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제17편 왕국군의 귀환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수십 명의 사람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와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은 귀족들이 섞여 있었다.
일행의 중앙에는 2 왕자, 두아르도가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도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왕국의 수도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비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비는 추적자들을 막아주었지만, 너무나 빨리 수도를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젠장, 그 인간이 미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움직일 줄이야…….”
2 왕자는 말을 달리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는 이런 처지가 된 분노를 계속 말로 쏟아내는 중이었다.
“정말 모레나 영지에 뭐가 있는 거 아냐? 양쪽 영주가 둘 다 죽은 거잖아. 근데 왜 이 난리를 치는데?”
비가 내리고 있어도 그의 목소리는 주변 사람들의 귀에 들릴 정도로 충분히 컸다.
하지만, 모두 왕자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말을 모는 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미친놈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이렇게 당하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모레나 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두 영주가 모두 죽는 승자 없는 결과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도 2 왕자는 조금 아쉬웠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 영지전은 뭔가 결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회를 무산시키고, 왕국을 내전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2 왕자는 영지전의 결과를 신경을 쓰지 않고, 참모와 파벌 귀족들과 함께 다음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어젯밤 1 왕자가 기습해 온 것이었다.
1 왕자는 수도, 왕궁에서는 계승자끼리 싸우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무시하고, 수도를 주시하고 있는 모든 귀족의 눈도 무시했다.
그는 기사와 귀족들을 직접 이끌고, 2 왕자 처소를 들이닥친 것이다.
쳐들어오는 1 왕자의 눈을 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저런 눈을 할 때면, 언제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1 왕자가 막아서는 기사들을 전부 죽여버렸고, 2 왕자는 다른 기사들이 1 왕자를 막는 동안 부하들과 함께 이렇게 도망을 치게 된 것이다.
분명, 1 왕자가 한 짓은 왕족의 명예를 해치는 일이었고, 내전을 진흙탕 싸움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중에 왕위를 차지하게 되더라도 약점으로 남을 만한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어이없는 짓에 2 왕자 자신은 이렇게 도망치듯 수도를 떠나야 했다.
만약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면 왕족의 명예를 걸고넘어져서라도 끝장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우격다짐이지만, 이렇게 수도를 빼앗겨버린 상태로는 쉽게 상황을 뒤집기는 어렵게 되어 버렸다.
“아직, 지지 않았어. 세력도 병사도 그대로야. 수도 치안대에도 연락이 갔으니, 다들 수도를 빠져나올 테고. 조금만 정비하면 오히려 대세를 뒤집을 수 있어.”
희망이 섞인 생각이었지만,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만큼 1 왕자가 한 일은 무리한 짓이었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던 2 왕자였지만, 며칠 뒤 그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게 되었다.
세력의 기반 중 하나인 왕국군이 대패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렇게 해서 2 왕자가 몇 사람과 함께 수도를 떠나 서부로 향했다고 합니다.”
2 왕자의 병력이 요새를 떠난 다음 날 우리는 레스티에게서 2 왕자의 상황을 듣게 되었다.
백작과 공주, 호위 기사인 나와 선임 기사들이 모여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있을 때, 레스티가 찾아온 것이었다.
레스티는 용병들의 정보망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가 셀린 교단 신자들에게 소식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왕자에 줄을 선 영지 중 상당수가 왕국 서부에 있고, 아직 멀쩡한 왕국군도 서부에 남아 있으니 서부에서 힘을 모을 생각 같습니다.”
바도르 백작은 레스티의 말을 믿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수도에서 전투를 벌이다니, 레스티가 내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확실한 이야기인가?”
백작의 물음에 내가 대신 대답했다.
“상당히 정확한 소식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에서도 자주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 대답에 백작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내가 보증을 섰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스티는 내게 고개를 숙이고, 보고를 이어갔다.
“1 왕자께서는 수도를 완전히 장악했고, 빠져나간 치안대 대신에 왕실 기사단을 움직여 수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 말없이 듣고만 있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왕궁은, 어마마마는 괜찮으신지…….”
“네, 왕궁은 왕실 기사단장이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기사단장과 충돌을 피할 생각인지 1 왕자 쪽도 왕궁은 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레스티의 말에 공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기사단장을 밖으로 끄집어낸 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기사단장이 아니었으면, 당장 수도로 달려가 왕비를 구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레스티는 2 왕자와 수도의 상황만 이야기하고 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다들, 갑자기 들은 이야기를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실내에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로 낮게 중얼거렸다.
“수도에는 1 왕자가 있고, 서쪽에는 2 왕자, 북쪽에는 공국이 자리를 잡고 있고, 동쪽은 공주님인가…….”
생각해보니, 백작의 말대로 지금 왕국은 네 갈래로 갈라진 꼴이었다.
제국에 비하면 작은 왕국일 뿐인데, 그 왕국이 내전이라는 이유로 갈가리 갈라지다니.
초대 왕, 아니 얼마 전에 죽은 선왕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해할지 모를 일이었다.
다들 앞으로 일을 고민할 때, 나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1 왕자의 반응이 내 생각과 달랐던 것이다.
모레나 자작이 죽은 것에 그렇게 화를 낼 줄이야.
나는 이바나만 살아 있으면 괜찮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1 왕자의 반응을 보면, 이바나보다 모레나 자작이 더 중요해 보일 정도였다.
1 왕자의 행동은 도무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2 왕자가 저렇게 허무하게 수도에서 달아나게 된 것도 저 어이없는 1 왕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1 왕자와 상대하게 될 때는 평범한 상대와 싸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 요새는 안전해졌다고 봐도 될까요?”
백작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백작은 공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2 왕자가 서쪽으로 도망쳤으니, 1 왕자보다 먼저 저희를 칠 리는 없을 테지요.”
다시 기반도 다져야 했고, 1 왕자에게 더 화가 나 있을 테니, 2 왕자는 이 요새를 신경 쓰기 어려울 터였다.
이어서, 백작은 일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네, 저희는 안전해졌습니다. 공주님과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언제까지 공격을 받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내전 중에서 이 정도 이상 안전을 보장받기는 어려웠다.
백작 말대로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낸 것이다.
일을 마쳤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럼, 저희는 슬슬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주의 말에 백작이 다시 물었다.
“바로 그레이스 공작령으로 가시는 겁니까?”
“바로 가지는 않고, 가는 길에 다른 영지들을 들려서 참가를 권유해볼 생각이에요.”
결과가 좋기는 했지만, 이렇게 기사단을 이끌고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중립을 표한 영지들을 끌어들이고, 다른 쪽에 붙은 영지들에 무력 행사라도 해야 했다.
공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같이 가시죠. 왕국군은 요새를 지켜야 하겠지만, 영주도 요새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의 말에 우리 모두 일어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희 요새를 지켜주셨는데,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죠. 군을 움직이지는 못하겠지만, 저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백작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
다들 뜻밖의 도움에 어리둥절했다.
“다행히 나름 이 지역에서는 신임을 받는 귀족이라, 제 말이 좀 통할 겁니다.”
통하다마다.
왕국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소로카 요새를 지키고 있는 백작을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그가 나서 준다면, 대부대를 이끌고 협박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근처에 작은 병영으로 나뉘어 있는 왕국군들도 꽤 있습니다. 2 왕자 군이 서쪽으로 물러갔다면 명령권자들이 사라졌을 테니, 그들을 흡수할 수 있을 겁니다. 숫자가 상당하니 꽤 도움이 되실 겁니다.”
백작의 이어진 말들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선물 같았다.
우리는 멍하니 백작을 바라보았고, 백작은 공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먼저 방에서 나갔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저번에 진 빚도 갚아야 하고요.”
도대체 무슨 빚을 말하는 것인지…….
마물을 처리해준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제국군 요새와 기사들을 처리한 것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들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을 말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내가 한 일이 꽤 많았다.
백작이 나선 이유가 나 때문이라면, 감사히 받아도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우리는 요새를 떠나기로 했다.
포위망이 풀린 요새는 다시 상인들이 들락거렸고, 우리는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인 뒤에 말에 올랐다.
그냥 떠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요새 도시 안에서 퍼레이드를 펼치고, 요새를 떠나기로 했다.
요새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였다.
물론 당장 요새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마물과 싸웠기에, 요새 사람들은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고, 싸움에서 이긴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투 중에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부상자도 꽤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분위기가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백작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 이 정도 답례는 별것 아니었다.
다들 열심히 닦은 갑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반짝이는 갑옷과 검. 쏟아지는 꽃잎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병사들과 영지민들.
기사단은 이 장면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요새를 떠났다.
그 뒤로 우리는 영지들을 훑으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바도르 백작의 도움으로 여러 영지의 합류를 약속받았고, 다른 쪽에 붙었던 영지들의 중립 약속도 받아냈다.
물론 순탄하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반발하는 영주의 기사단과 대치를 한 적도 있었고, 기사들끼리의 결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우호적인 영지에서도 대련은 다반사였고, 나도 여러 번 앞에 나서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내 명성은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동북부 한정이었지만, 한 달 만엔 나도 꽤 유명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우리는 그레시아 공작령에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가 그레시아 영지로 돌아온 날, 도시 전체에 비상종이 울리게 되었다.
우리를 본 경비병들이 놀라 비상을 걸게 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명에 가까운 군인들이 도시 앞에 나타났는데 비상을 걸지 않을 경비병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천명의 병사들은 백작이 말한 이곳저곳에 흩어진 자투리 왕국군이었다.
왕국 동쪽을 돌며 남겨진 병력을 모으다 보니, 이렇게 대부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수십 명의 기사단으로 출발해서 대부대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기사단은 그레시아 공작 것이었지만, 이 천명의 왕국군은 공주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