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제18편 악연 (1)
갑자기 들이닥친 천 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도시로 들일 수는 없었다.
우리는 도시 밖에 숙영지를 세우고, 데려온 병력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
도시 밖에는 우리 말고도 여러 숙영지가 펼쳐져 있었다.
다들 수십, 수백 정도의 작은 숙영지들이었지만, 용병들과 다른 지역의 영지병까지 모여 있어서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그들 대부분은 공주와 그레시아 공작을 따르기 위해 모인 영주들의 병력이었다.
기사들이야 도시 안으로 들어가 있었고, 돈 많은 용병들도 도시 안의 숙소를 잡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외성 밖에 천막을 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수도 쪽은 얼마 전부터 폭우가 쏟아졌다고 들었지만, 여기는 햇볕이 뜨거울 정도였다.
우리는 그레시아 공작이 사람들을 붙여준 덕분에, 쉽게 숙영지를 만들 수 있었다.
숙영지를 만드는 것을 확인하고, 악셀과 미로, 두 호위 기사와 후안에게 병사들을 부탁한 뒤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먼저 온 기사단에게 소식을 들었는지, 저택 앞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머니가 나와 계셨다.
작년보다는 빨리 보게 되었지만, 그래도 반년이 훨씬 지나 보게 된 어머니였다.
말에서 내리자, 어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다.
“수고했다.”
전처럼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반대로 안아 드리는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따뜻한 품은 다르지 않았다.
“햇볕도 뜨거운 데 웬일로 나오셨어요?”
“이제는 내가 돌아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아들이 왔으니, 보러 나와야지.”
팔을 내리며 어머니, 아만다 부인이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공작부인과 공주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공작 대신 공작부인이 나와 공주를 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주가 공작부인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발레아가 말에서 내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머니가 발레아를 바로 알아보았다.
“아, 발레아 영애인가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발레아 드 메세시아입니다. 공작부인께 인사드립니다.”
발레아는 자세를 바로 하고, 무척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마치 왕비에게 하듯이 정중하게 하는 이런 인사는 발레아의 가식이 최고에 다다랐을 때는 볼 수 있는 인사였다.
연기 실력이 더 좋아졌는지, 지금 인사는 내가 봤을 때도 가식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만다 부인이라고 하면 돼요.”
어머니는 발레아의 말을 교정해 주었지만, 인사 자체는 무척이나 마음에 드신 것 같았다.
“그럼 공주님이 인사를 마치시면 같이 들어갈까?”
“네.”
다행이었다. 착한 분이긴 했지만, 사람 보는데 까다로운 분이시라 혹시나 마음에 안 들까 걱정했는데.
역시, 발레아의 처세술은 대단했다.
공주의 인사는 바로 끝나지 않았다. 공작부인과의 인사 뒤에도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가의 다른 귀족들과 저택을 찾아온 귀족들까지.
모두와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얼굴만 보는 것도 금방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공주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옆으로 총집사가 찾아왔다.
이제 슬슬 이 노인의 실력을 알 것 같았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터 각성한 귀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력을 너무 잘 숨겨서,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잘 가늠이 안 되었는데, 이제 실력이 차이가 나니 슬슬 보이는 게 있었다.
다만, 총집사는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도, 공작의 지시를 들고 왔을 뿐이었다.
“공작님이 찾으십니다.”
나는 아직도 인사를 받는 중인 공주를 쳐다보았다.
“저 혼자 말인가요?”
“네.”
나 혼자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려나.
이건 들어보면 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공주님과 남작 영애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나중에 내 응접실로 찾아오렴.”
언제 친해졌는지,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발레아와 이야기하는 데 여념이 없으셨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총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공작부인 옆을 지나가게 되었지만, 나도 공작부인도 무표정한 얼굴로 지나가면서 인사만 나눌 뿐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서인지, 저택 안은 조금 부산스러웠다.
고용인 중에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나가는 귀족 중에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나를 아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평범한 반응을 보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꺼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서워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저들이 보기에는 내가 삼두육비의 괴물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전부터 보아왔던 하녀들과 고용인들은 그리 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 알렉스 공자님 오셨어요!”
나를 발견한 플로라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것처럼.
다만, 그녀는 내 앞에 총집사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인사만 하고 사라져버렸다.
총집사는 아직도 고용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저택 복도를 지나, 공작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총 집사는 문밖에서 내가 왔다고 말했고, 안으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옆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 큰마음을 먹고 방문했었던 집무실.
집무실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공작은 내가 들어섰는데도 어렸을 때처럼 뭔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말을 걸어줄 때까지 열심히 기다렸는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알렉스입니다.”
내 말에 공작이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정광으로 번쩍이는 눈.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기세.
공작에게서는 절로 카리스마가 풍겨 나왔다.
다만, 그 카리스마는 내게 별로 효과가 없었다.
나는 뚱한 눈으로 공작을 마주 보았다.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그동안 네가 해온 일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공작도 여러 군데 사람을 많이 심어놓았다.
아무 뜻도 없이 이렇게 사람을 심어놓을 리가 없을 터였고.
지금 보니, 전부 꿍꿍이가 있는 짓이었다.
“공국에 다녀온 것과 소로카 요새에서 싸운 것까지. 거기다 공국왕과는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그러고 보니, 공국왕과의 협상은 그레시아 공작에게도 말해 줘야 했다.
남에게 전달할 말도 아니었고, 공주님께만 말하고 바로 소로카 요새로 가게 되어서 공작에게 알려줄 시간이 없었다.
나는 공작에게 공국왕과 협의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공국왕과 아이샤 공주와의 비밀 협정.
공신력도, 계약이나 문서도 남기지 않은 일이었지만, 공국왕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공작은 내 이야기를 듣고 눈썹을 찡그렸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었다.
공작에게는 알리지 않고 공주님과 둘이 계획한 일이었다.
지금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공작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다만 공작은 공작답게 바로 화를 내지 않았다.
“협상 자체는 나쁘지 않군.”
오히려 칭찬 비슷한 말까지 해주었다.
“공국은 뒤로 미루고, 1, 2 왕자만 신경 쓰면 된다라…….”
“우선은 1 왕자만 신경을 쓰면 될 듯합니다. 2 왕자는 서쪽으로 가버렸으니까요.”
공작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칭찬에 내 말까지 받아주고, 공작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오늘은 무슨 날인지.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공국왕과 협상을 하고, 요새를 지키는데 큰 활약도 했고, 그 뒤에 공주님과 함께 동북부를 돌아다니며 영지들의 지원을 받고, 천명에 가까운 병력을 모아 왔다라…….”
공작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칭찬을 안 할 수 없는 일이군.”
나는 바짝 긴장했다.
이 정도까지 칭찬을 깔아두다니, 꺼낼 말이 무엇일지 감도 안 왔다.
“하지만, 네가 너무 잘해서 문제가 생겼어.”
공작은 자신이 쓰고 있던 서류를 내게 던졌다.
마나를 실었는지, 서류는 표창처럼 날아왔다.
서류를 낚아챈 뒤에 쭉 읽어 내렸다.
숫자가 가득한 서류였다.
아슬아슬하게 대차를 맞춘 영지의 금전 출납표들.
전생의 재무제표와 비슷한 서류였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천재로 이름 높았던 나였다.
더구나 이 서류에 있는 내용은 모른 척 넘어가기 어려웠다.
“주변 영지에서 도와주러 보내온 병력과 기사들을 먹이고 재우기 위해 계속 영지의 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하게 되면 돈이 미친 듯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은 적자가 나지 않도록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겠지.”
이렇게 사람과 기사들을 끌어모았는데 그동안 적자가 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레시아 영지의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 서류를 보면 겨우 균형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여기다 더 지출이 늘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공주와 네가 포섭한 동북부 영지들은 전부 풍족하지 않은 영지들이다. 다들 돈이나 식량 대신에 병사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테지. 거기다, 지금 데려온 천명의 병사들도 있고.”
전부 영지의 재정에 타격을 줄 입들이었다.
다만, 적자도 감수하려면 감수할 수도 있고, 채권을 발행할 수도 있었다.
잠깐, 이 세계에 채권이 있었던가?
아무튼 공작의 말은 조금 엄살 같았지만, 저 많은 인원을 데려온 죄가 있으니, 나는 따로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내가 지불하기에는 너무 금액이 컸기 때문이었다.
“공국왕과도 협상이 되었고, 우리도 오래 버틸 수 없으니, 1, 2 왕자가 전투를 시작하면 수도로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이제는 나도 제대로 된 기사로 인정해 주었는지, 공작은 중요한 작전을 술술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그전에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부족한 자금도 더 모아야 할 테고.”
앞에서 열심히 칭찬하고, 계속 말을 늘어놓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공작은 서류 하나를 더 던져주었다.
이번에는 영지 명들이 쭉 적혀있는 서류였다.
전부 이 근방의 영지들이었다.
“협력도 중립을 지켜달라는 것도 거절한 영지들이다. 회신 자체를 거부한 영지도 있고.”
이제 무얼 시키려는 지 알 것 같았다.
“기사나 원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영지들을 다니며 확인을 하도록. 거절하는 영지가 있다면 힘을 보여주어도 된다.”
자신의 기사단을 보내도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를 보낼 모양이었다.
명예를 모르는 서자가 사방으로 날뛴다는 이야기려나.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고용인들이 떠올랐다.
나를 무서워하던 얼굴들. 설마, 공작이 퍼트린 소문 때문이었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이 내게 유리할 것인지.
유리한 점이 없다면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서류를 읽어내리다가 공작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까지 해도 된다는 겁니까?”
“내전 중이다. 거절하면 적으로 간주해도 된다.”
공작의 말에 나는 다시 반문했다.
“이 서류에 이비사 자작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더군요. 상관없겠습니까?”
공작이 몸을 움찔거렸다.
공작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비사 자작은 나 때문에 쫓겨난 공작의 둘째 부인의 본가였다.
그 영지에는 지금 공작의 둘째 부인이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 공작의 둘째 부인을 처리해도 되는지 물어보고 있는 것이었다.
공작은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다.”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공작의 독심은 이렇게 커서도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일은 내게 충분히 유리한 일이었다.
이제 오랜 악연을 끝낼 때가 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두 번째 서류를 쥐고 방을 빠져나갔고, 공작은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