 남을 것을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갚아줄 빚이 남아 있다고 느낄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갚을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와 발레아는 기사들을 남겨 두고 먼저 길을 떠났다.
앙헬과 기사들은 계약이 끝난 뒤에 돈과 식량이 그레시아 영지로 옮겨지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다.
그사이 나와 발레아는 다음 영지를 먼저 살펴볼 생각이었다.
여태 일을 그렇게 진행해왔고, 이번에는 이비사 영지 차례였다.
* * *
이비사 영지는 산맥에 둘러싸인 작은 분지에 있었다.
호로병처럼 생긴 분지였고, 입구도 북쪽으로 이어진 길 하나밖에 없었다.
들판에는 농작물들이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고, 분지를 둘러싼 산에는 단풍이 가득했다.
언뜻 봐서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정감이 넘치는 곳이었다.
다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멀리서 본 것과 차이가 있었다.
농작물들은 잡초가 가득 섞여 있었고, 농사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들은 버려진 채로 녹슬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농작물들이 방치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길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었고, 길가에 띄엄띄엄 있는 집들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내전 때문일까요?”
“내전 때문이라기에는 너무 일찍 버려진 것 같네요.”
나는 버려진 집을 가리켰다.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집이었지만, 이미 버려진 지 몇 년은 되어 보였다.
다른 집들도, 버려진 농기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전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었다.
이곳은 몇 달, 몇 년 전부터 방치되고 있었다.
사람이 모두 떠난 것일까?
하지만, 이곳을 방문한 병사에게서는 그런 말이 없었다. 다만 답변을 안 해 주었다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발레아와 나는 말의 속도를 늦추고 분지 안으로 나아갔다.
집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집들은 전부 비어 있었다.
전부 비슷할 때 사람이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전생에 보았던 공포 영화의 첫 장면처럼 느껴져질 정도였다.
나와 발레아는 말에서 내렸고, 나는 유물 주머니에서 신검을 뽑았다.
뭐가 나올지 모를 때에는 신의 힘을 빌리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검을 뽑아 들고, 긴장된 표정으로 길을 걷자니, 멀리 마을이 보였다.
다행히 마을에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범하게 생활하는 사람들.
발레아도 긴장했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발레아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극심한 위화감을.
사람들이 정확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인사를 할 때도 정확한 각도로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일 때도 똑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마치 로봇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