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제7편 선물
다행히 공국왕이 화내기 전에 사과를 할 수 있었다.
몇 가지 협의를 더 하고, 공국왕과의 접견도 잘 끝낼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방에 돌아온 뒤, 나는 구슬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평범해 보이는 검은색 구슬.
하지만,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평범한 유물도 아니었다.
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조금 전 보고, 들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우선, 구슬이 생각보다 쓸모없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능력도 볼 수 있다니.
이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기본적인 능력을 알 수 있고, 구슬을 쥐게 한다면 내가 본 것 같은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요하다면, 능력을 관리자 이외에 당사자도 보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
나만 볼 수 있으면 충분했다.
동료들도 내가 보고 알려 주면 그만이었다.
어쨌거나, 구슬의 새로운 능력은 뜻밖의 보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들려온 말은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강제 각성이라니…….’
강제 각성이라는 말에 예전 일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입학식 때의 폭발, 그걸 일으킨 아이들의 스승이라는 자.
그는 조직, 제국에서 온 사람이었다.
거기다, 능력을 두 개 가지고 있었던 조직의 용병, 비드도 생각났다.
비드는 육체 능력과 화염 능력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설마, 공국도 조직과 연계된 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공녀 일로 공국은 조직, 제국과 전투까지 벌였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공국왕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어봤다가는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올 테지.
“이걸 어쩐다…….”
한참을 고민해보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더 조심하는 수밖에.
나는 구슬을 따로 안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섰다.
공국에서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작별 인사를 하고 공국을 떠날 시간이었다.
대공녀는 아쉬워하겠지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예상대로 대공녀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래서인지, 대공녀 응접실에서 열린 마지막 다과회는 조금 우울했다.
물론, 대공녀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긴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다들 싸우게 되는 건가요?”
공주가 후계자 선언을 했다는 말을 들은 대공녀는 아이샤 공주, 아니 나와 싸우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다행히, 공국왕과 따로 약속한 것이 있으니, 대공녀의 걱정처럼 바로 싸울 리는 없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왕국의 왕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가 되었건 결국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이 최대한 늦어지거나, 누군가 마음이 바뀌기를 나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우울한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대공녀가 작은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데……. 그동안 도와주신 감사의 선물이에요. 대단한 것은 아니고, 수리한 유물 중에 기념이 될만한 것을 골랐어요.”
오, 선물이라니.
감사 인사를 하고,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단순하지만, 우아한 반지였다.
그런데, 조금 작아 보였다.
손가락에는 안 맞을 것 같은데…….
목에다 걸어야 하나?
“크기가 조절되는 유물이에요. 한번 껴보세요.”
대공녀의 말에 반지를 손가락에 끼어보았다.
대공녀의 말대로 반지가 늘어나더니, 손가락에 딱 들어맞았다.
“크기 조절되는 것 말고도, 몇 가지 기능이 더 있는 유물이에요.”
대공녀는 반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나를 모아 눈부실 정도로 강한 빛을 뿌리는 기능하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기능도 있어요.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는 기능도 있다는데, 확인은 해보지 못했어요.”
플래시 능력에, 보온 능력에, 정수 능력이라…….
‘이건 완전 생존 키트잖아!’
“저야 큰 쓸모가 없는 유물이지만, 여행을 많이 하는 공자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도움이 되다마다.
밤에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좋아졌다고 해도, 흑백으로 주변을 보는 것은 밝은 빛을 통해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 보온 능력에 정수 능력까지 있다니.
이건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능력이 하나 더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대공녀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게, 제가 가지고 있는 유물과 비상 연락 기능이 있어요. 비상시에 상대방에게 위치를 알릴 수 있는 기능이에요.”
오, 그것도 좋은 기능이었다.
당장 찾아올 수는 없겠지만, 위치라도 알 수 있다면 나중에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왜 우물쭈물했지?
의아한 눈으로 대공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슬쩍 눈을 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슬쩍 손을 테이블 아래에 숨겼다.
그제야 나는 왜 그녀가 우물쭈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대공녀가 손을 숨기는 사이, 그녀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볼 수 있었다.
대공녀의 손가락에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와 똑같이 생긴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끼워져 있는 손가락도 다르고, 의미도 달랐지만,
두 반지를 나란히 꺼내놓으면 커플 반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반지를 보고, 잠시 전생을 떠올리게 되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딴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이상하게 흐르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다시 한번 대공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서로에게 구조 신호까지 보낼 수 있는 이 유물 반지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고마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곳에서 대공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발레아와 나는 왕궁 앞으로 나갔다.
왕궁 앞에는 왕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옆에는 뜻밖의 사람이 나와 있었다.
왕세자가 우리를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발레아와 나는 놀라 왕세자에게 인사를 했고,
“세자빈이 고맙다고, 작별 인사라도 하고 오라고 성화가 심해서…….”
왕세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말했다.
왕세자는 호탕한 기사이자, 애처가였던 모양이었다.
마초들로 가득한 이쪽 세상의 기사와 왕자로서는 무척이나 특이한 사람이었다.
“세자빈의 말도 전하고, 가기 전에 다른 할 말도 있어서…….”
왕세자가 말을 얼버무렸지만, 발레아는 왕세자의 말을 바로 알아차렸다.
“저는 먼저 마차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뭔가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발레아가 마차에 먼저 올랐다.
“죄송합니다.”
왕세자는 발레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주변에 마나를 뿌렸다.
방음벽이 펼쳐지고, 주변의 소음이 사라졌다.
“현숙하고 아름다운 영애시군. 어제는 동생하고 친하다고 해서 묻지 못했는데, 자네의 검을 바친 분이신가?”
기사가 여성에게 검을 바쳤냐고 묻는 것은 결국, 사귀는 사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하기야, 결혼도 안 한 귀족 영애가 기사와 둘이 여행을 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아닙니다. 그녀도 볼일이 있어서 같이 다닌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녀도 따로 볼일이 있는 것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었다.
거기다, 아름다운 것은 넘어가더라도, 현숙한 영애라니.
사람들이 매번 저렇게 속는 것을 보면,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런가. 그럼 다행이고.”
뭐가 다행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왕세자도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늘 아침, 아버지를 뵈었는데, 아버지께서 군의 진로를 잡을 때 1, 2 왕자를 우선으로 하라고 하셨어. 최대한 아이샤 공주 진영 쪽으로는 다가가지 말라는 말도 하셨고.”
내가 아직 공주에게 말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명령을 전하다니.
노회한 정치가인 공국왕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거기다, 이렇게 빨리 이야기하면 왕세자가 의심할 게 뻔했다.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동생의 친구라는 이유로 그런 결정을 내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단 말이지.”
그것 봐라. 이렇게 바로 의심했다.
왕세자가 지긋이 나를 쳐다보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기야 뭔가 있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을 테니.”
쩝, 의심 수준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네가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네게 이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원하신다는 뜻이야.”
내가 알고 있길 원한다고?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공국왕이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할 이유는 없을 텐데…….
나는 의아한 눈으로 왕세자를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왕세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여기로 와서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게 된 거야. 아, 세자빈이 감사 인사를 전한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야.”
역시, 왕세자가 ‘아내가 고마워하더라’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직접 나올 리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국왕의 호의에 의구심이 더 쌓이게 되었지만, 그래도 왕세자가 나와 준 덕분에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 기사형 영웅 능력자 >
< 사용 능력 >
- 마나 감응력 : 레벨 2 (강제 각성)
왕세자도 공국왕처럼 정보창이 보였다.
거기다, 왕세자는 공국왕의 정보창과 달리, 온전한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레벨 2.
하지만, 왕세자도 공국왕처럼 강제로 각성했다고 적혀 있었다.
[강제 각성한 능력자가 가까이 있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강제 각성은 다섯 번째 예비 에고의 능력입니다.]
들려오는 음성도 마찬가지였다.
공국왕과 왕세자 모두, 정상적인 방법으로 ‘마나 감응력’을 얻은 게 아니었다.
왕세자의 정보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잘된 일이지만, 그 정보는 나를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왕세자도 강제 각성을 했다니.
이렇게 되면 공국을 믿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떠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조직과 지금 어떤 관계인지 작은 정보라도 얻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외람된 질문이지만……. 왕세자님은 ‘마나 감응력’을 어떻게 얻으신 건지…….”
내 물음에 왕세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물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나.
아니면 너무 직접적으로 물었던 것일까.
나는 슬쩍 왕궁에서 달아날 수 있을 만한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혼자서는 어떻게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발레아와 함께 도망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여기서 죽기는 애매한데.’
다행히 왕세자는 바로 기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음……. 공주의 호위 기사니 알고 있는 편이 좋겠지.”
왕자는 방음벽이 펼쳐진 너머를 다시 한번 살피더니, 나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 주었다.