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제16편 회전(會戰) (3)
숨 막히는 전장.
팔다리가 날아가고, 피가 눈을 가리는 전장은 마물과 싸우는 것이 아니더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물이야 기사단이 상대하는 것이었고, 마물의 피부를 뚫을 수 없는 병사들은 견제하는 것에 불과했으니.
오히려 이렇게 인간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지도 몰랐다.
더구나, 상대하는 인간이 같은 왕국 군이었다.
눈앞에 아는 얼굴이라도 나타나게 되면 절로 욕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레시아 왕국 동부 방면군, 소로카 요새 십인 대장인 마토스도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물론, 공주의 연설과 백작의 외침, 그리고, 성벽에 펼쳐진 능력 덕분에, 마토스와 병사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었다.
하지만, 그 사기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능력들과 사방으로 날아가는 팔다리로 인해 결국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버렸다.
현실로 돌아온 병사들과 마토스는 이를 악물고, 적 병사들과 드잡이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 보니, 이제는 진형이 섞여서 서로의 진영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자신의 부하들은 주위에 남아 있었지만, 다른 십인대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마토스 눈에 들어온 것은 제복을 입고 있는 병사, 아니 장교였다.
쁘득.
저절로 이가 갈렸다.
지금 옆에 남아 있는 병사는 여섯, 나머지는 적 장교가 날린 뇌전에 쓸려나가 버렸다.
어느 귀족이 쓴 능력인지는 알 수 없었고, 저 장교가 죽인 것이 아닐 가능성도 컸지만, 분명 저 귀족 장교도 다른 곳에서 아군을 죽여댔을 터였다.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더구나 창백한 얼굴로 도망갈 곳만 찾는 것을 보니, 마나가 다 떨어진 것 같았다.
마토스는 달려드는 적 병사를 뒤로 넘기며 크게 소리쳤다.
“앞에 장교가 있다! 저놈부터 잡는다!”
“에잇! 이놈은 왜 나한테 넘기는 겁니까?”
퍽! 부하에게 넘긴 적 병사의 몸에 창이 박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우리가 잡을 수 있는 놈입니까?”
“아니, 그런 걸 따질 땝니까? 후딱 잡고 뜹시다!”
이어 다른 부하들의 푸념이 들려왔다.
다행히 아직 부하들은 전장의 광기에 휩싸이지는 않은 듯했다.
그럼, 제일 흥분해 있는 것은 자신일까?
마토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내달렸다.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부하들은 잘 따라왔다.
거기다, 운도 따라주었다.
무슨 이유인지, 다시 한바탕 진영이 출렁였다.
귀족과 자신들 사이에 있던 적 병력이 우르르 한쪽으로 몰려가 버렸고, 자신들과 귀족 사이에는 남아 있는 적이 없게 되었다.
“거리를 두지 마! 거리가 없으면 능력을 쓸 수 없다!”
마토스는 다시 고함을 지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적 장교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도망칠 곳을 찾지 못했는지, 장교는 더는 두리번거리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장교와 눈이 마주쳤다.
목 뒤로 전율이 흘렀다. 동시에, 적 장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장교는 달려오는 마토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젠장! 마나가 남아 있었나?’
마토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되돌아가기는 너무 늦었다.
“피해!”
그는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몸을 날리며 창을 힘껏 내질렀다.
능력이 발동되기 전에 상처를 낼 수 있기를.
아쉽게도 일반인이 각성한 귀족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빠지지직!
장교의 손에서 벼락이 쳤다.
눈앞이 환해지고, 몸이 떨렸다.
그는 달리던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창을 잡은 팔이 말려들고, 온몸이 꼬였다.
다른 장교인 줄 알았는데, 부하를 죽인 그 장교였다.
지금 그가 맞은 번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부하들을 죽인 그 벼락이었다.
역시, 헛짓이었다. 감히 귀족에게 덤비다니.
높아진 사기 때문에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뒤에서 부하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떨리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어이가 없었다.
십인대 전체가 한 귀족 장교에게 죽게 되다니, 그것도 복수하려 덤비다가 그렇게 될 줄이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개를 저을 만한 일이었다.
확실히 장교도 지쳤는지,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몸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니 살아 남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겨우 보이는 눈으로 마토스는 귀족 장교를 노려보았다. 죽은 뒤에도 그 얼굴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장교는 죽어가는 병사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인상을 쓰며 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장교는 한쪽을 보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정말이잖아!”
그리고, 다시 보는 방향을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에서 아무것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들어 올린 두 손이 잘려 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장교 앞에 등장한 기사.
마토스는 그 기사가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사들의 움직임을 일반인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저 기사는 더 빠른 것 같았다.
“이 장교도 죽여야 하는 장교지?”
다른 기사들보다 조금 덩치가 작아 보이는 그 기사는 허공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의아한 광경이었지만, 이어서 들려온 대답은 더 황당했다.
“……네.”
그가 바라본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온 것이었다.
“좋아.”
기사는 양팔이 잘려 비명을 지르는 귀족 장교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검에 묻은 피를 털고, 몸을 돌렸다.
투구를 벗고 있어서 기사의 얼굴이 잘 보였다.
무척이나 어린 얼굴.
마토스는 눈앞의 기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공주의 호위 기사라던 어린 기사가 분명했다.
결투로 적 기사 대표를 쓰러뜨린 대단한 기사라더니, 정말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고, 고맙…….”
마토스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죽기 전에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린 기사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들고 있던 검을 등에 걸쳤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다시 빼냈다.
가슴에서 뽑혀 나오는 신성한 검.
죽어가는 중이라서 그런지, 마토스는 사람 몸에서 뽑혀 나오는 검이 무섭지 않고, 무척이나 신비롭게 느껴졌다.
공주의 기사는 검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목숨을 거두어 주려는 건가?’
직접 고통을 덜어주려는 듯한 모습에 마토스는 어린 기사에게 감사했다.
기사는 마토스 앞에 서더니, 검을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내리꽂았다.
마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 고통이 지나면 편안해질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정말로 점점 고통이 사라졌다.
죽은 것인가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칼에 찔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고통이 사라지니 온몸의 감각이 다시 느껴졌다.
슬쩍 눈을 떠봤다.
신전에서 말하던 죽어서 가는 세상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전장. 자신은 죽은 게 아니었다.
거기다, 옆에서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자신과 같이 쓰러졌던 부하들이었다.
“어, 다친 게 나았어. 그 기사분이 치료한 건가?”
“아니, 그냥 검을 옆에 꽂았다가 뺀 것뿐이었잖아.”
“그럼 신관 같으신 분인가?”
“아니, 기사였잖아. 검으로 치유하는 신관도 있어?”
“검으로 치료하는 신관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부하들의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리 옆에 검이 박혔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머리를 찌른 게 아니라 머리 옆에 검을 박아넣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진짜 그 검으로 치료한 것일까? 거기다, 부하들에게도 같은 일을 한 거고?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기껏 살아났는데 다시 죽을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 개죽음을 당할 셈이냐!”
“아! 넵!”
마토스의 고함에 부하들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두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근처에는 싸움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싸우는 곳들도 조금씩 싸움이 지지부진해지고 있었다.
요새 병력은 기세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으니,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포위한 2 왕자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소극적으로 싸우면서 점점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유리한 전세.
마토스는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싸움에 가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요새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익!
퇴각하라는 신호였다.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적을 전멸시킬 게 아니라면 철수하기도 좋은 상황이었다.
마토스는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과 함께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같은 왕국군과의 전투는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었고, 생각보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토스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어린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누워있는 귀족 장교들이 여러 명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2 왕자 쪽 장교들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귀족이 죽은 모양이었다.
잠시 머릿속에 장교의 머리를 날려버리던 어린 기사가 떠올랐지만, 그는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요새로 들어가는 데 집중했다.
괜한 실수로 남은 부하를 잃을 수는 없었다.
* * *
요새에서 들려온 호각 소리를 기점으로 전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병사들은 뒤로 물러서고, 다시 진영을 헤집어볼 기회를 노리던 기사들은 요새로 말을 돌렸다.
2 왕자의 군대는 돌아가는 병사들을 추적할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명령 체계가 반쯤 붕괴하여 적을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물러서는 적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사람도 전달할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물러서는 병사들과 함께 요새로 돌아갔다.
미리 언질을 주었지만, 혼자 적 진영에 남았던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무척 기뻐해 주었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성벽에 올라 물러서는 적 병력을 바라보았다.
기사단과 함께 움직였던 공주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잘 된 것 같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좀 더 기다려봐야죠.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아직 모르는 거니까요.”
최선의 행동이 항상 최선의 결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그렇게 많이 죽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좋은 결과가 온 모양이었다.
얼마 뒤, 적진에 남겨놓았던 글란이 돌아와 적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예상대로 됐습니다. 실권 없는 최고 장교가 다시 철수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고, 이번에는 장교들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반대하던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수를 반대하는 장교들만 골라 죽였는데, 반대하는 장교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글란은 지친 얼굴로 회의 결과를 이야기했다.
“적들은 내일 아침 지원과 상관없이 물러서기로 했습니다.”
글란의 말처럼 다음 날 아침, 요새를 포위했던 2 왕자의 군대는 포위를 풀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원을 온다던 다른 부대도 다시 말을 돌렸다.
수도에서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