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제11편 기사 알렉스 (2)
“나는 로바르 디 라몬이네. 동부 왕국군에서 장교로 근무하고 있지.”
내 소개를 듣고, 중년의 기사도 예를 표했다.
왕실 부단장까지 했다더니, 장군도 아니고, 그냥 장교?
설마, 전생처럼 여기도 군대 텃세 같은 게 있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기사는 예를 표한 뒤에도 계속 말을 이었다.
“실력이 좋은 공주의 호위 기사 이야기는 전에 들었었어. 하지만 이렇게 어릴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아직, 다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몸은 이제 웬만한 성인들보다 컸다.
다만, 얼굴은 아직, 십 대 소년이라,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쓰지 않으면 저런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화려한 등장치고, 쓸 만한 기사가 없나 보군. 자신의 호위 기사를 죽을 자리에 내보내다니.”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자네의 실력을 보고 아쉬워서 살려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이건 내전이고, 대련과 달리, 전쟁에서는 봐주는 일이 없으니까.”
나도 봐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겠지?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명성이 없으니, 이렇게 매번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오해도 오늘로 끝이었다.
“할 이야기는 다 하셨습니까?”
나는 예를 표하기 위해 세워두었던 검을 내렸다.
아무래도 평상시처럼 마나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묶어두었던 마나를 풀어헤쳤다.
우우우우웅.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나.
파파파팍!
마나는 중간에서 기사의 마나와 부딪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중간부터 만들어진 불꽃이 점점 기사 쪽으로 움직였다.
중년 기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것도 여러 번 들은 소리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새도, 적들도, 우리 편도 전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귀족들은 어느 정도 보이기는 하겠지만, 이 정도면 다른 능력이라고 충분히 우길만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직, 둘 사이에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허공에다가 힘껏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기사는 의아해했지만, 곧이어 경악한 표정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캉! 카앙!
치켜든 검에 폭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나는 혀를 찼다.
나름, 가까운 데서 기습을 가했는데, 이렇게 쉽게 막히다니.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살 속도 이상으로 날아가는 마나였다.
실력 있는 기사라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막히는 것을 직접 보게 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역시, 이 ‘마나 방출’은 실력 있는 기사나 귀족이 보는 곳에서는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결과에 아쉬워했지만, 저쪽은 엄청나게 놀란 것 같았다.
“맙소사, 이건 마나 검기인가?”
이름이 좀 다르긴 했지만, 대충 알아보긴 한 것 같았다.
“이 능력은 분명 오래전부터 상속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이 능력은 왕국의 보물인 ‘기사의 검’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유실된 능력이었었나?
“어떻게 이 능력을? 그레시아 공작가에 이런 능력이 내려오고 있는 거였나?”
중년 기사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바로 덤비지 않은 것을 보니, ‘마나 방출’이 다시 등장한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인듯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내전 상황, 상대방의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팟!
나는 힘껏 땅을 박찼다.
기사의 놀란 눈이 빠르게 다가왔다.
기사는 바짝 접근하는 나를 보고,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접근전을 할 생각인 건가! 본인에게 유리한 거리도 알지 못하는 초보였……?”
카아앙!
나는 검을 힘껏 휘둘러, 쓸데없는 조언을 막아버렸다.
거리를 모르는 초보라니, 어디서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를.
힘으로 상대의 검을 튕겨내고, 한 걸음 더 다가가, 반대편 주먹으로 머리를 후려쳤다.
쾅!
기사는 충격에 몸을 휘청거렸고, 나는 다시 한번 검을 아래로 힘껏 내려쳤다.
쿠아앙!
흙이 터져 나가고, 땅이 푹 패였다.
아쉽게도 충격이 크지 않아, 기사는 이번 공격을 피한 것 같았다.
나는 마나를 머금은 손을 휘저어 퍼져나간 흙먼지를 가라앉혔다.
먼지가 가라앉자, 뒤로 물러선 기사가 보였다.
찌그러진 투구와 얼빠진 표정, 그는 황당한 얼굴로 나와 푹 패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내가 더 유리한 거리 같은데요.”
“설마, 상속능력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는 건가?”
“아예 없지는 않다고 들었는데요.”
나도 수도에 오기 전에는 없다고 알고 있었지만, 공주도 그렇고,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설로만 전해오던…….”
기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기사가 된 귀족들은 대부분 육체 능력, 그것도 ‘마나 회로 구축법’ 속칭 ‘마나 심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카를로스 왕국의 귀족 기사들은 많은 이들이 국왕의 마나 심법 중 하나를 얻어서 귀족 기사가 되곤 했다.
내 앞에 선 기사도 같은 식으로 기사가 된 귀족이었다.
아마도,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와 피가 이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 능력 하나만으로 왕실 기사단 부단장까지 올라갔었는데, 뜬금없이 나 같은 놈이 나왔으니, 믿기 어려운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내가 실수했군.”
그는 표정을 굳히며 찌그러진 투구를 벗어 던졌다.
“어찌 되었건 나만큼, 아니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기사를 만났는데, 나이가 더 많다고 어이없는 짓을 해버렸어.”
그는 다시 한번 검을 치켜세웠다.
“최선을 다하지. 내 실력을 보여주겠네.”
그 말에 나는 씩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 * *
미겔은 멍한 얼굴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한창 기사의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왕실 기사단 전 부단장과 아카데미를 아직 졸업하지 못한 소년 사이의 일대일 결투였다.
분명, 어느 쪽이 이길지 충분히 예상되는 대결이었다.
소년이 얼마나 버틸지 내기라도 걸어야 할 전투.
나설만한 다른 사람도 없고, 공주가 허락까지 해서, 공자가 나서는 것을 막지 못했지만, 미겔도 지금 같은 광경을 보게 될지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리고, 옆에서 같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우고 기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공자님이 이기고 있는 건가…….”
미겔은 고개를 저었다.
“이기는 정도가 아닌데요.”
저건 그냥 이기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장면이었다.
흙먼지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일 때도 많았지만, 저건 저 대결은 분명 알렉스 공자가 압도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대단하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저렇게 강하실 줄이야.”
우고 기사는 검을 휘두르는 알렉스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는 천재로 이름이 높더니, 각성한 뒤로는 사람들의 걱정을 개의치 않고 어린 나이에 기사보다 강해지더니.
지금은 왕국의 손꼽는 기사와의 대결에서 승기를 거머쥐고 있었다.
놀라운 모습이었고,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우고로서는 감동할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를 직접 가르쳤던 미겔은 놀라움과 감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겔은 놀라는 중에도 보이는 광경에 의문이 느껴졌다.
“그런데,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피하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멀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우고 기사가 고개를 저었지만, 미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잠시뿐이었다.
다시 싸움이 격렬해진 것이었다. 그는 다시 알렉스 공자의 놀라운 검술에 빠져들었다.
* * *
검을 부딪치고,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는 것 같았다.
검날에서 튀어나오는 불꽃이 허공에 머물고, 머리카락에서 튕겨 나온 땀방울이 눈앞에 멈춰 선 것 같았다.
카아아아앙!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전보다 훨씬 길게 늘어졌다.
대검이 상대의 검에 부딪혀서 멈춰 섰다.
검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왕실 기사단의 전 부단장이 약할 리가 없었다.
여러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마나 심법과 검술만 가지고 상대하니, 상대도 제대로 어울려주었다.
다른 기사들처럼 하나의 심법과 검술을 오랜 시간 단련해서 만들어낸 자신만의 기술.
기사의 검술은 내 다양한 검술과 심법을 계속 막아내고 버텨냈다.
기사가 잘 막아준 덕분에 싸움이 즐거워졌다.
아직, 이곳이 어디이고, 내가 무엇을 하는 중인지 잊지 않았지만, 좀 더 검술과 심법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좀 더 날카롭게, 좀 더 감각적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검술과 심법을 이어가면서,
나는 초대 왕 카를로스 용사가 추구했던 검술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렇게, 검을 통해 상대의 검에 담긴 힘을 느끼고, 그 힘을 되받아 밖으로 풀어냈다.
검이 가벼워졌다.
상대의 가벼운 검을 대검에 붙이고, 힘차게 밖으로 떨쳐냈다.
터어어엉.
아. 검이 날아가는 소리에 집중이 깨져버렸다.
아쉬움에 혀를 차니, 상대는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들린 소리가 그의 손에서 검을 날려버린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검을 잃은 상대에게 검을 겨누었다.
아쉬웠지만, 그만큼 예의 있는 마무리가 필요했다.
“좋은 대결이었습니다.”
“하, 말도 안 되는…….”
내 정중한 인사를 그는 받아주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패배가 아니었다.
“도대체 능력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신나게 싸우는 바람에 생각보다 능력을 많이 드러낸 듯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예상 안 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죠?”
“당연하지, 초대 용사들 이후로 2개 능력을 가진 귀족도 말로만 전해졌지 실제로 나타난 적은 없었어! 하지만 너는 셋, 아니 그 이상의 능력을 썼어. 거기다 그 능력은…….”
그는 이제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내 손을 쳐다보았다.
모르고 있었는데 손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생각보다 더 날뛴 모양이었다. ‘마나 감응력’이 드러날 정도로 싸우다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풀어놓았던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손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잠잠해졌다.
“방금 말씀 하셨는데요. 2개 이상의 능력을 쓴 사람들을.”
“그게 무슨……. 설마…….”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못할 사람이었다. 궁금한 내용은 모두 알고 가는 게 좋을 듯했다.
“용사들은 전부 다중 능력자들이었습니다. 그 뒤에 귀족들이 반쪽짜리였을 뿐이지요.”
“설마, 네가 용사의 재림이라는 소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