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제8편 진짜 계승자
“그날은 아마 10살 무렵이었을 거야. 내 각성일이었으니까.”
왕세자는 지금 왕궁 정문 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가 어렸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지만, 나는 무척이나 편하게 각성식을 기다리고 있었지. 나는 그때 ‘마나 감응력’을 얻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거든.”
‘마나 감응력’을 얻기 위해 10살까지 각성을 늦추는 카를로스의 왕족처럼 왕세자도 10살까지 각성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원래, 마나 감응력을 얻는 왕족들은 그 기미를 느낄 수 있다고들 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마나를 잘 인식하고, 주변에 대한 감각도 남다르다고 들었으니까.”
확실히, 나도 ‘마나 감응력’을 얻기 전에도 그런 기미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거든.”
왕세자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날, 각성식을 시작하기 몇 시간 전이었어. 아버지가 내 방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데려온 것은.”
* * *
10여 년 전,
왕세자, 아니 아직 왕세자가 되기 전인 안토니오 왕자는 자신의 방에서 각성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왕자의 방과 달리 밖은 무척이나 어수선했다.
공국이 세워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도 수도도 무척이나 활기차고 소란스러웠다.
더구나 오늘은 공국이 세워지고, 왕족의 첫 각성식이었다.
처음 해보는 왕족의 각성식이니, 하녀도 집사들도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0살이 된 소년은 그런 소란스러움에 관심이 없었다. 다들 실망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사이, 소란스러웠던 밖이 조용해지고, 문이 열렸다.
안토니오 왕자는 벌떡 일어나서 들어오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빨리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젊은 공국왕이 안으로 들어왔다.
30대 초반의 아직 젊은 왕이었지만, 안토니오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왕자는 그런 사람을 아버지로 둔 것이 두렵고, 자랑스러웠다.
“안토니오. 각성식을 시작하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공국왕의 목소리에 안토니오 왕자가 고개를 드니, 왕의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흐릿한 인상에 나이를 알기 어려운 남자. 왕자는 그가 그냥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누구신지…….”
왕자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공국왕도 남자도 왕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공국왕은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물었다.
“아들은 제대로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건가?”
남자는 왕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때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망가진 유물……. 아니, 완숙되지 않았던 기술이 충분히 안정화되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완벽한 능력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평범한 대답이었지만, 왕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저런 대답을 할 수 있다니. 아버지에게 저렇게 편하게 대답하는 사람을 왕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좋아. 전에 그대가 나를 찾아왔을 때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저는 언제나 왕과 이 공국에 도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거기다, 무서운 공국왕이 저렇게 유하게 받아주다니.
안토니오 왕자는 오늘 처음 보는 일들이 많은 신기한 날이라고 느껴졌다.
그 대화를 끝으로 왕은 옆으로 물러섰고, 남자는 왕자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왕자는 남자가 얼마나 나이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팔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왕자는 아버지를 쳐다보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공국왕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하세요.”
남자는 편한 모습으로 왕자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보니, 남자는 반대쪽 팔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로 왕자의 팔을 잡고 있었다.
왕족 앞에서 할 수 없는 무례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왕자는 무례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더구나, 생각해보니, 이 남자는 공국왕 앞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오랜 시간이 지나 남자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게 되어서도, 이 기억은 남게 되었다.
우우우웅.
왕자는 자신의 몸속에 무언가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누가 떠드는 것 같기도 했고, 이상한 기분과 감각이 왕자의 머리와 온몸을 헤집었다.
왕자가 그렇게 한참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고통받고 있을 때, 남자는 왕자의 팔에서 손을 뗐다.
“되었습니다. 이제, 각성식에서 ‘마나 감응력’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번에도 원하는 보상은 없나?”
“왕자님이 원하시는 능력을 얻게 되신 것이 제 보상입니다.”
공국왕은 남자의 말에 혀를 찼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겨우 정신을 차렸던 왕자는 왕의 혼잣말에 크게 놀랐다.
평상시 저렇게 자신 없는 말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남자는 떠나고, 그날 왕자는 각성식에서 ‘마나 감응력’을 얻을 수 있었다.
* * *
“그날, 본 남자는 다시는 보지 못했어. 지금은 그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보게 된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왕세자의 긴 설명이 끝났다.
내 예상보다 훨씬 자세한 설명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큰 소란이 날 만한 이야기였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한 것인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인 전승인 ‘마나 감응력’을 어떤 왕족에게서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
“그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까?”
능력을 얻게 해 준 남자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왕족 앞에서 뻔뻔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지체 높은 사람일 가능성이 클 것 같고,
공국왕에게도 능력을 부여한 것처럼 보였으니, 나이가 많지만 동안이라는 정도이려나.
뭔가 특이했지만, 이걸로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투가 제국 쪽 사람 같았지. 좀 오래된, 고리타분한 말투였지.”
역시, 예상대로 조직에 속한 사람이었으려나.
범위가 좁혀진 느낌이었지만, 뭔가 확신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왕세자는 피식 웃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정말 우리 공국을 사랑하는 ‘지나가는 현자’가 아닐까 생각했었어.”
왕세자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그 뒤에 카를로스 왕국의 2 왕자가,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이샤 공주까지 ‘마나 감응력’을 얻게 되었지.”
왕세자의 말에 나도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거야. 그 남자는 우리 공국만이 아니라, 2 왕자에게도, 공주에게도 능력을 얻게 해준 게 아닌가.”
왕세자의 말대로, 확인해 봐야 했다.
왕국의 왕족들도 남의 도움으로 능력을 얻게 된 것인지.
다행이었다. 구슬을 고친 덕분에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근처에 가기만 해도 확인이 가능했다.
“나는 그 남자가 원하던 게 지금 이 내전이 아니었을까 걱정이 돼.”
제삼자에게 휘둘려 왕국과 공국이 내전에 휘말리게 된 것이 아닌지 왕세자는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휘말리게 된 당사자가 자신이라는 것도.
왕세자는 차마, 공국왕도 본인처럼 강제로 각성했다고 생각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지금도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인지.
하기야, 공국왕도 포함하면, 시기상으로 너무 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 왕국에 내전을 일으키기 위해, 수십 년 전부터 왕족들에게 ‘마나 감응력’을 일깨워주었다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이야기였다.
나도 믿기가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어딘가 찝찝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되면, 공주나 왕자들을 확인해봐 줘. 그들도 나처럼 각성을 시켜준 것인지.”
역시, 내게 이런 비밀을 이야기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궁금증을 내가 대신 풀어달라는 이야기였다.
다른 왕자들도 같이 이야기했지만, 결국 공주에게 물어보라는 이야기였다.
“아버지 몰래 꺼낸 이야기니, 비밀을 지켜주고.”
왕세자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펼쳐놓은 방음벽을 거두어들였다.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 슬쩍 고개를 돌렸다.
대화를 끝내고,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왕세자는 떠나는 마차에 손을 흔들었고, 마차는 빠르게 왕궁을 벗어났다.
나는 멀어져가는 왕궁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쨌거나 왕세자의 말대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공주를 믿고 있었지만,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 * *
우리는 여관에서 레스티와 만났고, 바로 여관에 맡겨 놓았던 말을 타고, 수도를 떠났다.
레스티도 신자들을 만나 여러 정보를 얻은 모양이었지만, 아쉽게도 왕궁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다른 내용은 없었다.
아직,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니,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신기하게도 차르 제국은 조용했다.
왕궁에서 들었던 이야기에서도, 레스티가 가져온 정보에서도, 제국이 움직인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벌인 마물의 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국은 내전으로 정신없는 왕국을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일만 남은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레시아 영지가 있는 동남쪽으로,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이번에도 발레아가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대단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발레아는 말들에게 환상을 보게 해, 쉬지 않고 계속 달리게 만든 것이다.
말들에게 무슨 환상을 보게 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나도 레스티도 발레아에게 묻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말들은 계속 얼굴이 벌게진 채로 침을 흘리며 달려 나갔다.
공국을 벗어나, 영지들을 지나, 그레시아 영지까지.
그리고, 나는 영지 경계에서 공주와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다행이에요. 어긋날까 봐 걱정했는데.”
말을 타고 갑옷을 차려입은 공주는 우리를 보고 크게 반색했다.
공주는 서로 길이 어긋날까 봐 걱정했다지만, 실제로 어긋날 리는 없었다.
공주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셀린 교단 덕분이었다.
공국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셀린 교단이었지만, 내전에 관해서는 기대 이상의 정보들을 빠르게 전해주었다.
공주와 내가 찾아갔었던 소로카 요새가 제2 왕자의 명령을 거절하고 중립을 지킨 것도,
분노한 제2 왕자가 본보기로 소로카 요새를 치기로 한 것도,
셀린 교단의 신도들 덕분에, 모두 늦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공주가 기사들을 이끌고, 소로카 요새를 도와주려 하는 것까지,
우리는 공국을 벗어나기 전에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달려온 것도, 공주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공주가 안심한 것처럼 나도 공주를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마나 감응력 : 레벨 1
< 검기 활용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마나 유형화 : 레벨 2
공주에게는 강제 각성 표시가 붙어 있지 않았다.
모두 순수하게 본인이 각성한 능력이었다.
‘마나 감응력은 일인 전승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두 왕자 모두 강제 각성인 건가?’
특별한 사례인 나를 제쳐둔다면, 결국, 제대로 능력을 이어받은 사람은 아이샤 공주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아이샤 공주가 카를로스 왕국의 진정한 왕위 계승자란 말이잖아!’
그리고, 그 진정한 왕위 계승자는 커다란 말 위에 앉아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