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제10편 기사 알렉스 (1)
한쪽 성벽으로 협곡을 틀어막은 천연의 요새라는 소로카 요새.
주변에 펼쳐진 구릉과 언덕, 절벽과 산맥 때문에 오랜 세월 점령당하지 않았던 그 요새 도시가 지금은 수많은 병력에 포위되어 있었다.
물론, 싸움에 져서 포위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요새로 진군하는 병력을 막지 않았기에 이렇게 포위를 당한 것이었다.
하기야, 함부로 싸우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요새를 지키는 병사와 요새를 포위한 병사 모두 왕국을 지키는 병사. 상비군들이었다.
저들은 영지에서 끌어모은 병사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어깨를 맞대고 왕국을 지키던 동료들이었다.
2 왕자를 따르는 장군과 장교들과 달리, 바도르 백작은 중립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동료를 치라고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소로카 요새 도시는 지금 이렇게 같은 왕국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우리는 요새와 포위한 병력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올라섰다.
공주의 진영, 공주의 기사단의 첫 출진이었다.
이제는 전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였다.
“깃발을 올려라!”
미겔이 소리를 치자, 기사단은 아이샤 공주를 뜻하는 불타는 사자가 그려진 깃발을 높이 세웠다.
왕가의 상징인 사자와 공주의 외가에서 내려오는 불새의 이미지를 합친 모습은 마치 깃발 전체가 불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고함과 함께 깃발이 들리자, 요새를 지키는 사람들과 포위한 병사들 모두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도 있고, 놀라는 병사도 있었다.
처음 보는 깃발을 든 기사단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편인지 파악하기 전에는 모두 함부로 나서지 않을 듯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어야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모두 이쪽을 쳐다보자, 벤자민 선배가 악셀 기사와 함께 구릉 아래로 말을 달렸다.
두 사람은 구릉을 반쯤 내려가 멈춰 섰다.
마나로 목청을 키우면 포위한 병력과 요새까지 모두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였다.
악셀 기사가 방패를 들고, 반쯤 비켜서서 벤자민을 지키는 사이에, 벤자민이 마나를 담아 크게 소리쳤다.
“카를로스 왕국의 왕족이자, 왕위 계승자이신 아이샤 공주님이 세우타 요새로 찾아오셨습니다! 모두 예의를 갖추어 공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벤자민의 말이 구릉을 넘어, 요새의 성벽 위까지 퍼져나갔다.
귀족의 방문을 알리는 전령의 역할. 지금 벤자민이 하는 일이었다.
원래 병사 중 한 명이 하는 일이었고, 왕족이나 높은 귀족이라면 휘하의 귀족 중 하나가 해야 했다.
물론, 이곳에는 벤자민 외에도 다른 귀족들이 있었다.
기사들과 떨어져서 따로 움직이던 젊은 귀족들. 공주 진영에 참여한 귀족들의 자식들이었다.
전공을 세우고 싶어서 따라온 귀족들이었지만, 조금이라도 하찮은 일은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 하찮은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전령 역할이었다.
그들은 그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기 급급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댔지만, 결국은 전령 역할이 천해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더 보기 싫었다.
차라리 적이었으면…….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해서,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혔다.
어쨌거나, 아직은 아군이었다. 괜한 감정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외면하니, 결국 전령 역할은 벤자민 선배가 하게 되었다.
다행히 벤자민 선배는 전령 역할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전령이라면, 자신의 달변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거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때문이었다.
벤자민의 말이 끝나자, 요새의 성벽 위도, 포위하고 있던 병력도 모두가 소란스러워졌다.
갑자기 공주가 기사단을 이끌고 등장했으니, 시끄러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구릉 위에 서서 저들이 뭔가 결론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나도 멍하니 벤자민 선배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재미없어 보이네요.”
언제 옆에 온 것인지…….
발레아가 옆에서 말을 건 것이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발레아 말대로 조금 지루해하고 있었다.
“세력을 갖춘 채로 움직이려면 따라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겪으니 확실히 지루하네요.”
우리가 누구인지 전령을 보내 알리고, 상대가 답변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답변을 들으면 또 그에 대해 대응을 하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귀족, 왕족의 행사는 무척이나 지루했다.
만나면 말없이 검부터 휘두르던 예전 일을 떠올리면, 지루함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 포위한 병력 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제복을 입은 것을 보니, 하급 귀족 장교였다.
그는 벤자민이 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우리가 서 있는 구릉 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우선, 공주님이 직접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군 통솔권자이자, 진정한 후계자이신 두아르도 왕자님의 지시를 받고 왔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왕국군 내부의 일이니, 제삼자는 그냥 물러서기를 바란다.”
오, 생각보다 좋은 대답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세 가지나 되는 반박을 만들어오다니.
2 왕자 쪽에도 좋은 문장가나 책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좀, 재미있어질 것 같은데…….”
내 중얼거림에 발레아가 피식 웃었다.
동시에, 벤자민 선배의 반박이 들려왔다.
“공주님이 직접 오신 것은 바로 확인시켜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이 왕국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것도 보여줄 수 있다!”
벤자민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주가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섰다.
구릉의 맨 꼭대기에 오른 공주는 허리에 찬 검을 빼고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힘껏 마나를 내뿜었다.
부우우웅.
내가 준 검과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나 감응력’이 포함된 빛이었다.
물론, 일반 병사들이 ‘마나 감응력’을 구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도 카를로스의 왕이 빛을 내뿜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빛은 보여 주기용 연출에 불과했지만, 아주 잘 먹힌 연출이었다.
구릉 위에서 환한 빛이 퍼져나가고, 그 빛 아래로 벤자민 선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당한 왕위 계승자는 현장에서 왕국군의 통솔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지 않은가! 어서 길을 열어라!”
달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벤자민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고, 상대방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환했던 빛은 오래지 않아 사그라졌지만, 병사들은 빛이 사라진 구릉을 계속 바라보았다.
빛이 사라진 구릉 위에는 아직 어린 소녀가 있었다.
타고 있는 커다란 말에 비해 작은 소녀였지만, 빛을 떠올린 사람들은 그녀를 작게 볼 수가 없었다.
‘멋진 데뷔네.’
벤자민이 깔아 준 판을 공주는 확실하게 받아먹었다.
멋진 연출과 화려한 등장.
지금 이 광경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두고두고 회자될 터였다.
이제 남은 것은 이곳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멋지게 등장해 놓고, 일이 꼬여 버린다면 공주는 억울해서 잠도 못 잘 터였다.
너무 대단한 광경을 보아서인지, 요새를 포위했던 병사들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들 좌우로 갈라서는 게 우리를 들여보낼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다들 표정이 밝아지는 듯했으나, 아쉽게도 일이 그렇게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움직이는 병사들 사이에서 기사 한 명이 뛰쳐나와 소리친 것이었다.
“우리도 명령을 받았기에 함부로 물러설 수 없다. 왕국의 기사라면 결투로 승부를 가리자. 내가 패배한다면 길을 비켜 주겠다!”
기사의 말에 병사들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린 귀족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소리를 쳤고, 갈라지던 진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명령 때문에 물러설 수 없기는 개뿔! 조금 전까지는 잘만 비켜 주고 있었잖아!’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상대가 정신을 차렸으니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기사의 말에 공주가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건 저쪽에서 기사가 나섰으니, 상대할 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거기다 이기면 길을 비켜 준다고 했으니, 기사들이 서로 나서려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싸우겠다고 나서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당황한 표정으로 상대방 기사를 보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내 의문은 옆에 있던 미로 기사가 풀어 주었다.
“저분이 나설 줄 몰랐습니다.”
저분?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가?
멀뚱한 내 눈빛에 미로 기사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십니까?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다가, 10년 전에 군부로 투신한 분입니다.
기사단처럼 강성한 군을 만들겠다고 군부에 간 분이었는데……. 그분이 2 왕자의 편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10년 전의 왕실 기사단이라니.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기사단장님과 두 부단장이 계셨을 때는 왕실 기사단이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미로 기사의 표정에 고개를 젓고는 다른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미로 기사처럼 과거를 회상하거나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몇몇 젊은 기사가 나서려 하기는 했지만, 나이 든 기사들의 눈짓에 손을 내렸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미겔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공주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제가 나서볼까 합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상대할 만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겔의 말을 듣고, 기사단을 살펴보았다.
아는 기사와 모르는 기사들의 실력을 모두 고려해 봐도 미겔보다 뛰어난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처참한 실력이라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내 실수를 깨달았다.
수도에서 왕실 기사단과 대단한 자들을 상대하다 보니, 너무 눈이 높아진 것이었다.
왕실 기사단을 제외하면 여기 모인 기사단의 수준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미겔도 실력이 많이 늘어서 왕실 기사단의 선임 기사와 승부를 겨룰 만하기도 했고.
다만 그 정도의 실력으로는 부단장이었다는 저 기사에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 말은 그나마 실력이 되는 자신이 나서서 죽음으로 공주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뜻이었다.
미겔의 말을 듣고, 공주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쪽에서 최강의 카드가 나왔다면, 이쪽도 최강의 카드가 나가야 했다.
이제 내전의 시작.
더는 숨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등에 진 검을 뽑아 들고 구릉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놀란 기사들과 귀족들이 나를 쳐다보았고 요새 위에서도, 포위한 병력들도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병사들 앞에 선 중년의 기사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얼굴 때문인 것 같았다.
여러 시선을 가볍게 넘기며 나는 기사 앞에 섰다.
그리고 양손으로 검을 잡고, 예를 표했다.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이자, 아이샤 공주의 호위 기사 알렉스가 인사드립니다.”
내전의 영웅이자, 적에게는 악몽의 기사로 불리는 기사 알렉스의 첫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