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제14편 회전(會戰) (1)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백작, 바도르 장군과 아이샤 공주, 우리 일행과 기사단의 선임 기사들까지.
모두 성벽 너머 요새를 포위한 병력을 바라보았다.
어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우리는 겨우 요새 안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아직, 요새의 포위가 풀린 것도 아니었고, 저 병력들이 물러가기로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 요새를 구하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다행히 요새의 사기는 무척 좋았다.
공주의 연설과 우리가 가져온 식량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성벽 위에서 보는 상대 진영의 분위기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장교들이 열심히 수습해 놓긴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룻밤 만에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무리였다.
결국, 지금이 기회였다.
시간 지나면 우리가 함께 있다고 해도 포위망 안에 있는 요새가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그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저희가 먼저 휘저어 볼까요?”
미겔이 성벽 뒤에 모여 있는 기사단을 가리켰다.
사기가 꺾인 진영을 기사단으로 휘저어 놓는다라…….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고, 전생에 책에서도 많이 보았던 작전이었다.
다만, 이 세상에는 귀족 장교라는 초능력자들이 있었다.
“병사들이 기사단을 막는 사이에 귀족 장교들이 능력을 사용할 겁니다. 기사단이 강력하다고 해도, 귀족 장교들의 대규모 공격을 막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겔의 의견은 백작의 기사들이 반대했다.
귀족 장교들의 대규모 공격이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들었던 이야기만으로도 이들의 반대가 이해될 정도였다.
실제로 전쟁의 승부는 병사들의 수와 기사들의 강력함이 아니라, 귀족 장교들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데 달려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 어떻게 한다.
밤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장교들의 목을 베어야 할까?
들킬 때까지 몇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도 같긴 한데…….
암살자 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과 달리, 공주의 명성에 해가 되는 일을 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공주가 참여한 전투에 암살자를 썼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공주의 명예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고민하자, 백작이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이 없으시다면, 정정당당하게 회전을 치르죠.”
“네?”
우리는 백작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요새가 있는데 회전이라니?
안전한 요새를 놔두고,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싸움을 걸다니.
이해할 수 없는 전술이었다.
우리들의 표정을 보고, 백작은 자신의 기사와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백작이 보자, 웃는 것으로 백작에게 대답했다.
자신감 넘치는 부하들을 보고, 백작은 말을 이었다.
“요새가 있어서 이렇게 문을 걸어 닫고 농성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공주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저희는 협곡에 나아가 마물을 상대하고, 외적을 무찌르는 왕국 군이자 기사단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지만, 병사들과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립을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갔을 뿐, 포위된 병력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사들의 고함, 병사들이 외침. 그리고, 치솟아 오르는 기세.
기사와 병사들의 모습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껍데기 깨고 나온 것 같은 모습.
나는 이제야 이 요새의 본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질 수 없겠는데요.”
달라진 분위기에, 미겔이 투구를 쓰며 말했다.
그레시아에서 온 기사들도 분위기에 휩싸인 모양이었다.
과할듯한 열기였지만, 이런 기세를 탔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공주도 발갛게 된 얼굴로 성벽을 내려갔고, 흥분한 기사들도 그녀를 따라 아래로 달려갔다.
성벽 위에는 원래 경계를 섰던 사람들과 발레아가 남았다.
발레아가 나를 보며 웃었다.
“전부 싸우셔도 돼요. 요새는 제가 지킬게요.”
발레아가 손을 들어 올리자, 성벽 위로 마나가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공주가 놀라 이쪽을 바라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진 소음.
그그그극.
돌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에서 송곳 같은 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돌로 만들어진, 단단하고, 빼쭉한 가시들.
가파른 성벽에 가시가 가득 솟아 나왔다.
요새의 성벽은 결국, 아무도 기어오르지 못할 것 같은 성벽이 되어버렸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부터, 멀리 물러서 있던 적 병사까지 바뀐 성벽을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거대한 성벽 전체에 펼쳐진 발레아의 영역.
물론, 저 가시 전부가 진짜는 아니겠지만, 그걸 구별하지 못하는 이상 전부 진짜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성벽 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손을 든 발레아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누가 이런 이적을 일으켰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리는 발레아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겠습니까?”
창백해진 얼굴, 식은땀이 맺힌 이마.
무리하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발레아가 정말 대단한 능력자라도 하룻밤 만에 이 넓은 지역을 전부 그녀의 영역 안에 두었을 리가 없었다.
어딘가 편법을 쓰고, 능력 이상의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 터였다.
이건 분명, 발레아답지 않은 짓이었다.
“괜찮아요. 점심 전에만 끝내주시면요.”
그 이야기는 점심이 지나면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점심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는지 들어야겠습니다.”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내 귀에 발레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아가는 새를 쫓아가려면 여우 다리에 피 정도는 나는 법이에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말을 가슴속에 담아두었다.
아래로 내려오자, 놀란 백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 어린 귀족 처녀와 함께 다니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공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발레아가 이런 이적을 벌일 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 공자도 그렇고, 공주님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범상한 사람들이 없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레시아 공작이 공주님과 손을 잡았던 이유가 있었을 텐데.”
백작은 가슴에 손을 올려 공주에게 경례를 올렸다.
“저희도 실력을 보여드리죠. 소로카 요새의 진정한 실력을.”
백작은 직접 말에 올라 요새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미겔 기사가 자신의 기사단에게 소리를 쳤다.
“우리도 요새 기사들에게 질 수 없다! 그레시아 기사단과 동부 기사들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사들이 말을 타고, 검과 창을 뽑아 쥐고,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 뒤에 늘어선 병사들도 흥분한 것은 다를 바 없었다.
공주와 나도 말에 올라탔다.
말에 올라탄 공주가 흠칫, 내 옆을 쳐다보았다.
나도 옆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찰은 잘했어?”
내 말에 허공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마나를 느낄 수 없다면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절 알아보는 사람이 왜 늘어나는 걸까요?.”
사람 형태로 마나가 느껴지는 허공에서 백작의 아들. 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란이 능력으로 모습을 감추고 다가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요새를 포위한 병력을 정찰하고 이제 막 돌아온 것이었다.
글란은 확실히, 전보다 더 알아보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마나가 아니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아쉽게도 이곳에는 그의 능력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능력에는 상극이 있는 법이야. 왕족들은 마나를 볼 수 있으니, 왕족 앞에서는 안 쓰는 게 좋을 거다.”
내 말에 글란이 능력을 거두어들였다. 공주가 갑자기 나타난 글란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말에 글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공주님이야 그래서 알아보는 거고, 선배님은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단순한 함정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나야 그만큼 실력이 좋은 거고.”
“쳇!”
글란은 내 말에 혀를 찼다.
“그래서 정찰은 어떻게 되었는데.”
내 말에 글란은 표정을 다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글란은 많이 달라졌다. 백작과 사이도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글란의 변화를 생각하면 확실히 백작은 공주의 편에 설만 했다.
“선배님이 죽인 그 기사가 실제로는 저 부대의 대장 격이었나 봐요. 직급이 더 높은 귀족 장교가 있긴 한데, 실권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데요.”
“조금 전에도 막 혼자 철수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다른 귀족 장교들의 설득에 겨우 잠잠해졌어요.”
“그 귀족 장교를 빼면 일종의 귀족 장교들의 협의로 부대가 움직이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철수하자는 장교도 일부 있지만, 그래도 많은 장교가 지원군이 올 때까지 우선 버티자는 의견이었어요.”
겁많은 실권 없는 대장과 여러 귀족 장교들의 협의체라.
그렇다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공주에게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해주었다.
“에엑, 다 기억 못 하는데……. 거기다 병사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어떻게 선배님을 따라다니라는 거예요. 마물들하고 싸울 때도 목숨이 간당간당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글란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공주는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생각으로도 괜찮을 법한 계획인듯했다.
공주의 지시에 미로, 악셀 기사가 백작과 미겔 기사에게 달려갔고, 두 사람에게 내 계획을 전해주었다.
미겔도 백작도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곧이어, 성문이 열렸다.
그그그긍.
제일 먼저 요새 기사단이 열을 맞춰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원을 온 우리 쪽 기사단이 문을 나섰고, 이어서 요새에 있던 왕국군들이 문을 빠져나갔다.
합쳐서 백이 넘는 기사단과 천 명이 넘는 병사들.
포위하던 2 왕자의 병력은 우리의 배가 넘었지만, 기세와 사기가 전혀 달랐다.
우리가 성 밖으로 나가자 적 병력 전체가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요새에 있어야 할 병력이 밖으로 튀어나올 줄 생각도 못 한 모양이었다.
두 기사단이 나란히 앞에 서서 길게 열을 맞추었고, 뒤이어 병사들이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서, 요새 도시에 있던 귀족들과 우리 쪽 젊은 귀족들이 병사들과 기사들 사이에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저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우리는 성을 다 빠져나와 공격 진형을 만들었다.
이제 움직일 시간.
공주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카를로스 왕국의 이름으로. 부대 전진!”
히이잉!
말들이 앞다리를 들고, 크게 울었고. 병사들이 창을 바닥에 찍었다.
투툭, 투둑, 투두, 두두, 두두두.
말들이 천천히 걸어가다가, 점점 속도를 높였다.
뒤따라오던 병사들도 이제 달리기 시작했다.
마물을 막기 위해, 중립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려야 했던 기사와 병사들이 사슬을 끊고 구릉을 내달렸다.
“마물을 상대하던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백작이 기사들의 선두에 서서 목청을 높여 소리쳤고, 기사와 병사들이 백작의 외침에 환호했다.
적들이 급하게 진용을 갖추는 게 보였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적 장교들이 손을 펼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장 전체에 마나가 출렁였다.
우리 쪽 귀족들도 손을 높이 들었다.
병력이 충돌하기 전에 먼저 귀족들의 능력이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파파파팟!
허공에 스파크가 튀어 올랐고, 곳곳에서 반투명한 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능력과 마나가 달려가는 우리 진영에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